오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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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드는 라보네와 함께 하기로 했다. 즉흥적인 제안에 즉흥적으로 대답을 한 것 같기도 하지만, 루치드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장 이 도시에서 보호자 없이 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상황을 인정해야 했거니와, 이 세상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겠다는 생각이 반영된 결정이었다. 이제껏 자신이 태어나 살아온 세상이기에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착각이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라보네 역시 즉흥적이지만 루치드와 함께 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영리하다는 것과 마법사‘였’다는 점은 충분히 루치드를 포섭할 명분이 되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아카넬 때문이었다. 미치광이 마법사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었기에 ‘과장된 소문’이란 말과 상관없이 아카넬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아카넬이 성주에게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상황이었다. 마법사‘였’던 루치드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어보는 라보네였다.
게다가.
“어떻게 내 얼굴을 봐도 괜찮은 건지 말해주지 않을래?”
저주를 피하는 방법을 알아낸다면 그것만으로도 루치드와 함께 할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동생도 자신의 맨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래서 24시간 언제나 면사로 가린 모자를 쓰거나 천으로 얼굴을 둘둘 가리고 눈만 드러나게 하는 편법을 써야 했다.
“누나의 얼굴을 계속 분석하는 거죠.”
“뭐?”
“누나의 얼굴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거예요. 눈과 눈, 눈과 코, 코와 입 사이의 거리들을 구하고, 그것들을 비율로 계산해보는 거죠. 그리고 각각의 비율이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 보는 거죠. 또, 얼굴의 전체에서 눈, 코, 입, 눈썹, 점 등이 차지하는 면적과 비율, 거리 등을 또 구하고···.”
“그만!”
루치드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제가 아는 형이 한 번 해보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 해 본 거예요. 그냥 그렇게 계산을 하면서 바라보니까, 누나의 얼굴을 보는 게 어렵지 않더라고요.”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바로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그 ‘계산’이라는 걸 하면 신의 저주를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인걸까? 그렇다면 이걸 꼭 알아야겠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계산을 하는 거라고?”
루치드는 잠시 생각을 한 뒤, 다시 말을 꺼냈다.
“단순히 한 개의 식을 계산하는 건 아니고요, 다중 복합 계산? 뭐 이렇게 표현해야 하려나?”
루치드도 딱히 설명하기 좋게 표현할 단어가 없어 두루뭉술하게 설명했다. 당연히 라보네는 이해를 하지 못했고, 루치드는 예를 들었다.
“1, 2, 3, 4, 5 라는 숫자가 있어요. 그 다음은 어떤 숫자가 올까요?”
“6?”
역시 거대 상단의 부단주답다고 할까? 아니면 그냥 간단한 산수라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할까?
“맞았어요. 그럼 4, 5, 6, 7, 8, 9 다음은?
“10?”
“맞아요. 근데요, 12가 올 수도 있어요.”
“어떻게?”
“그걸 계산하는 게 다중 복합 계산, 뭐 이런 거예요.”
라보네는 그 답이 어떻게 나왔는지 물었고, 루치드는 별거 아니란 식으로 간단히 설명했다. 그 해설을 듣고서야 라보네는 다중 복합(?)이라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게 내 얼굴에 있다는 거야?”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루치드는 라보네의 얼굴이 신의 은총에 의해 ‘만들어진’ 얼굴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다른 사람의 얼굴도 그렇겠지만, 특히 신의 손길이 닿았다는 얼굴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를 수학적으로 풀어보는 작업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일 따름이었다. 쉽게 말하면, 딴생각하는 것인데 의외로 효과적이었다는 것.
어쩌면 루치드도 모르는 비밀이 숨어있는데, 미처 알아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산병 치료제에 다른 효능도 있음을 ‘우연히’ 알게 되어서 사용했던 것처럼, 루치드도 우연한 발견이었지만 다행히 먹혀 들어갔던 것이리라.
어쨌든 이를 계기로, 라보네가 알게 된 사실은 두 가지였다.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방법―그것이 비록 평범한 사람들은 쓰기 힘든 방법이지만―이 있다는 사실과 루치드가 수리적인 면에서 굉장히 똑똑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점은 상단을 운영하는 운영자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런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면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라보네는 루치드에게 방을 내주고 다음날을 기약했다.
다음날 아침, 라보네는 개별 상인들을 총괄, 관리하는 대머리 상인을 불렀다. 텔리오가 단주의 직속 부하였다면, 대머리 상인-뷰익은 상단 산하의 개별 품목을 담당하는 상인들의 대표였다.
뷰익에게는 어젯밤 늦게 그를 불러 이미 상황을 설명했었다.
“텔리오가 죽었어요.”
라보네는 간단치 않은 일이었지만, 몇 가지 밝히기 힘든 사정들을 제하고 설명하느라 간략해져버린 지난 일들을 뷰익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에게 텔리오를 대신하여 가운데서 잘 조율해 주기를 부탁했다. 또한 텔리오의 시신도 챙겨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하여 아침, 뷰익은 몇몇 사람들과 함께 텔리오의 시신을 챙기러 떠났다. 간밤에 떠나려 했지만, 순찰대원들이 야간 통행을 통제하는 바람에 가지 못했었다.
“루치드, 우린 성주에게 갈 거야.”
“아까 뷰익이란 분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도 가야 돼. 가서 잘 이야기해야지.”
텔리오도 죽은 마당에 녹스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되도록 빨리 일을 마친 후, 공국 수도로 돌아가야 했다.
“너랑 나만 가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경계심이 적어서 만나줄 지도 몰라.”
루치드는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웠다. 제윅의 말처럼, 이 세상이 가장 하찮게 보는 이가 바로 자기와 같은 어린 아이고 그 다음이 여자라면, 가장 하찮은 두 사람이 성주에게 갔을 때 그가 받아줄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을까?
그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라보네는 상단 패를 보여주었다.
“이 패를 무시하지 못할 거야. 이 패는 내가 귀족임을 알려주는 것이니까.”
가장 아래의 계층에서 가장 위에서 두 번째 계층으로 뛰어오르게 만든 것은 고작 저 조그만 나무패였다. 루치드는 정말 이 세상은 불공평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내성 입구에서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내성 입구는 간단하게 통과하고, 성에 들어서니 서기관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라보네 일행을 맞이했다. 라보네와 루치드는 접견실로 안내되었고, 나머지 시종들은 내성 바깥에서 대기하도록 구분되었다.
루치드는 처음으로 화려하기 짝이 없는 귀족의 접견실을 구경하느라 안테나인형처럼 바빴다. 체통을 지키라고 한 마디 하려던 라보네는 입까지 나온 그 말을 도로 삼켰다.
“화려하긴 한데, 통일성은 부족하네요.”
뭔가 정리 정돈되어 있지 못하고, 뒤죽박죽이랄까? 마치 명수의 책상 서랍을 보는 기분이었다. 액자, 도자기, 가구, 융단까지 모든 게 하나씩 보면 화려하지만, 구도, 배치, 배색 등의 면에서는 난잡하다는 인상이 들었다.
반면, 라보네가 보기에 화려함으로는 여느 귀족 자택의 응접실 이상으로 잘 꾸며진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성주가 지난 4년간 아카넬을 꾸준히 모으고, 이를 이용해 축재(蓄財)를 했다면 이 정도는 가뿐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상업적으로 이용했느냐를 따지는 것은 아직 이른 문제지만.
한참을 구경하던 중, 성주가 나타났다. 라보네가 일어나 인사를 했다. 귀족의 여식이 면사를 쓰는 것은 결례가 되지 않았기에 면사를 벗진 않았다.
“반갑소, 난 녹스 성을 관리하는 빈첸티 자작이라오.”
“까타라 가문의 라보네라고 합니다.”
“까타라 가문은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 중 하나지.”
하긴 신의 저주를 받은 가문이니.
“아버님은 잘 계시오? 일전에 수도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이번 녹스 행을 나서기 전 아버님으로부터 평안히 잘 계신지 여쭤보라는 명을 받았었습니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에 화답하는 자작의 모습은 겉보기에는 호인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지난 몇 년간 경비대장을 통해 아카넬이라는 보물을 편취(騙取)했다는 사실을 안 이상, 결코 만만히 볼 수는 없었다.
“어제는 일이 있어, 보지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혹시 어제 일을 듣지 못한 걸까? 라보네가 속으로 궁리를 하며 대답했다.
“예. 저희도 이곳에 오자마자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불행히도 그런 사정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어 아쉬워하던 차였습니다.”
“그래요, 고맙소. 허면, 언제 돌아갈 예정이오?”
라보네는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살짝 적신 후, 대답을 했다.
“되도록이면 빨리 일을 볼 예정입니다. 아무래도··· 겨울이다 보니 오랜 시간을 외부에 나와 있는 것에 대해 저희 상인들이 많이 꺼리더군요.”
“그렇지. 아무리 상인들이라도 다리는 가볍게 하고 싶은 법이지.”
짐을 내려놓고 쉰다는 의미에서,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의미였다.
이후 몇 가지 사사로운 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성주는 라보네의 뒤에 선 루치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시종이라 생각해서 말을 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어제 일을 들은 탓에 그 정체를 알고 일부러 언급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라보네는 되도록 성주와의 이야기 속에서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싶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 미치광이 마법사는 그리도 잘하던 것을, 자신은 왜 이렇게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괜히 자책만 했다.
“그럼, 벨로. 부디 상단행을 잘 마무리하고 돌아가시기를 빌겠소.”
대화를 마무리 하려는 성주의 태도에 조급해지기 시작한 라보네는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에 우선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성주님, 그런데 간곡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뭔데요?”
“저기···.”
그 때, 루치드가 라보네의 어깨를 짚었다. 라보네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성주 역시도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루치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 거네요.”
루치드가 말을 했다.
“뭐가?”
라보네가 앞뒤 다 잘라먹고 꺼낸 루치드의 말에 의문을 표시했다. 그러나 루치드의 시선은 성주에게 향하고 있었다.
“저도 역시 아가씨처럼―‘누나’ 대신 ‘아가씨’로 부르라는 교육을 받았다―궁금해서요. 과연 알고 계신 것인지, 아닌지.”
루치드는 라보네가 계속 이야기를 끌면서, 대화를 이어나가는 모습에서 그녀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도 라보네처럼 성주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성주는 오직 라보네에게만 시선을 주었고, 그의 말에서 어제의 일을 알고 있다는 낌새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아가씨와 성주님께서 나누시는 대화가 아무리 소소한 대화라 해도요,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에 대해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아요?”
미치광이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루치드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마치 보육원장과 대화하듯, 교장 선생님과 대화하듯 그런 느낌으로 이 대화를 바라보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제윅이 말한 바와 같이, ‘감히’ 어린 꼬마아이가 귀족의 대화 장소에 자리를 함께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시종이더라도, 한 번쯤은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그런 면에서 성주는 자연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아가씨의 말을 끊었음에도 동요를 보이지 않는 저 눈. 저것이 가장 큰 증거였다.
연신 미소를 짓던 성주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루치드가 물었다.
“성주님. 아카넬, 가지고 계시죠?”
라보네가 고개를 돌려 성주를 바라보았다. 성주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성주님이라면 아카넬의 효능에 대해 아시리라 믿어요.”
라보네가 용기 내어 물었다. 성주가 시선을 라보네에게 맞췄다.
“아시겠지만, 제 동생이 지금 자리에 드러누웠습니다. 만일 성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저희 가문은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
“물론 그저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제 값을 치루겠습니다. 얼마를 부르시든 지요. 아시잖습니까? 저희 가문, 결코 약소한 부(富)를 누리는 가분이 아닙니다.”
라보네의 말은 누가 들어도 절절하다고 느낄 만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성주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었다. 권력과 부를 가진 자로서 결코 까타라에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왜, 이 변방에서 성주 노릇을 하는지 아시오? 벨로?”
성주, 빈첸티 자작의 말은 하나의 힌트였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서야, 루치드는 뒤늦게 시야가 좁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라보네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성주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루치드와 라보네는 알 수 있었다. 성주의 뒤에는 또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작이란 계급, 그리고 접견실을 화려하게 만들 정도의 부. 게다가 아카넬까지. 이 정도 조건이라면 어떤 귀족도, 녹스 성의 성주로 만족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아카넬이라는 전설적인 보물의 실제 효능이 소문만큼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성주라면 더더욱 아카넬에 목 맬 필요도 없다. 아니, 실제 효능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아카넬만 채집하면 자위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 곳에 남을 이유가 없다.
즉, 얼굴을 굳히고 번들거리는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자작이 생각만 있다면 얼마든지 중앙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중앙으로 가지 않고, 이 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아카넬을 몇 해에 걸쳐 모으기만 한다?
“누군가 뒤에 있다면···.”
라보네가 중얼거렸다. 성주의 뒤에 아카넬의 채집을 알고, 이를 명령하는 사람이 있다는 가정이라면 빈첸티 자작이 이 성에 남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에 생각이 미치자, 그에 파생된 또 다른 결론이 나왔다.
“성주님은 아카넬을 저희에게 줄 수 없으시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