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24화 (124/956)

오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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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한 거냐고!”

제윅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마치 역병환자라도 보듯이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제윅은 병에 걸린 사람처럼 비틀댔다.

“어떻게 하다니요. 전 아저씨에게 통찰을 알려드린 거예요. 아저씨가 바라본 세계의 진실을.”

“말도 안 돼!”

“말이 되니까 아저씨도 귀를 기울이셨던 거예요. 말이 되니까, 이해가 되니까, 수긍이 되니까 아저씨의 마법이 그렇게 된 거예요.”

루치드는 한 발 더 다가갔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제윅이 무서울 리 없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저씨, 눈을 뜨세요.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세요. 그리고 그 안의 진실을 보세요. 아저씨의 마법은 그저 미완성일 뿐이에요. 전 그걸 도운 것일 뿐이에요.”

물론 그 마법이 완성이 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아직 루치드도 알지 못했다.

“어린 사람은 마법사가 되지 못한다? 사실 진실은 거기에 있어요. 통찰력이 부족한 사람은 마법사가 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제 눈에 아저씨는 한없이 통찰력이 부족한 사람이에요. 겨우 제가 보여준 지식의 단편에 포르마가 희미해진 것을 보면 말이죠.”

“넌, 악마로구나! 사람을 현혹하는 진짜 악마였어!”

루치드는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받는 상황에서도 즐거웠다. 마치 자신이 과외 선생님이 된 기분이었다.

“아저씨. 하나 더 알려드릴까요? 이제 모든 걸 의심해야 돼요. 모든 걸 의심하고 의심해서 타당성을 얻을 때까지 의심해야 돼요. 그러지 못하면, 더 이상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거예요. 아저씨의 얄팍한 통찰력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건 앞으로 무리일 겁니다.”

제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때였다. 라보네가 텔리오의 허리춤에 달린 칼을 뽑아들고 달려든 것은.

****

텔리오의 가슴에 구멍이 생긴 이후로 라보네는 거의 반쯤 정신을 잃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온통 복수하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수로?

그런데 제윅은 자신을, 그리고 옆에 앉은 꼬마를 죽이려고 했다. 죽일 생각을 가지고 쥐를 가지고 놀 듯이 두 사람 앞에서 히죽대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반전되었다. 꼬마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고, 미치광이는 당황했다. 꼬마가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을 했고 미치광이가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미치광이는 꼬마를 해치지 않았다. 오히려 뒤로 물러서며 겁을 먹고 있었다.

마침 텔리오의 허리춤에 달린 단검이 눈에 들어왔다.

‘이때다.’

라보네는 칼을 빼어들고 제윅에게 달려들었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달려든 라보네의 얼굴은 그럼에도 아름다웠다.

“죽어!”

제윅은 고개를 돌려 라보네를 보았다. 그 순간 모든 동작이 정지됐다. 루치드 역시 낌새를 눈치 채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역시 순간이지만 움직임이 멈췄다. 뒤늦게 라보네를 제지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라보네의 단검은 제윅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윽!”

제윅은 너무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며 라보네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라보네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더욱 힘을 줘서 단검을 밀어붙였다. 작은 가드에 손가락이 밀려 짓눌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만하세요!”

루치드가 라보네를 껴안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제윅을 바라보았다.

제윅은 가슴에 박힌 단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뽑아내려고 애를 썼다. 이를 너무 다문 나머지 잇몸이 짓뭉개지며 피가 새어나왔다. 핏발이 선 눈으로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제윅···.”

제윅은 단검을 가슴에서 뽑아냈다. 피가 분수처럼 터지며 루치드의 얼굴을 적셨다.

―쿵

제윅은 모로 쓰러졌다.

“제윅!”

루치드가 그의 가슴을 눌렀다. 하지만 작은 손가락 사이로 피가 뭉클 솟아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꼬마···.”

제윅은 핏발 선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루치드는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이런 상황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닌데. 누군가가 죽는 것을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닌데.

“내가, 말했지. 힘이 없으면··· 죽는다고.”

제윅이 슬쩍 시선을 옮겨 여전히 바닥에 쓰러진 채, 상체만 겨우 들어 올린 라보네를 바라보았다.

“너도 마찬가지야. 힘이 없으면 ··· 죽는 거야.”

제윅은 자신의 말이 맞지 않냐는 듯, 입 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부릅뜬 눈에 빛이 사라졌다.

루치드는 멍한 눈으로 라보네를 쳐다봤다. 그녀는 제윅을 날선 눈으로 바라보며 외쳤다.

“자업자득이야! 네가 텔리오를 죽였어! 그러니까 너도 죽는 거야!”

라보네는 루치드를 보며 외쳤다.

“복수야, 이건. 정당한 복수라고!”

몸을 일으킨 라보네는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웠다.

“마법사 놈들, 모두 죽여야 돼.”

단검을 루치드를 향해 겨눴다. 검날의 날카로운 끝에 루치드의 시선이 머물렀다.

“너도 마찬가지야. 저 녀석이 말한 것처럼, 너도 악마야. 악마라고!”

라보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텔리오의 죽음, 아카넬의 진실,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다가 결국 자신의 손으로 저지른 첫 살인.

“진정하세요.”

루치드가 시선을 내리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진정? 어떻게 진정하라는 거지? 진정하면 내 동생이 살아나? 텔리오가 살아나?”

어떻게 일이 이렇게 꼬이나. 루치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해거름이 시작되었는지 주위가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상상이나 했을까. 거실에만 세 사람의 시체―순찰대원 한 명의 시체, 텔리오, 그리고 제윅―가 너부러져 있고, 한 여자와 한 아이만이 그 소란에서 살아남았는데, 아직도 위기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서로 죽고 죽일 때까지 싸워야 하는 건가요?”

“뭐?”

“아까 제윅이 그랬잖아요. 자신이 우리를 죽이려고 했던 이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잡아먹는다고. 당신은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저 자의 말을 진실로 만든다? 라보네는 무슨 속셈이냐고 반문했다. 루치드 역시 지금의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머릿속을 정리한 루치드는 침착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법의 비밀을 알려드려요?”

“뭐?”

“마법은 말이에요. 진실로 믿는 힘에 있어요.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순간, 마법이 되요.”

“무슨 소리야?”

루치드는 고개를 들었다. 사실 루치드가 한 말은 라보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의외로 라보네는 루치드의 말을 들으며 흥분과 떨림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자기가 믿는 진실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마법사가 된다는 것이에요.”

물론,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몇 가지 절차가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정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 그 자체에 대한 문제.

“믿음이 흔들리면 마법은 일어나지 않아요.”

하지만 라보네가 이 사실을 알더라도 제대로 써먹을 수 없을 것이다. 마법사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온 믿음을 일순간에 무너뜨리는 것이 쉬울 리 없다. 루치드와 같은 외계의 지식이 없다면.

“이제는 알겠어요. 굳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모두 마법을 쓸 수 있어요. 단지 요령을 익힌 마법사들만이 기술적으로 현란하게 마법을 사용할 뿐인 거였죠. 진실로 믿고 바란다면 누구나 마법을 쓸 수 있었던 거예요. 이곳에서는.”

이곳, 지성을 흉내 낸 야만과 교양을 가장한 잔인함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마법은 기적이 아니라 속임수였다.

루치드가 마법에 관한 새로운 이해의 단계에 접어들 때, 라보네는 이 악마가 무슨 소리로 자신을 현혹하는 것인가를 고민했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법을 쓸 수 있다고?’

설마, 이 소악마가 나를 마법사로 만들려는 것인가? 그리고 대륙의 공적이 되어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게끔 하려는 것인가? 라보네가 손에 든 칼을 치켜 올리려다 멈칫했다.

‘아니지. 그래도 마법사가 되는 게 좋은 걸까? 마법사가 되도록 해달라고 졸라야 하나?’

그렇게 라보네가 내적 갈등을 일으키는 사이, 그녀의 정신적 혼란이 점점 정리되어 갔다.

루치드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지금껏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마법의 메커니즘을 한 꺼풀 벗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련한 감정 반, 아쉬운 감정 반이었다.

****

포우는 녹스의 북문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시간, 녹스에서 외부로 나갈 수 있도록 개방된 유일한 문이 북문이었다. 그리고 나간 사람은 모두 경비대원이었다.

포우는 그들을 말릴 수 없었다.

“대장, 정말 안 되오? 가르쳐줄 수 없단 말이오? 우리 아들이 오늘내일하는데, 정말 그렇게 알려줄 수 없단 말이오?”

포우보다 나이가 많은 경비대원 한 명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하소연하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포우를 붙잡고 눈물로 하소연했다. 그러나 난감한 것은 오히려 포우였다.

차라리 칼이나 창을 들고 협박을 했다면, 더욱 마음을 굳게 닫아 걸었을 것인데. 포우는 눈을 감고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대장, 대장!”

“우리 어머니를!”

“우리 딸!”

가족을 위해 사정을 하는 이들을 외면하기엔, 너무나 깊은 상처를 지닌 경비대장이었다. 마치 6년 전, 그 날처럼.

마침내 포우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북쪽 평야를 향해. 하지만 포우는 그들을 막지 않았다.

“대장···.”

타난이 다가왔다. 포우는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가라.”

타난은 머뭇거리다 결국 고개를 숙여보이곤 몸을 돌렸다. 그 역시 가족을 지키려 애쓰는 한낱 가장일 뿐이었다.

“센베크.”

“예.”

“넌 괜찮나?”

“어, 사실 욕심은 나는데,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요. 전 저 사람들과 싸우기 싫습니다.”

센베크는 욱하는 성격만 빼면 세상 둘도 없는 호인(好人)이다. 월급 받으면 곧장 자기 밑의 사람들을 데리고 주점으로 데리고 간다.자기 돈으로 술을 먹이고 음식을 먹인 뒤에 집에 보낸다. 심지어는 자식이 있는 부하들에겐 대신 주라며 용돈까지 쥐어준다. 오죽하면 타난마저 헤프다고 타박할까.

“그럼 날 따라와라. 마법사 놈, 이대로 보낼 수 없다.”

“예. 대장.”

센베크는 그나마 몇 남지 않은 세 사람의 경비대원을 데리고 마법사에게 갔다.

마법사가 있던 집이 가까워 올수록 걸음이 무거워졌다.

“대장, 우리끼리 가능한 겁니까?”

“센베크. 우리는 녹스의 경비대다. 우리가 포기하면 이 살인자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 아무리 아카넬이 있어도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게 둘 순 없다.”

결국 포우는 자신의 동료, 부하들을 위해 마법사와 싸우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의지를 다지자, 센베크와 다른 경비대원들도 창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집 앞에 섰다.

이미 주위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횃불도 제대로 챙겨오지 못한 탓에 어두컴컴하기만 한 집의 입구가 마치 자기들을 삼켜 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윅!”

포우가 먼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뒤를 다른 경비대원들이 달려 들어왔다.

그러나 거실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늦은 건가?’

포우가 자책할 때, 주위를 둘러보던 센베크가 포우를 불렀다. 포우의 발밑에는 차가운 시체가 된 제윅이 누워있었다.

****

라보네와 루치드는 라보네의 상단이 있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라보네는 오자마자 얼굴을 면사로 가렸다.

“넌 어떻게 할 거야?”

“글쎄요. 지금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애초의 목적이 마법사를 찾아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거였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다른 마법사를 찾는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어 보였다.

“그럼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라보네의 제안에 루치드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위험한 거 아닌가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음을 아는 라보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니가 마법사···라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을게.”

“전 마법사가 아니에요.”

자조적인 대답에 라보네 역시 피식 웃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가 있을까?

“대신 아까 하던 이야기, 계속 듣고 싶은데?”

****

제윅의 집에서 나오기 전, 라보네는 루치드에게 물었다. 마법사가 될 수 있냐고. 루치드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마법사는 될 수 없다고. 하지만 마법사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그게 뭔데?”

루치드는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의심하는 법이요.”

“그게 왜 중요해?”

“······.”

루치드는 라보네를 바라보았다. 신의 저주라고 했던가? 아니 신의 은총인가?

라보네는 루치드가 마력에 빠져버렸다고 생각해서 얼굴을 돌렸다.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돼요.”

라보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 이제 괜찮은 거 같아요. 누나 얼굴을 봐도.”

라보네가 놀란 눈으로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루치드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검지를 들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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