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21화 (121/956)

Mera Vera(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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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아까랑은 전혀 다르시네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어요. 역시 사람은 무리 지을 때 강한 법이에요. 그쵸?”

앉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제윅이었다. 포우는 눈빛만큼은 그 어떤 야수, 몬스터보다 사나웠고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눈빛만큼이나 사납게 길들여진 칼날이 제윅의 가슴을 제대로 겨냥하고 있었다.

“얌전히 항복해. 그렇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가만 두지 않으면?”

능글거리며 비아냥대는 제윅의 말에 센베크가 얼굴이 붉어졌다.

“이 놈이!”

“센베크! 가만히 있어. 상대는 마법사다.”

센베크는 몸을 들썩거리며 당장이라도 달려가려 했지만 포우는 그럴 수 없었다. 말로는 가만 두지 않겠다고 했지만, 자기들 역시도 쉽게 그를 잡을 것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 한사람이라도 상대는 마법사. 이미 감옥 안에서 보았듯이, 그의 마법은 무력적으로는 자신들 개개인을 능가하리라. 그러니 계획적으로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각개격파를 당할 수도 있었다.

“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야! 이대로 나가더라도 넌 대륙의 공적이 될 것이다.”

“흠. 이제 저랑 대화를 하자는 건가요? 방금 전까지는 죽이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구시더니?”

“저 놈이 어디 입방정을 떨고 지랄이야!”

이번에도 센베크가 분을 참지 못하는데, 타난이 그의 어깨를 짚으며 진정시켰다.

“대화를 원하시니 해드려야죠. 또 여기 저의 제자도 있고.”

“제자?”

순간 모두의 시선이 제윅의 뒤에 있는 아이에게 옮겨갔다. 루치드는 무슨 말인지 싶어 의아해하다가 시선을 느끼곤 뒤늦게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제가 왜 아저씨 제자예요?”

황급히 이야기해보지만, 어쩐지 변명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윅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너한테 가르침을 내렸으니, 넌 내 제자지. 안 그래?”

이 무슨 궤변인가, 오히려 할 말을 잃은 루치드였다.

“역시 그랬군.”

포우는 오해를 했다. 하지만 루치드는 애써 변명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말한다 해도, 귀담아 들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고, 이 세상이 자신과도 같은 아이들에게 얼마나 가혹한지를 들었기 때문이다.

“자, 그럼 대화를 계속 해볼까요? 대장님? 어, 뭐라고 그랬더라?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물으셨죠? 이런 짓이 어떤 짓인지 모호하긴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에 대해서는 밝혀드려야겠죠?”

포우가 칼날을 치켜세웠다. 옆으로 센베크와 타난이 슬며시 서서 창날을 앞세웠다. 그리고 그 뒤로도 한 사람씩 거실로 들어왔다. 거실 가운데 제윅과 라보네, 루치드가 병사들에게 둘러싸이는 형국이 되었다.

그렇지만 제윅은 딱히 그런 움직임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할 말만 할 뿐이었다.

“대장님이 워낙 너그러우시니 이렇게 다들 제 이야기를 경청하실 수 있도록 도우시네요.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죠.”

제윅은 왼 발을 반보 쯤 뒤로 물렸다. 창들이 일제히 들리며 제윅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른손을 가슴에 살짝 대고 허리를 살짝 굽히며 대장을 향해 인사를 했다. 그리고 검지를 치켜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6년 전 녹스 성은 위기에 처했었습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은 대부분 다 아실 겁니다. 그리고 그 위기는 평야에 나타난 ‘기적’ 때문에 넘길 수 있었습니다. 스크로파가 달려들던 그 곳에 갑자기 나타난 불의 벽! 사람들은 기적이라며,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했다죠? 하지만,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저한테는요? 왜냐하면 그 불의 벽은 하늘의 기적이 아닌 사람의 기적이었기 때문이죠. 사람이 기적을 일으키다. 어쩐지 감이 오시나요? 예. 그것은 마법사의 힘이었습니다.”

몇 몇 경비대원들을 제외하고는 ‘마법사’의 존재에 대해 몰랐던 터라, 당황하는 기색들이 역력했다. 센베크가 일부러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냐!”

“엉뚱하다니요? 대장님도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시는데 그러시면 안 되죠.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마법사는 그 이후 녹스에서 사라졌던 걸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법사는 그냥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가 일으킨 기적의 힘을 이 곳 녹스 평야에 남기고 갔어요.”

진심으로 포우는 병사들을 물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했다.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동요가 심한데, 저 이야기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때 통제가 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포우의 결단은 늦었고,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녹스 평야에 남긴 것, 그것은 생명의 힘이 담긴 ‘아카넬’. 붉은 마법의 씨앗이라는 열매죠. 먹으면 죽은 사람도 살릴 정도로 생명의 힘을 가득 담은 열매라지요. 그것이 녹스 평야에서 불의 힘과 몬스터의 생명을 담보로 피어났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탐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루치드는 지난 녹스 때의 일이 생각이 났다. 모든 것을 태울 듯이 타오르던 염화(炎火). 그 백광(白光)의 열기(熱氣)가 평야를 침식(侵蝕)하던 순간. 그리고 무슬라.

“마법사로서도 궁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전설 속에나 있을 줄 알았던 열매가 실존한다니. 그래서 찾으러 왔지요. 찾으러 왔는데 쉽게 안 찾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여유를 가지고 하자는 생각에 경비대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경비대에 있다 보면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의 출입현황도 확인할 수 있으니 좋고, 경비대로서 야외 순찰 활동을 할 수 있으니 또 좋고, 돈도 벌 수 있으니 또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대장님께 너무 고마운 것은, 덕분에 지난 3년간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땅을 파고들 것같이 깊게 디딘 앞발과 하늘을 향해 충천(衝天)하는 기름진 송곳니. 주먹보다 큰 눈으로 광기를 불태우며, 그을린 가죽에 남아있던 불씨를 털어내던 몸짓. 비명(悲鳴)과 기성(奇聲)이 섞인 평야에 홀로 마주한 적대자(敵對者).

루치드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렇게 모인 이유는 다름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그간의 수고를 격려함과 동시에 떠나기 전 선물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떠난다고?”

포우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럼요. 여기서 할 일은 끝났거든요.”

“설마, 아카넬을 찾은 것인가요?”

라보네가 퍼뜩 고개를 들며 물었다. 찾았다? 하지만 제윅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카넬은 찾지 못했습니다.”

“설마···다른 사람이 찾았다는 건가요?”

“아니요. 아카넬은 없었습니다.”

“뭐라고? 그럴 리가 없어요!”

포우를 비롯한 경비대들은 가만히 있는데, 오히려 뒤에 선 라보네가 벌떡 일어나서 제윅의 말을 부정했다.

“벨로, 죄송하지만 없어요. 그 이유는 눈앞의 대장도 알고 있어요. 그렇죠? 무려 4년을, 평야를 돌아다니며 아카넬을 찾아다녔던 분이시니 말이죠.”

몇몇 대원들이 헛바람을 삼키는 소리를 냈다. 제윅은 뒷짐을 지고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며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사실 그동안 녹스 성의 움직임을 줄곧 관찰해왔어요. 그리고 이상한 점을 하나씩 발견했죠. 하나. 녹스 성에는 아카넬에 대한 소문이 없다. 뜻밖이었죠. 왜냐고요? 당장 부오노 공국으로 가보세요. 어지간히 귀 닫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아카넬에 대한 소문을 듣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다만 몇몇 정보들이 제한적으로 퍼져 있을 뿐이지요. 아카넬이 나타나서 사용되었고, 기적을 일으켰다는 소문은 있는데 이게 어디서 발견된 것인지,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정보가 전해지지 않았어요. 뭐, 적당한 정보통제 정도는 이해해야죠.”

라보네는 그 말에 수긍할 수 있었다. 다만 유능한 아버지는 거기에 하나의 정보를 더 얻어냈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었고, 그 때문에 자신은 녹스로 오게 된 것이었다.

“둘째. 경비대의 외부순찰이 몇 년 전부터 잦아졌다. 이건 뭐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고.”

다시 몇 사람이 동요를 보였다. 포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셋째. 대장님이 알려주셨죠. 아카넬을 알고 있다고.”

모두의 눈이 커졌다. 녹스 성의 누구도 모른다고 했던 아카넬을 포우는 알고 있다?

“제가 여러분들이 오시기 전에 대장님과 긴밀한 대화를 나눴어요. 제가 그랬어요. 불의 마법사를 아냐고. 그랬더니 대뜸 모른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또 여쭸죠. 아카넬을 아냐고. 그랬더니 대답을 하시지 않더군요.”

제자리를 돌며 말을 잇던 제윅이 멈춰 섰다. 그리고 포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때로는 말보다 몸이 더 솔직한 법이기도 하죠. 당신은 그 순간에 몸으로 대답하셨어요. 잔뜩 긴장하며 목에 힘이 들어가셨죠. 어깨에도 과도한 힘이 집중되는 바람에 자세가 흐트러질 뻔도 하셨으니까요. 왜 긴장하셨을까요? 모른다면 그런 반응이 나올까요?”

루치드는 솔직히 감탄했다. 창날에 둘러싸인 미치광이는 전혀 위축된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경비대장을 압박했다. 게다가 경비대장의 몸의 변화까지 세밀하게 관찰해 내는 통찰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의미 없는 대화라고 생각했던 조금 전의 상황들은, 어쩌면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결론이 나오죠. 결론은···.”

“센베크!”

포우가 소리쳤다.

“쳐라!”

센베크가 화답하듯 소리쳤다.

“와!”

동시다발적으로 창날이 제윅을 향해 밀려들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좌우 사방을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던 창의 파도에 피할 곳은 없어보였다.

그 순간. 제윅은 입 꼬리를 말아 올렸고. 제윅의 몸을 중심으로 회오리가 생성되었다. 그 바람이 어찌나 거칠고 강했던지 밀려들던 창들이 모두 비껴나가게 만들 정도였다. 밀고 들어오던 창수(槍手)들은 중심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다.

그 때 센베크는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며 창수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창을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내려그었다. 바람마저 가를 정도로 강한 거력이 담긴 공격이었다.

제윅은 파리를 쫓는 것 같은 동작으로 가볍게 팔을 저었다. 내려오던 창대의 가운데가 뚝 부러졌다. 그리고 창날은 제윅의 옆으로 튕겨나가더니 한 병사의 얼굴을 뚫었다.

그러나 공격은 센베크만 하지 않았다. 포우의 오른편에 섰던 타난 역시 창을 찌르기 동작으로 밀어 넣었다. 오직 한 점만을 뚫겠다는 의지가 담긴 공격.

“이얍!”

기합과 함께 창은 회오리를 뚫었다. 타난은 회오리에 진로가 틀리지 않도록 강하게 창대를 부여잡고 밀어붙였다.

그 순간.

“엇!”

타난의 발밑으로 구멍이 생겼다. 부지불식간에 생겨난 구멍으로 타난이 떨어지자, 자연 공격도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포우도 곁에 있다가 땅굴 가장자리에 위치한 오른발이 미끄러질 뻔 했다. 그러나 기민하게 다리를 뺀 포우는 칼을 비스듬히 늘어뜨린 채로 달려가 제윅 앞에서 위로 그어올렸다. 만만치 않은 힘이 깃들었다고 생각한 제윅은 몸을 기울여서 칼을 피했다. 하지만 그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는지, 칼날은 제윅의 오른쪽 가슴을 갈랐다. 하지만 얕았다. 칼은 옷자락만 베어내고 벗어났다.

제윅이 씩 웃었다.

****

창수들이 접근을 하던 순간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웅크렸던 라보네와 루치드는 회오리의 피해는 입지 않았다. 아마도 제윅이 적절히 통제했던 까닭이겠지만, 그것을 고마워하지는 않았다.

“너 마법사라며?”

라보네가 루치드에게 물었다. 그 물음의 의미가 왜 제윅에게 저항하지 않느냐는 뜻임을 알아챈 루치드는 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대답했다.

“마법을 쓰지 못해요.”

마법사가 마법을 쓰지 못한다고? 라보네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으로 물었지만 루치드는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 그랬다. 루치드는 지구에 있을 때부터 마법을 쓸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피구라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떠오르던 피구라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불, 빛, 마찰에 관련된 모든 마법들이 마치 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흐릿하게만 떠오를 뿐이었다. 그 이미지도 예전 마법을 사용할 당시의 기억에서 투영된 이미지였을 뿐, 라티오(원형 세계)의 포르마(원형)가 아니었다. 포르마가 인식되지 않으니 자연 마법이 구현되지 않았다.

‘지구’의 과학문명과 세계의 법칙에 잠식(蠶食)되기 시작하면서 생긴 변화라고 추측할 뿐이지만, 그 때문에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빛을 마법으로 재현해냈던 그 때처럼, 계속 공부를 하면 다시 마법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품었지만 갈수록 더 멀어지기만 했다. 그래서 마법사를 찾으려는 생각을 가진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설마 그 의도가 이런 결과를 낳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럼 저 마법사를 막을 방법이 없는 거구나.”

라보네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루치드는 고개만 살짝 들어 제윅을 바라보았다. 마법을 사용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제윅이 경비대를 상대로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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