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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122화 (122/956)

오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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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벌어진 제윅과 경비대원간의 첫 번째 충돌은 제윅의 승리로 돌아갔다. 제윅은 바람을 이용하여 경비대원들의 총공세를 일순간에 무너뜨렸고, 센베크와 타난, 포우의 합동 공격 역시도 적절한 마법으로 공격을 무용(無用)되게 만들었다.

센베크의 공격은 창날이 부서지고 뒤이어 날아든 바람에 뒤로 밀려났다. 타난은 구덩이에 빠지면서 전장 이탈. 틈을 노리고 달려든 포우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뒤, 되레 빈틈이 생긴 포우에게 제윅의 마법이 시전 되었다.

“윽!”

포우는 허겁지겁 뒤로 물러섰지만, 옆구리에 긴 자상을 입었다. 움직임이 조금만 더 느렸다면 허리가 완전히 두 동강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굳을 정도였다.

그 직후, 몸을 추스른 경비대원들이나 포우를 비롯한 센베크와 타난 등은 함부로 공격에 나서지 못했다. 포우는 너무 섣불리 행동했다는 자책과 함께 어떻게 제압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전투의 초기단계에서는 누구든 공포심을 느낀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공포라는 정서적 반응이 삶에 대한 적극성으로 바뀌기도 하고, 전투에 임한 병사들의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된다.

공포심이 극에 달하는 순간은 전투가 벌어지기 바로 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막연한 두려움과 불확실한 결과를 그리며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또 적을 앞둔 병사들의 공포심은 피로를 수반한다. 즉 적과의 대치상황이 길어질수록 병사들의 피로도가 올라가기 때문에 지휘자는 적절한 순간, 다시 말해서 병사들의 공포심이 적당히 올라갔을 때, 동시에 피로도가 많이 쌓이기 전의 순간을 포착하여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 공격의 시작 타이밍을 아는 것이 지휘자의 역량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공격이 실패했을 때, 병사들의 피로도는 보다 빠르게 오를 뿐만 아니라, 공포심은 불안과 절망으로 변질된다. 불명확하게 보였던 결과와 두려움은 명확해지고, 좌절감이 커진다. 이를 추스르고 다시 반격을 시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지휘자의 역량일 것이다.

“······.”

하지만 포우는 반격을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애초에 상대가 마법사라는 점에서 병사들의 사기는 반쯤 꺾인 상태였다. 다행히 센베크의 함성이 병사들의 기를 북돋아 주는 역할을 한 것 같지만, 이제는 어렵다. 무의미한 희생만 늘릴 가능성이 높았다.

센베크의 창대는 여전히 상대를 향하지만, 무뎌진 것은 사실이다. 타난 역시도 구덩이에 빠지면서 발이라도 접질렸던 것인지 자세가 불안했다.

무엇보다 상대가 너무 가볍게 공격을 받아 넘겼다는 사실이었다. 너무 강한 상대였다.

“왜? 더 안 하세요? 안 하실 거면 제가 계속 말을 해도 되나요?”

여전히 여유만만인 제윅이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줄 선물인데, 대장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드릴 선물을 독차지하고 싶으셨나 봐요.”

웃음을 흘리며 말을 잇는 마법사는 주위의 회오리를 가라앉혔다. 순식간에 바람이 가라앉으며 실내에 떠돌던 먼지들과 작은 부스러기들도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결론을 말씀드릴 차례였죠?”

포우는 눈을 번뜩이면서도 감히 발을 떼지 못했다. 발끝에 과도한 힘이 몰려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카넬은 말이죠. 성주님이 모두 가져가셨어요.”

회오리 때문에 웅크리고 있던 라보네가 벌떡 일어났다.

“정말인가요?”

“예. 사실입니다. 벨로. 그리고 성주님께 그 아카넬을 모두 따다 드린 분이 저기 계신 포우님이시죠.”

모두의 시선이 포우에게 몰렸다. 심지어는 타난과 센베크 마저도 눈을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아카넬은 특정한 계절,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저도 정확히는 몰랐어요. 그런데 경비 순찰 일지를 보다보니 재미있는 게 나오더군요. 4년 전부터 매해 겨울 초입, 특정한 날짜에 북문을 빠져나가시는 분이 계시더란 거죠. 평소에는 안 나가시는데 딱 그 날짜에만 나가세요. 그분이. 일 년 중 해당 날짜에만 동일한 행동을 반복한다면 의심해볼만 하지 않겠어요?”

그분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될 내용이었다.

“또 하나. 아까 녹스성에 아카넬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었죠? 그런데 일반 사람들이 모른다고 해도, 녹스성의 성주까지 모른다?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녹스성의 성주는 정기적으로 공국과 연락을 취하면서 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는 분이시죠. 녹스 성의 그 누구보다 외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시는 분인데, 그런 분이 아카넬에 대한 소문을 모른다? 개가 웃을 일이네요.”

포우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당장 달려가서 저 입으로 칼날을 쑤셔 넣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자, 그래서 제 결론이 그런 겁니다. 경비대장 포우가 녹스(Nox)성주의 지시를 받아 아카넬을 찾던 중, 4년 전부터 아카넬을 포집하기 시작했고, 매년마다 아카넬을 가져다가 성주에게 바쳤다.”

라보네는 손을 떨며 말했다.

“왜?”

“왜라뇨? 아카넬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소문이 난 열매예요. 그 귀하디귀한 것을 여기 계신 분들과 나눌 수는 없지 않겠어요?”

라보네는 바닥에 누운 텔리오를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텔리오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창백한 시체가 된 텔리오 곁에 루치드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 진짜 선물! 아카넬은 매년 채집이 가능하다는 거, 짐작하시죠? 겨울초입이라고 했습니다. 특정한 날짜라고 말씀드렸죠. 그게 언제일까요?”

장난스럽게 입방정을 떠는 제윅에게 시선을 돌리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이의 시선은 일제히 포우에게 향했다. 포우는 부들부들 떨며 제윅의 웃음을 노려보았다.

“전 시간도 몰라요. 장소도 몰라요. 하지만 날짜가 오늘이라는 것만은 알죠. 바깥을 보니 이제 겨우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것 같네요. 자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지 몰라요. 하지만 오늘이라면 아카넬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 게다가 지금까지 경비대장님께서 친히 외부순찰을 나가신 시간은 저녁시간대라는 거.”

제윅의 말이 끝난 뒤, 거실에는 묘한 침묵만이 자리했다.

“언제예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절실한 것은 역시 라보네였다. 자기 동생을 살려야 했고, 텔리오를 살려야 했다.

“언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예요? 말씀해 주세요! 제발!”

포우의 입술이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자신이 입을 열게 되면, 성주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근위병들이 찾아와 쑥대밭이 될 것이다. 그의 가족, 친척들이 모두 그 날로 생을 다하게 될 것이다.

“제윅, 궁금한 게 있어요.”

루치드가 입을 열었다.

****

애초에 루치드는 아카넬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다. 아니 관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신기한 열매가 있다는 사실에 관심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현재의 루치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마법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마법을 쓰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가능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에 마법사를 만나면 꼭 마법에 대한 지식을 얻어서 도움을 얻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이런 미치광이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뭐가 궁금하지?”

제윅이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되물었다.

“마법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나요?”

제윅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뒤로 천천히 돌렸다.

“뭐라고?”

“마법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냐고요.”

“······.”

제윅은 대답 없이 루치드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제윅이 터뜨린 광소(狂笑)에 모두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제윅의 웃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푸하하, 이런 미친! 크크크.”

제윅은 억지로 웃음을 참아내려 애쓰면서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너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아니면 마법을 도대체 어떻게 배운 것이야?”

“···무슨 소리죠?”

“이야. 이거 참.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이런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이 들어서 좋을 게 없단 말이야.”

제윅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당장 북쪽평야로 가지 않으면 아카넬을 얻을 기회는 없어질 겁니다.”

모두의 얼굴이 변했다. 일부의 얼굴에선 분노가, 일부의 얼굴에서 탐욕이, 일부의 얼굴에서 의심이.

“포우. 왜 이야기를 안 해요? 좋은 건 같이 나눠야죠?”

제윅이 슬쩍 떠보지만 포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장!”

그런데 한 경비대원이 소리쳤다.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요? 병도 고칠 수 있다는 겁니까? 아시잖아요? 저희 어머니가 몇 해 전부터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계시다는 걸!”

그게 시작이었다.

“제 딸, 레미가 지금 병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제발 대장! 알려주세요.”

“대장. 저도 저희 아들이 아파요. 저희 아들은 지금 몇 해 째, 집 밖으로 나가질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사연 없는 사람 없다. 명분이 생기니 사연 많은 병사들은 용기를 얻었다. 창날이 돌아갔다.

“텐! 무슨 짓이야! 창 돌려!”

“타난! 당신 아내도 필요하잖아! 당신 아내도 지금 죽을병에 걸려서 오늘내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타난은 말을 잇지 못했다.

“포우는 저녁식사 시간에 나갔었는데?”

다시 제윅이 음률을 붙여 지껄이자, 사람들의 마음에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장!”

“대장님! 말씀해주세요.”

포우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균열이 생겼다. 몇몇 병사들이 포우에게 접근했다. 타난과 센베크가 소리쳤지만 다가오는 병사들은 점점 불어났다. 포우를 위시한 몇몇 사람들은 조금씩 물러나더니 집 밖으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 간의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고, 일촉즉발의 형세가 만들어졌다.

거실이 텅 빌 무렵, 루치드는 다시 물었다.

“제윅, 마법으로 사람을 살릴 수 없나요?”

루치드는 주변의 소란에 개의치 않았다. 그가 궁금한 것은 오직 하나였으니까. 제윅이 혀를 차며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래서 애들은 안 된다니깐. 분위기를 몰라, 분위기를.”

“살릴 수 없나요?”

“그래. 못해.”

“왜요?”

“하아. 이런 미친놈.”

제윅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싱긋 웃었다.

“라티오를 알아?”

“예.”

“모든 사물에는 포르마가 있다는 거 알지?”

“예.”

“인간에게도 포르마가 있을까?”

“···있지 않을까요? ‘모든’이라고 했으니까.”

“있다. 단, 인간의 포르마는 특별하다.”

특별하다?

“인간의 포르마를 인식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야.”

루치드는 ‘금기’라는 단어에 예전 핀체노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라티오’는 이 세상 모든 사물의 원형이 존재한다. 바꿔 말하면 이 세상은 ‘라티오’의 변형된 복제품이라고 할 수 있지.”

“인간도요?”

“그래. 인간도. 하지만 인간의 ‘원형’에 대해서는 설명을 미루자꾸나. 그건 마법에서 일종의 금기거든.”

핀체노는 인간의 ‘원형’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려했었다. 왜 그랬을까? 제윅이 대답했다.

“인간의 포르마는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

“이 책상의 포르마는 말 그대로 책상이지. 돌의 포르마는 그냥 돌이야. 하지만 인간의 포르마는 인간이 아니다.”

“그럼 뭔가요?”

“신(神)이다.”

루치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이라고요?”

제윅이 비웃음처럼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루치드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래. 인간의 포르마는 신이다. 그리고 인간이 신을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어떤 미친놈이 신을 포르마로 그려낼 수 있다면, 이미 그 미친놈은 신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왜냐고? 신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것은 신뿐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포르마를 아나그노리시한다? 아까 했던 말이지만 조금 수정해야겠군. 마법사는 신의 저주와 은총을 모두 이겨낼 수 있는 존재라고 했지? 실은 ‘이긴다’는 표현은 옳지 않아. 단지 버틸 수 있다는 거지.”

제윅이 검지로 루치드의 이마를 짚었다.

“그렇지만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어. 인간의 그릇에 신이라는 물을 채워 넣는다면 그릇은 그 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깨지게 된다.”

루치드는 입 안이 말라 까끌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에 관한 모든 것, 이를테면 팔이나 다리, 심지어는 손가락 하나도 신의 복제품이라고 한다. 인간 마법사로서는 감당할 수 없지. 그래서 아카넬이 주목을 받는 이유지.”

“그럼, 진짜 아카넬은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나요?”

제윅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루치드를, 그리고 옆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라보네를 바라보았다.

“과연 어떨까?”

라보네가 물었다.

“살릴 수 있다는 말이죠?”

제윅이 미소 지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나가는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에요.”

라보네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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