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a Ver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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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해가 안 가겠지? 다행히 넌 좋은 선생을 만난 셈이야. 나와 이런 문답을 나눌 사람은 몇 없거든.”
루치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말만 계속해나가는 제윅이었다.
“이곳에 사는 아이들은 ‘이유’ 따위를 생각하지 않아. 누가 때리면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여야 하고, 누가 밟으면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야 돼. 일을 시키면 잘 할 수 있게 뛰어다녀야 하고, 못하면 맞는 게 당연한 거야. 감히 어떤 아이들이 ‘이유’ 따위를 생각한단 말이지? 난 니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그런 게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도 못했을 거야.”
“······.”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다.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러고 보니 자신이 ‘지구’에 오기 전, 빈촌에서 생활할 때는 딱히 ‘이유’를 생각하며 살지 않았던 것 같기는 했다. 그 당시의 루치드는 그냥 숨만 쉬고 살아가는 중이었지.
하지만 제윅의 이야기는 끝이 아니었다. 그는 한층 더 소리 높여 이야기했다.
“그리고 억울하다? 이거야말로 기가 찰 일이지.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다스리는 건 엄연한 세계의 법칙이야. 왕이 귀족들을 다스리고, 귀족들이 평민들을 다스리는 건 당연한 거야. 통치자가 통치자로 존재하는 한에 있어, 다스림을 받는 쪽은 언제나 통치자의 말에 따름이 옳은 것이야. 귀족이 평민에게 일을 시켰는데 어떤 사람이 억울하다고 느낀다는 거지? 만약 억울하다고 느끼는 평민이 있다면, 미쳤거나 혹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어야 할 거야. 게다가 억울하다는 건 잘못이 없을 때 드는 감정이야. 잘못이 없다고? 과연 그럴까?”
루치드는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다. 법칙? 합리? 제윅의 열변은 계속되었다.
“경비대장이 널 감옥에 넣은 건 정당한 법집행이야. 의심스러운 사람을 감옥에 넣는 건 당연한 일이야. 감옥에서 이유 없이 맞아서 억울하다? 너의 뻣뻣한 태도를 보면 전혀 이유가 없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루치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의심만 가지고 감옥에 넣는다는 것이나, 언행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맞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마지막으로 마법사를 찾는다? 넌 이 세상에서 마법사가 어떤 위치인지 모른다는 이야기야. 이 세상에서 마법사를 입에 올리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될걸? 그리고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넌 포함이 안 된다는 걸 너만 모르고 있었다는 거지.”
제윅이 빈 손을 서로 맞부딪치며 짝, 소리를 냈다. 루치드는 제윅의 눈을 바라보았다.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눈이었다.
“결론. 상식적인 내용임에도 상식인 줄 모르고, 합리적인 상황임에도 ‘억울’이라는 표현을 쓰고, 나이가 어린 주제에 ‘이유’따위를 거들먹거리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단언컨대, 없어. 이 세상에는.”
루치드는 괜히 항변하고 싶어졌다.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오해 아닌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전, 빈촌에서 살았어요. 녹스에서 한 참 떨어진 마을에서 살았다 고요.”
“그 곳에서 혼자 살았어?”
제윅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루치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요.”
“어른들도 있었지?”
“···예.”
“어른들이 다들 귀족이라도 됐었나? 아니면 다들 왕족들이었나?”
“······.”
당연히 마을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 그냥 평민들이었다. 사냥이나 하고, 나무나 줍고, 농사나 짓던 필부(匹夫)들이었다.
“왕족들 혹은 귀족들이 아니고서는 그런 이야기를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게다가 귀족이나 왕족이라면 네가 했던 표현을 쓰지도 않겠지. ‘억울’이 아니라 ‘괘씸’이 될 테니까.”
“······.”
“그렇기 때문에 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거지.”
“······.”
얼굴이 붉어지도록 열변을 토하던 제윅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씩 웃었다.
“단,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하나 존재해. 그래서 최종 결론.”
“······.”
“넌 마법사일거야.”
“!”
제윅은 루치드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말이 제대로 들어맞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제윅이 득의양양한 어조로 근거를 댔다.
“빈촌이라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넌 그 곳에서 마법사를 만난 적이 있었던 것 같네. 마법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집어넣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긴 해. 마법사라면 ‘이유’를 따질 테고 ‘억울’하기도 하겠지. 힘이 있는데 힘없는 사람한테 당하면 ‘억울’하니까. 즉, 이 세상의 모든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 마법사가 바로 너의 정체라는 게 나의 결론.”
제윅이 손을 뻗어 루치드의 턱을 붙잡았다.
“자, 이제 이야기해봐. 니 차례야.”
제윅인 얼굴을 가까이 댔다.
“넌 마법사지?”
루치드는 쿵쾅대는 가슴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 없었다.
“전···.”
“아, 아쉽네.”
제윅이 손을 놓고 상체를 뒤로 뉘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자세로 천장을 바라보던 제윅은 벌떡 일어났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기다리던 사람은 아니지만.”
그 말에 루치드가 고개를 돌렸다. 부서진 현관에 후드를 눌러 쓴 사람이 서 있었다.
라보네는 핏자국을 따라가다 멀리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직감적으로 그 곳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라보네는 서둘러 소리가 난 곳으로 뛰어갔다. 마침 핏자국도 소리가 난 곳을 향하고 있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간 곳은 단층의 낡은 가정집이었다. 집 아랫단도 없이 바로 땅에 기둥을 박고 진흙을 바른 집이었다. 입구로 들어가는 문은 산산조각이 나 있어서 소리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라보네는 조심스럽게 다가가려 했지만, 입구에서부터 이어진 긴 핏줄기를 보니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내부를 훔쳐 볼 요량으로 고개만 빼꼼히 들이 밀 생각이었건만, 입구 근처에 놓인 시체를 보니 도저히 진정할 수 없었다.
“텔리오···.”
라보네가 너무 큰 충격에 얼어붙듯 서 있을 때, 거실 안의 어둠 속에서 슬며시 나타난 제윅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아가씨?”
“······.”
“아, 귀족들은 ‘볼레’라고 부른다던가? 너무 오래전에 들은 거라 정확한지 모르겠네.”
라보네가 고개를 들어 제윅을 바라보았다. 라보네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매우 떨고 있었다.
“당신이, 이렇게 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볼레.”
제윅이 한 손을 가슴 앞에 대며 정중한 자세로 대답했다. 그 모습이 마치 비아냥거리는 것 같아 더욱 화가 난 라보네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흠. 그건 말입니다. 안으로 들어오셔야 이야기를 드릴 수 있겠군요. 다른 손님도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 것 같으니 말입니다.”
제윅이 라보네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포우가 칼을 들어 제윅을 겨누고 있었다.
한 편, 거실 한 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치드는 제윅이 한 말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렁뚱땅 자신의 정체가 들켰다는 건 둘째치더라도, 자신이 그간 그렇게 분노했던 사실들이 너무 어이없는 이유로 정당화된 현실에 허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라고?”
아이가 뭇 어른들에게 핍박과 멸시, 천대와 폭력에 시달림에도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아이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게 당연하다고? 통치자의 논리?
자신의 상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상식. 지구의 상식.’
루치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것이었나.’
이 곳은 지구가 아니었다. 지구의 상식이 이 곳에서는 상식이 아니었다. 지구에서는 불합리하다고 생각될 것들이 여기서는 합리적인 일들이었다.
루치드가 그간 지구에서 적응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공부와 노력을 해서 지금까지 별 문제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적응해야 할 세상은 그곳이 아니라 이곳이었다.
그 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말.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마라.”
안트가 이야기 해준 말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았다. 루치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윅, 어떻게 된 거지?”
포우가 겨눈 칼을 높이 들고 물었다.
“뭐긴요. 보시는 대로죠.”
제윅이 넉살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감옥의 그것도 네 짓인가?”
“아시면서 물으시는 겁니까? 짓궂으시네요, 대장.”
“대장이라 부르지 마라!”
포우가 노성을 터뜨렸다.
“아이고, 무서워라.”
제윅이 라보네의 어깨를 짚고는 몸을 숨기는 시늉을 했다. 라보네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제윅의 몸을 밀치려 했다. 그러나.
“에이, 아가씨는 잠시 안에서 들어가 쉬시죠.”
라고 말하며 라보네의 몸을 돌리더니 거실로 밀어 던졌다. 라보네는 중심을 잃고 비틀대다 바닥에 철썩 주저앉았다.
“대장도 들어오시죠?”
제윅이 문 옆으로 서며 마치 안으로 모신다는 의미의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포우가 그 말을 따를 리 없었다. 포우는 한 발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제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그러나 눈과 칼끝으로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제윅을 따라다녔다.
“너, 마법사인가?”
포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윅은 방긋 웃으며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네.”
“감옥 안의 사람들, 경비대원들 모두 네 짓인가?”
“그렇죠.”
“새벽의 순찰대원도?”
“그럼요.”
포우는 칼을 고쳐 잡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다른 한 사람은?”
“다른? 아! 순찰대원? 그 사람은···.”
제윅의 웃음이 짙어졌다.
“대장님, 뒤요.”
흠칫 놀란 포우가 황급히 뒤로 돌았다. 눈앞으로 날카롭게 벼려진 창날이 밀려들고 있었다.
“괜찮아요?”
라보네가 거실로 밀려 넘어졌을 때, 그 소리에 정신이 번뜩 든 루치드는 무의식적으로 다가가 안부를 물었다. 라보네는 그저 밀려 넘어졌을 뿐이었는지 크게 다치지 않았다.
“그래. 괜찮아.”
넘어지면서 후드가 벗겨진 라보네의 얼굴을 본 루치드는 깜짝 놀랐다. 거짓 없이 말하건대, 라보네는 루치드가 이제껏 본 사람들 중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한 여자였다. 눈, 코, 입, 얼굴의 윤곽, 눈썹의 위치, 그 종합적인 균형과 비율은 루치드의 정신을 한 순간 빼앗을 정도였다.
“혹시, 네가 그 아이니? 마법사를 찾는다던?”
라보네가 조심스럽게 아이의 정체를 물었다. 루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보네는 흘깃 시선을 돌려 입구에 선 제윅을 눈짓했다.
“저 사람은 마법사?”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라보네는 아이를 보더니,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무릎걸음으로 거실에 쓰러져 있는 텔리오에게 다가갔다.
“텔리오. 텔리오?”
죽은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아직 숨줄이 붙어 있었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데 억지로 참았다. 여전히 제자리에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루치드를 보며 말했다.
“도와주겠니?”
일단 텔리오를 입구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놔야 할 것 같았다. 그래봐야 저 마법사의 손아귀겠지만, 일단 거리상으로 여유가 있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루치드도 굳이 거부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제윅이 하지 말라고 말한 적도 없었다―라보네를 도와 텔리오를 거실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그 이후, 라보네와 루치드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때 밖에서는 요란한 쇳소리가 들렸다.
―챙!
포우는 늦지 않게 칼을 들어 올려 창의 진로를 빗겨나도록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어깨를 들이밀어 빈틈을 보인 습격자의 가슴을 밀어붙였다. 상대는 거친 숄더 차지(shoulder charge)에 뒷걸음질 치며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창을 포우를 향해 겨누었다.
거리가 떨어지고 나니, 상대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눈에 익은 사내는 아니었지만, 분명 복장은 순찰대원의 그것이었다.
“한 편인가?”
그러나 말을 뱉자마자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순찰대원의 동공에는 아무런 상이 맺혀있지 않았다. 무감각한 표정과 일자로 붙은 입매를 보니,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즉, 이지를 잃었다는 말.
“재미있죠? 요즘 새로 익히는 마법이에요.”
포우의 등 뒤에서 흥얼거리는 목소리로 정체를 이야기해주는 제윅이었다. 그러나 포우는 감히 등을 돌릴 수 없었다. 한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창날이 날카롭게 자신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