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18화 (118/956)

Mera Vera(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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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윅이 자리에서 일어나 루치드의 주위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음, 난 드뷔시의 북쪽에서 살았어. 꽤 추운 곳이었지. 그 곳은 산이 별로 없었어. 넓은 평야와 하늘만이 전부인 곳이었단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방향은 달라지지만 늘 그곳에는 바람이 불었지. 얼마나 심한 바람이었는지 사람들이 땅 위에 서 있기도 힘든 바람이었어. 그래서 난 줄곧 두더지처럼 땅에 굴을 파고 살았지. 뭐, 실제로 두더지를 만난 적도 있어. 꽤 맛있는 놈이었다.”

입맛을 다시며 히죽 웃는 제윅이었다. 루치드는 발끝을 들어 올렸다가 사뿐히 밟는 동작을 취하면서 장난스레 웃는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 곳에서는 사람들이 한 곳에 살지 않았어. 늘 돌아다녔어. 왜냐고?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 먹을 물이 없어지거든. 우리는 늘 물을 찾아 움직였고, 한 번 찾으면 일주일 정도를 머물렀지. 그래도 그 때는 힘든 줄 몰랐어. 다들 그렇게 살았으니까.”

제윅의 목소리는 밝고 명랑해서 결코 어렵다거나 힘들다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윅은 적절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이야기를 맛있게 들려주었다.

“정확히 언제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물을 찾지 못해서 한 참을 방랑하던 때가 있었거든? 함께 다니던 어른들도 눈 밑이 검게 변할 정도였어. 나도 손톱이 벗겨질 정도로 땅을 파고 다녔지. 그런데 조금 피곤했었나봐. 내가. 파던 땅굴에서 헛잠을 잤던 거 같아. 그런데 누가 날 깨우더라고? 비몽사몽간에 일어나서 보니 처음 보는 얼굴이야. 그 사람이 날 살피더니, 따라오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난 어른들의 허락 없이 움직일 수 없던 몸이었단 말이지. 그래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 했더니, 그럴 필요 없대.”

루치드는 주위를 도는 제윅을 보느라 고개를 좌우로 계속 움직여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괜히 어지러운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둘러보니 사람이 없네? 다들 어디 갔나 했더니, 찾을 필요 없대. 다들 가버렸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뭐 도리가 있나? 난 아직 어리고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데. 그래서 따라가겠노라 했지. 이쯤 되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알겠지?”

루치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제윅이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난 그 날로 방랑자에서 노예로 신분이 변천되었지. 저항하든 하지 않든, 사람들은 모두 노예상의 손에 끌려 간 상태에서 나만 굴에 남아 있었는데, 재수 없게 눈에 띈 거야. 뭐 별수 있나.”

“······.”

“그런데 참 세상사가 묘한 게 이런 순간인 거 같아. 마침 그 순간에 노예상들은 미친놈을 만나게 돼. 미친놈이라고 해야 되나? 뭐 지나간 일이니 상관없겠지. 그 미친놈이 길에 딱 나타나더니 잘 됐다면서 손으로 이렇게 휙휙 하더라?”

제윅이 지휘자의 그것처럼 공중에서 팔을 휘젓는 시늉을 했다.

“그랬더니 바닥에서부터 검은 안개가 올라오는 거야? 신기하지 않아? 난 그 때 좀 신기하던데. 사람들이 모두 픽픽 쓰러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안 남게 됐어. 나 빼고.”

“마법인가요?”

루치드가 물었다. 제윅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친놈이 날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어. 이건 별로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별로 이야기할 것도 없고. 그냥 그 사람에게서 마법을 배웠지. 그리고 세월이 흘렀고, 난 마법사가 됐어.”

루치드는 참지 못하고 말을 끊어야 했다.

“질문 있어요.”

“흠, 질문도 받아야 하는 건가?”

제윅이 루치드의 등 뒤에서 양 어깨를 짚으며 물었다.

“······.”

“그래 해봐.”

“이 이야기를 제가 들어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도대체 이 이야기의 핵심이 뭐지? 왜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제윅은 루치드 앞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필요해서야.”

“시간이요?”

제윅은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벌렸다. 루치드는 가끔 견학을 가서 보곤 했던 연극 무대 위의 배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과장된 동작과 구구절절 늘어놓는 독백.

“난 지금 기다리고 있어. 저 밖에서 우릴 훔쳐보는 사람이 좀 더 가까이 오기를. 그런데 안 오네. 내가 적당히 손을 써야 할까봐.”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제윅의 손에서 시작된 바람이 루치드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더니 등 뒤의 현관을 박살냈다.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입구의 나무문이 박살나서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그 조각 사이로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지 헐떡이는 숨소리가 루치드의 귀에까지 들렸다.

제윅이 다가가 남자의 발목을 붙잡고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남자가 흘린 피가 바닥에 긴 자국을 냈지만, 제윅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감옥에서부터 따라오는 것 같아서, 조금 기다렸어. 이 사람이 들어서 좋을 이야기도 아니어서 조금 꾸미기도 했지만 뭐 상관있나?”

루치드의 눈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리라곤 상상해보지 못했다. 몸 곳곳에서 피가 꿀럭꿀럭 솟아나는데 제윅은 아무런 응급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제 진짜 이야기를 해 줄까? 난 저 북쪽에서 살고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소문을 들었지. 남쪽 중의 남쪽, 도망자들의 도시에 다른 마법사가 나타났다는 소문. 그런데 거기에 하나 더 신기한 이야기가 들렸지. 그 마법사가 불을 쓴다는 거야? 세상에. 요즘도 불을 쓰는 마법사가 있나? 궁금하더라고. 그래서 이 곳에 온 건데, 없네? 어떡해? 그래도 혹시 몰라서 여기서 머무르기로 마음을 먹었지. 사람 많은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조금 고민하긴 했는데, 다시 올라가기도 귀찮고, 그래서 그냥 여기 경비대에 취직하게 된 거야.”

루치드는 죽어가는 남자에게 다가가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방금 마법사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손을 쓰는 장면을 목격한 이상, 함부로 몸을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말이야. 세상에! 마법사를 찾는 아이가 있다는 거야? 처음에 듣고 든 생각이 뭔 줄 알아? ‘미친 거 아냐?’ 난 지금까지 미친 사람은 나한테 마법을 가르쳐 준 그 사람 밖에 본 적이 없거든? 그런데 대놓고 마법사를 찾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미치게 궁금한야.”

“알겠어요. 일단 제가 마법사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그게 궁금해서 절 만나러 왔다는 이야기는 알겠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죽이려고 하신 거예요?”

“마법사의 일을 궁금해 하는 사람은 마땅히 치러야 할 댓가지.”

진짜 미친 사람은 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라보네는 여관으로 돌아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다른 골목에서 로브를 둘러 쓴 두 사람이 감옥으로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몸을 숨기고 살피니 한 사람은 허리에서 칼을 빼들었고, 또 한 사람은 창을 들고 서 있다가 먼저 감옥으로 달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들고 있는 무기를 보아하니, 경비대원임에 분명했다. 라보네는 이대로 돌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텔리오를 따라가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갔다가는 텔리오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도울 수 없을 것 같았다. 또 혼자서 여관으로 가다가는 중간에 무슨 변수가 생겨 안전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서둘러야 돼. 잘못하면 텔리오가 위험할 수 있어.’

적어도 경비대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라보네는 후드를 고쳐 쓰고 감옥에 들어간 두 경비대원들이 나오기 전에 텔리오를 찾아 떠났다.

텔리오가 떠난 방향을 따라간 라보네는 복잡하게 얽힌 골목 때문에 앞서 간 사람들의 행방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어?”

어느 골목으로 들어갔을까를 고민하던 라보네는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잠시 후, 라보네는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 편, 간발의 차이로 범인과 목격자를 놓쳐버린 두 경비대원은 게울 게 없어질 때까지 게우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감옥을 빠져나왔다.

“타난, 경비임무를 맡은 각 성문의 대원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호출해서 이 곳으로 출동하도록 해. 우리끼리 할 문제가 아니었나보다.”

포우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내며 말했다.

“대장님, 대장님도 일단 본부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타난의 당부에 포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그럴 시간이 없어. 마법사가 아이를 데리고 갔어.”

“예?”

자기랑 같이 토하고 있던 경비대장이 언제 그 걸 확인했단 말이지? 타난의 의심을 알았는지, 칼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다가선 경비대장이 감옥 옆에 있는 발자국을 가리켰다.

“이 발자국은 범인이 감옥에서 돌아가면서 남긴 발자국이다. 그리고 그 옆에 점점이 떨어진 핏자국은 아마 아이가 남긴 거겠지.”

“죽였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감옥 안에 어린 아이의 팔다리는 보이지 않았다. 즉, 범인은 다른 사람을 칼이나 다른 날카로운 것으로 해치면서도 아이는 죽이지 않았어. 그리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갔음이 분명하다. 죽였더라도 마찬가지야. 시체라고 가정해도 데리고 갔다는 것만은 분명해.”

다만, 그런 놈이 이런 증거를 왜 남겼나 하는 점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마른 땅에 피에 절은 발자국과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진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분명 일부러 남겼다고 보아야 옳다.

‘그렇다면 분명 따라오란 이야긴데, 과연 가는 것이 옳은가?’

함정일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엄연히 범인임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사라졌는데 어찌 쫓지 않겠는가.

“우선 내가 가서 정탐을 할 테니, 넌 센베크와 경비대를 불러와.”

“대장, 차라리 제가···.”

“아니, 내가 너보다 낫다.”

“위험합니다.”

“마찬가지야. 여기서 꾸물거릴 시간 없어. 서둘러.”

포우는 칼을 움켜쥐고 조심스럽게, 하지만 빠르게 핏자국을 따라갔다.

그렇게 라보네와 포우가 핏자국을 따라서 접근하던 그 시간.

“처음에는 그냥 호기심이었어. 어떤 아이가 마법사를 찾는다고 소문을 내는 걸까? 어, 그런데 알고 보니 어제 봤던 그 녀석이네? 이것도 인연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지.”

제윅은 의자 하나를 끌고 와 루치드 앞에 놓았다.

“그런데, 사실 널 여기 데려올 때까지만 해도 그냥 왜 찾는지 물어보려고만 했어.”

“거기서 물어봐도 되는 거 아니었나요?”

“안되지. 거긴 경비대 본부에서 너무 가까운 곳이야. 언제 경비대들이 들이닥칠지 몰라. 그러면 너무 귀찮아지거든.”

“물어보려고만 했다는 말은 지금은 달라졌다는 건가요?”

“역시 똑똑하네. 그런데 넌 나한테 너의 정체에 대한 여러 가지 힌트를 줬어.”

“예?”

제윅이 손가락을 펼쳐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첫 째, 넌 네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이유를 물었어. 그렇지?”

“네.”

그게 어쨌다고?

“둘 째, 넌 네가 굉장히 억울하다고 했어. 그렇지?”

“···네.”

역시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셋 째, 넌 마법사를 찾는다고 했어.”

“그랬어요.”

제윅이 씩 웃었다. 어쩐지 음산한 기색이 드리워진 웃음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접었던 손가락을 하나 펴 보였다.

“먼저 첫 번째. 이곳에 어떤 아이들도 이유 따위를 묻지 않아.”

“네?”

“세상에. 난 네가 그 말을 했을 때 얼마나 놀랬는지 몰라.”

“···그게 왜요?”

제윅은 일부러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는 흉내를 냈다. 뭔가 얄밉다는 생각을 하려는 찰나 제윅이 웃으며 두 번째 접은 손가락을 폈다.

“두 번째, 억울하다고? 세상에. 아무도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누가, 왜, 그 상황에서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어떤 사람이 그 상황에서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루치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 당연한 일을 당연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제윅의 말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 당연한 일?’

제윅은 다시 세 번째 손가락을 폈다. 모든 손가락이 펴졌다.

“니가 한 말을 합치면, 무슨 뜻인 줄 알아? 넌 이 세상에 살지 않는 사람이란 소리야.”

루치드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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