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23화 (123/956)

오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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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보네와 달리 다른 의미로 루치드는 힘을 잃었다. ‘신’에 대해서는 아직 감도 안 잡혔다. 너무 거대한 비밀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이 배운 마법이란 영역의 비밀스러움에 기가 눌린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혜린이를 마법으로 살릴 수 없다는 사실에 허망함 마저 느낀 루치드였다.

“만약에, 억지로라도 인간을, 아니 신을 ‘원형’으로 인식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그냥 죽는 건가요?”

“죽는다? 글쎄? 그런 미친 짓을 벌일 생각을 한 사람이 없어서 모르겠네? 그냥 죽을지, 고통 속에 미쳐 죽을지, 행복하게 죽을지 모르겠네?”

루치드가 좌절감에 빠지려는 때, 제윅이 말했다.

“누구한테 마법을 배웠는지 모르지만, 안타깝구나. 이런 기본적인 공부도 되지 않은 녀석이라니. 그리고 아가씨.”

제윅의 부름에 라보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지금 머리가 혼란스러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망설이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아카넬의 효능에 대해 의심이 없었건만, 제윅이라는 마법사는 그 소문이 ‘과장’이라고 했다. 제윅의 말이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희망이 한풀 꺾인 것도 사실이었다.

“죄송해요. 벨로. 이 미친 꼬마 놈만 아니었으면 아가씨도 저 무리들과 함께 아카넬을 얻으러 가실 수 있으셨을 텐데.”

“네?”

라보네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되물었다. 그 때, 루치드가 소리쳤다.

“말도 안돼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러시는 거죠?”

“말이 안 되긴. 아까도 말했잖아.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듣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그건 궤변이에요. 만약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전제가 옳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죽음일 수는 없어요.”

라보네는 그제야 두 사람의 대화가 자신에 대한 것임을 알았다.

“게다가 전제부터 이해할 수 없어요. 왜 다른 사람들이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안 된다는 거죠? 마법사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저씨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렇게 분석적인 면을 보면 마법사 같기도 한데, 마법사란 존재에 대해 모른단 말이지.”

고개를 젓는 제윅의 태도를 보며, 루치드는 또 무슨 엉뚱한 말로 사람을 흔들어 놓으려는 것인가, 싶어서 경계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법사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에는 한계가 있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사람의 한계를 벗어난 것일 테니. 그래서 대부분의 마법사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몇 가지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다야. 그것만을 평생 연구해도 한계가 있을 정도라서 말이야. 그래서 전지전능의 마법사라고 해도 약점이 존재한다.”

루치드는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봐라. 이 세상에서 마법사가 차지하는 위치를. 마법사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강하다. 때문에 어떠한 권력과 힘에도 굴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러다보니 마법사를 위험한 존재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누구일까?”

“왕?”

“왕을 비롯하여 소위 권력자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한다. 그런데 마법사는 그들의 자리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지. 당연히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러니 틈만 보이면 잡아서 없애려고 하지. 그런데 만약 그런 마법사의 약점을 안다면? 과연 그들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까? 요컨대, 마법사에 관한 정보는 모두 마법사 본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다. 그러니 그런 이야기가 퍼지지 않게 해야 함이지.”

“굳이 서로 다툴 필요가 있나요? 서로 협조하거나 협력할 수도 있는 문제 아닌가요?”

제윅이 혀를 차며 라보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루치드를 향한 말이었다.

“자, 이 여자는 이제 니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이제 이 여자는 아카넬을 구하든 구하지 않든 자기 집으로 돌아가겠지. 내가 이 여자를 살려둔다면 말이야.”

“······.”

“자, 이 여자가 집에 가서 이야기를 하는 거야. 어린 마법사를 봤어요. 그 마법사는 아직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대요. 그러면 이 여자의 아버지, 귀족으로 추정되는 그 사람은 그렇구나, 하고 그냥 넘어갈까? 어때요, 벨로? 그냥 넘어갈까요, 그대의 아버지는?”

라보네는 답하지 않았다.

“마법사를 잡아와라. 그리고 물어보아라. 어떻게 마법을 사용하는 것인지. 말할 때까지 고문해라. 손가락, 발가락 하나씩 잘라가면서 고문하라. 그러고도 말하지 않으면 발목과 손목을 하나씩 자르고 그 다음은 팔, 다리를 잘라라. 만약 마법사가 솔직하게 말을 한다면 목을 잘라라. 말을 하지 않아도 잘라라. 위험한 존재는 더 크기 전에 없애버려야 한다.”

귀족에게 빙의라도 된 듯, 굵직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과장된 어투로 연기를 하는 제윅의 말에 루치드는 얼굴을 굳혔다. 라보네의 표정을 보아도 그 말이 전혀 없는 가능성이 없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어느 시대에나 그랬어.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잡아먹고, 더 강한 자에겐 칼을 숨기고 다가간다. 오로지 홀로 남을 때까지 싸우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다. 협력? 그야말로 니가 어리고 모자르다는 증거다. 알겠냐?”

제윅이 주먹을 아래로 내리쳤고 죽은 텔리오의 가슴에 구멍이 생겼다. 곁에 앉아있던 루치드와 라보네의 얼굴에 피와 살점이 튀었다. 라보네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텔리오···.”

“벨로. 저도 이제 가야할 것 같아요. 밖을 보니 이미 경비대원들은 북문으로 달려갔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바깥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벨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습니다.”

“제윅, 잠시 만요.”

루치드가 제윅을 제지했다.

“이건 옳지 않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단지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에요.”

“꼬마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네가 아니란다. 너의 말 따위는 일 푼의 가치도 없단다.”

나긋나긋한 말본새와 달리 눈빛은 잔혹한 동물의 그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루치드는 이 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라보네의 목숨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저씨는 지금, 성주에게 가실 거죠?”

“흠?”

처음으로 제윅은 놀란 얼굴을 했다. 라보네 역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얼굴을 했다.

“경비대원들에게 선물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정황만 살피면 녹스 성 내의 무장병력을 북문으로 옮기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녹스성 내의 경비가 허술해지겠죠. 게다가 경비대장을 궁지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그분은 다른 걸 신경 쓰시기 힘드실 거예요. 즉 지금 녹스성에는 구멍이 생긴 겁니다.”

제윅은 이를 보이며 웃었고, 눈 안의 소용돌이가 더욱 거세진 느낌이었다.

“아저씬 아카넬에 관한 정보들을 모두 수집하신 것 같지만, 지금 찾으러 가지 않았죠. 왜? 갈 필요가 없어서일 거예요. 하지만 아카넬을 가지고 싶어 하시죠. 그럼 답은 하나예요.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아카넬을 빼앗겠죠. 힘이 있으니까.”

“잘 추리했구나. 영리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제법이었다.”

“그리고, 아저씬 저 누나 뿐만 아니라 저도 죽이시려고 하시는 거죠.”

“왜 그렇게 생각했어?”

“약하니까요.”

루치드는 약하다. 마법사이지만 약하다. 그리고 약한 사람에 대한 제윅의 태도는 일관되었다. 게다가 명분도 있었다.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길 원치 않는다. 싹을 제거한다. 이런 이야기들에서 하나의 결론을 내리는 것은 루치드에게도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 꽤 머리를 굴렸구나. 반쪽짜리 마법사도 마법사구나. 그렇게 계속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는 자세가 마법사의 본 모습이지. 앞으로도 그런 자세로 살아갔다면 분명 나를 뛰어넘는 마법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그렇게 두지 않겠다, 는 뒷말은 생략되었지만 모를 수 없었다. 루치드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하지?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나요?”

“마법사의 호기심이란 끝이 없구나. 나 오늘 완전히 스승 노릇 제대로 하는군.”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로 턱을 끄덕이는 제윅이었다.

“아저씨의 마법, 어렸을 때의 경험에서 비롯된 건가요?”

“밑천을 드러내란 소리네. 그래, 맞다. 본래 마법사는 익숙한 것에 능통한 법이지. 난 어린 시절을 항상 바람과 함께 했었고, 때문에 바람에 대한 포르마가 손쉽게 만들어졌던 것이지. 넌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리면 안 되나요?”

“···불가능은 아니겠지만, 불가능에 가깝지. 니가 아무리 많이 살았다고 해봐야, 나보다 오래 살았겠니?”

제윅의 말에는 라보네가 생각한 것과 유사한 의미가 있었다. 어린 마법사는 없다. 즉, 경험이 부족한 어린 아이들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사물에 대한 통찰이 아무런 경험 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건 날로 먹는 소리지. 수없이 많은 경험과 통찰은 세월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래서 네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루치드의 눈에 빛이 맺혔다. 통찰이라고?

“바람을 아나그노리시(=인식) 하는 데 어려움이 없으시죠?”

“왜?”

“바람이 뭐죠?”

“응?”

“본래 바람은 공기의 이동이예요. 기압의 차이에 따라 이동하는 공기의 흐름이죠.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는 공기의 흐름이 바람이에요. 아시죠?”

“···무슨 소리냐?”

제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기가 열을 받아서 따뜻해지면, 공기는 가벼워져요. 가벼워진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그 때문에 기압이 낮아지죠.”

“아니, 그 전에 기압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

“기압은 공기가 누르는 무게에 의해 생기는 압력을 말해요.”

“공기에 무슨 무게가 있다는 말이냐?”

제윅은 당황스러웠다. 뭔가 현학적인, 자신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지식이 아이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데 흘려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저씨는 바람을 사용하시니 아실 것 같은데요? 공기의 무게가 없다면, 어떻게 바람에 의해 사람의 몸이 밀려날 수 있겠어요?”

제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기에 무게라는 개념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

제윅은 입을 꾹 다물고 아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루치드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결코 눌리지 않는 기세를 보였다.

“아저씨가 살았던 곳은 바람의 방향이 제멋대로라고 하셨죠? 사실은 계절이 변할 때마다 방향이 바뀌었을 거예요. 계절에 따라 대륙의 온도가 변해서 그럴 거예요.”

제윅은 손바닥을 펼치고 올렸다. 손바닥 위로 작은 소용돌이가 생겼다.

“넌 이게 뭐로 보이냐?”

“회오리요.”

“이게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 같냐?”

“위아래의 기압차이로 인해서 생기는 거죠.”

제윅의 손바닥 위에 있던 회오리가 흩어졌다.

“만약 아저씨가 그걸 몰랐다면, 아저씨의 통찰력이란 거 터무니없는 것이네요.”

“이 무슨!”

“공기의 수직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올라오는 공기의 흐름이 회오리라고 할 수 있어요. 혹시 아래로 회전하며 내려가는 회오리 보신 적 있으세요?”

“······.”

“한 번 ‘재현’해 보세요.”

“아래와 위의 공기층의 온도차가 극명하게 나뉘면서 생기는 기압의 차이로 발생하는 게 회오리에요. 두 층의 공기가 교환되는 과정에서 공기의 이동이 회오리모양으로 빙글빙글 도는 거죠.”

루치드가 손가락을 요리조리 돌리면서 회오리를 설명했다. 제윅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어떻게?”

“현상의 본질은 모르고 겉만 보면서 통찰이라고 표현하시면 안 되죠. 그거야말로 기만이죠. 제가 보기에 아저씨는 마법사가 아니에요. 그저 속임수를 부리는 것일 뿐이에요.”

‘현상의 본질이라고?’

제윅은 루치드를 노려보았다. 이런 모욕을 참을 수 없었다. 손을 치켜 들었다.

“죽여버리겠다.”

루치드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이유. 그리고 저자가 지금부터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될 이유까지.

“아저씨나 저나 결국 반쪽짜리였어요. 세상의 진실을 통찰한다고요? 진실은 통찰하는 게 아니었어요.”

제윅의 얼굴이 붉어졌다. 꼬마의 어처구니없는 말장난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 있게 사용했던 마법이 ‘재현’되지 않는 것 때문이었다. 바람의 포르마가 흐릿해졌다.

“너,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때, 루치드가 일어났다. 루치드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진실은 지식이 아니었어요.”

루치드가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제윅 앞에 마주섰다. 비록 키가 작은 루치드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 루치드였다.

“아저씨, 아저씨는 더 이상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거예요.”

‘나처럼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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