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a Ver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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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린과 루치드는 성문에서 멀리 떨어진 경비본부로 걸어갔다. 녹스 성은 네 방향으로 성문이 열려 있으며, 이 중 경비본부는 서문에 가깝게 위치해 있었다. 왜냐하면 매년마다 서쪽에서부터 몰려오는 흉포한 몬스터들의 습격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최근에는 기이하게도 몬스터들의 습격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위험하다고 판단한 녹스성의 경비대는 경비본부를 서문 가까이 두고 있었다.
지나가는 동안 중앙대로를 지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훌린은 일부러 그러는지 몰라도 조금 둘러가는 길을 선택했다.
“중앙대로로 가면 빠르지 않나요?”
“···여기 살았다는 말이 사실인가보군. 그런데 경비대원들은 중앙대로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요?”
“순찰병이 아닌 이상 중앙대로를 사용하지 않는 게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는다는 규칙 때문이지.”
사실 경비병들이 특별한 사유 없이는 중앙대로를 이용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몬스터 때문이었다. 경비병이 중앙대로를 이용하는 경우는 대부분 몬스터 때문에 경비병들이 집결해야 할 때뿐이었다. 그래서 대로에 경비병들이 등장하면 사람들은 일단 큰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의 심리적인 측면을 보살핀 성주가 명령을 내려 경비대원들이 업무 중에 중앙대로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할 정도였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경찰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과 군인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의 차이정도라고 하겠지만, 루치드가 이를 구분할 리 없었다. 훌린이 그렇게 말하니, 그런가보다 생각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성벽 주위를 따라 걷는 길이 어색하지만도 않았다. 이렇게 걷고 있자니, 옛 생각이 나기도 하고 옛 얼굴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기분도 들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경비본부 앞에 서게 되었다. 경비본부는 2층 목재 건물로 되어 있었다. 붉은 전나무를 외벽에 쌓은 본부는 짧은 단이 아래 설치되어 있어 꽤 견고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겨울바람을 피할 생각이었던지 모든 창은 굳게 닫혀 있었다.
“대장, 훌린입니다.”
“들어와.”
훌린과 루치드는 경비본부 안으로 들어갔다. 의외로 실내는 여러 개의 등불이 밝혀져 있어 그리 어둡지 않았다. 커다란 테이블이 가운데 있고, 그 곳에서 몇 사람이 지도를 가운데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상석에 위치한 덩치 좋은 남자가 아마도 경비대장이라 생각됐다. 루치드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테이블 옆으로 다가섰다.
“무슨 일인가?”
턱수염이 더부룩하게 난 경비대장은 날카로운 눈매로 훌린과 루치드를 살폈다. 특히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경계서린 눈으로 위아래를 훑어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벌써 이곳에서만 16년째 근속중인 베테랑 경비대원이며 7년째 경비대장으로서 경비대원과 성내 시민들의 성원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 어느 때고 늘 경비대장으로서의 책무와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경비대장으로서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훌린은 동문에서 아이를 만난 사정을 이야기했다.
“샤피로? 그게 누구지?”
경비대장의 물음에 왼쪽에 서 있던 남자가 대신 아는 척을 했다. 가볍게 책상을 치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 중앙대로에서 약초상을 했던 상인입니다. 그 때 있잖습니까? 6년 전인가? 더 이상 여기 있기 힘들다며 떠난 상인 말입니다.”
“그 때 떠난 사람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경비대장, 포우는 아이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왼쪽의 남자가 짝다리를 짚고 서서는 물었다.
“도망자는 아니겠지?”
녹스가 부오노 공국의 지배하에 놓이면서부터 더 이상 도망친 사람들은 이 곳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부오노 공국에서 내려 보낸 성주와 관리들에 의해 성내 사람들의 신원이 철저히 조사되었고, 이후부터는 도망친 노예가 발견되거나 잡힐 경우 그 즉시 공국으로 이송되도록 조치되고 있었다. 때문에 경비대의 주 업무 중 하나는 노예나 범죄자의 출입을 막는 것이었다.
“예전에 살았던 약초상을 아는 걸 보면, 이곳에서 살았다는 말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겠지.”
공국으로 돌아간 약초상을 만난 적이 있었다면, 그래서 녹스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단편으로라도 들었던 적이 있다면, 그 후 도망쳐 이 곳에 나타난 것이라면 단순히 샤피로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것이 이 곳에 살았다는 증거로는 이용될 수 없음이었다.
경비대장은 추측하기보다는 직접적으로 심문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니가 직접 말해봐라. 여기서 뭘 하고 살았고, 어디를 갔었다가 왜 지금 이곳으로 돌아오려고 하는지.”
엄숙한 분위기에도 루치드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지금 루치드를 괴롭히는 것은 사람들의 경계서린 시선 따위가 아니었다. 소년을 괴롭히는 것은 오직 배고픔과 수면부족이었다. 말하기 전에 우선 먹을 거라도 달라고 졸라 볼까 고민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 루치드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후 이야기를 풀어냈다.
“일은 약초상에서 일했어요. 샤피로 아저씨네 가게 창고에서 약초들을 정리했고요. 그런데 사는 건 다른 곳에서 살았어요. 무슬라 아저씨라고 사냥꾼이었어요. 그 아저씨네 집에서 살면서 아침마다 샤피로 아저씨네 가게에 가서 일을 돕고 돈을 벌었어요.”
“무슬라?”
경비대장의 오른편에 앉은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경비대장이 힐끔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아이에게로 돌리며 물었다.
“왜? 아는 자인가?”
오른편에 앉아 있던 사내가 한껏 미간을 좁힌 채, 탁자에 두 손을 짚었다. 그리고 가라앉아 있던 기억을 되살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예, 당시에 제가 북문에 있을 때 종종 봤던 사냥꾼입니다. 녹스 주위의 산들을 모두 돌아다니면서 사냥을 하던 친구였는데, 워낙 솜씨가 좋은 친구라 기억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경비대장이나 다른 사람들이 말을 기다렸는데, 쉬이 나오지 않았다. 사내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6년 전에 죽었습니다. ···스크로파 때 말입니다.”
샤피로의 이름이 나올 때부터 간질거리던 기억들이 있었다. ‘스크로파’라는 단어가 방아쇠가 되어 빵, 하고 터져 나왔고, 선명한 천연색 영상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그 때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은 모두에게 공포와 두려움이었고, 때문에 여전히 경비본부를 서문 쪽에 두고 있을 정도였다. 오래된 기억임에도 그 공포는 여전해, 사람들은 마치 지옥의 불길이라도 마주한 사람 같은 얼굴을 했다.
포우 역시 그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 당시 자신이 내렸던 선택에 대해 수천 번의 고뇌와 한숨으로 되새기며 긴 시간을 보냈었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죄책감을 떨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선택은 성 안에 사는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을 살리는 길이었지만, 대신 성 밖의 수십 명을 죽이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 덕분에 스크로파 무리를 해치울 수 있었다지만, 그럼에도 포우에게는 지울 수 없는 원죄(原罪)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포우는 더욱 날카로운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계속 대답해봐라. 그럼 이후에 어디에 있다가 이제 나타나서 들어오려고 하는 건지.”
“무슬라가 ··· 죽은 뒤에 전 ··· 이곳을 떠났어요. 너무 괴로워서요. 그래서 이 곳에서 남쪽으로 가면 빈촌이 있는데 그 곳에서 생활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 마법사를 찾고 싶어서 왔어요.”
“헉!”
누군가 급하게 헛바람을 삼키는 소리를 냈다. 루치드가 앞서 한 이야기가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질 만큼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모두들 루치드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들은 마치 악마를 불러낸 소환술사라도 보는 시선들이었다.
“다들 나가.”
포우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명령을 내렸다.
“대장님!”
옆에 앉은 사내가 대경하며 포우를 바라보았지만, 루치드에게 고정된 시선은 움직일 줄 몰랐다.
“잠시들 나가 있어. 내가 이야기해 볼 테니.”
루치드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의 사람들을 둘러보지만 알 도리가 없었다. 다들 무거운 걸음으로 본부를 빠져나갔다.
“너, 마법사가 뭔지 알고 묻는 거냐?”
포우가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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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여관이 저희가 사용할 곳입니다. 녹스에 올 때마다 이 곳을 이용하지요.”
녹스에는 여관이 많지 않았고, 특히 이 곳은 중앙대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치안이 좋았다. 때문에 비싼 물품들을 거닐고 다니는 상단이라면 주로 이 여관을 사용한다고 할 수 있었다.
“2층 제일 안쪽 방입니다. 따라오시죠.”
검은 드레스에 하얀 블라우스를 받쳐 입은 부단장이 줄곧 자신의 곁을 지켜왔던 사내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대머리 사내의 지시에 따라 방을 배정받고 짐을 정리했다.
“정리하고 내려오면 식사가 기다릴 테니 다들 서두르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상단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사이, 드레스의 윗 단을 살짝 집어 들고 2층으로 올라간 부단주는 곧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름 이 여관에서 가장 큰 방이라고 하더니, 생각보다 실내가 썩 나쁘진 않았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에는 단촐하게 작은 옷걸이와 침대, 침대 옆 협탁과 러그 위의 작은 테이블 하나, 양 옆으로 두 개의 의자가 구비된 아늑한 침실이었다. 자신이 집에서 쓰는 것보단 작지만 깨끗하게 세탁된 새하얀 시트의 싱글 침대 위에 걸터앉으니 이내 그간의 피로가 아래에서부터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쉬시지요. 식사는 가져다 드릴까요?”
“그렇게 해주실래요?”
부단주가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부탁했다. 사내는 표정 없이 받아들였다.
“예, 그럼 옷은 여기 두겠습니다. 편히 쉬고 계십시오.”
사내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부단주는 그대로 양팔을 벌리며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낯선 침대의 질감과 낯선 천장 때문에 금방이라도 밀려들어 올 것 같던 잠이 물러나는 기분이었다. 부단주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최대한 호흡을 길게, 천천히, 깊숙이.
“벨로. 벨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부단주는 눈을 떴다.
“식사 가져왔습니다.”
그 새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걸까? 잠이 올지 안 올지 걱정했던 게 부끄러워 괜히 얼굴을 붉혔지만, 이를 알 턱이 없는 사내는 테이블 위에 들고 온 음식을 내려놓고 있었다.
“고마워요, 텔리오.”
텔리오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방을 나갔다. 부단주, 라보네는 침대에서 일어나 우선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 드레스를 벗자, 일순 몸에 한기가 들어 소름이 돋기도 했다. 하지만 무거운 드레스가 발아래 떨어진 순간, 마음도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를 죄고 있던 끈도 풀어버리자 해방감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이러고 있을까?’
텔리오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이 곳에서 이렇게 있어도 뭐라 할 사람은 없겠지. 만약 집이었다면, 제니가 수소처럼 달려와서 ‘아가씨! 어쩌고저쩌고!’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교양과 예절 수양(修養)을 아침 세수를 하듯 해 온 사람으로서, 감히 이런 민망한 복장으로 지낼 수는 없었다. 짧은 해방감을 뒤로 하고 간편한 실내복으로 환복한 라보네는 탁자에 앉아 늦은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조금 식은 것 같은 스프는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다만 스테이크처럼 보이는 고기덩어리는 라보네가 먹기에 너무 간이 세고 질겼다. 향신료를 골고루 뿌리지 않았던 것인지, 고기의 맛이 전혀 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험난한 여정에 지친 탓도 있겠지만, 도저히 식욕이 나지 않아 라보네는 나이프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 주위를 정리했다.
다시 침대에 누울까, 하다가 바깥의 정경이 궁금해서 창가로 갔다.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갔는지 하늘이 붉고 어두웠다. 수도만큼은 아니지만 꽤 많은 가옥들이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오래된 가옥들과 새로 지어진 가옥들의 차이가 별로 없을 만큼 깨끗하고 정갈한 거리라는 인상이었다. 비슷비슷한 구조의 집들이 죽 늘어선 가운데 창가 아래에는 서둘러 집을 찾아가는 것인지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라보네. 그 곳에서 니가 할 일은 단 하나다.”
상행을 떠나기 전, 상단 집무실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붙잡고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카넬, 붉은 마법의 씨앗을 찾아라.”
날카로운 펜촉을 들어 잉크에 담근 뒤 양피지에 서명을 하시던 아버지는 평소보다 진중한 어투로 이야기하셨다.
“아카넬만 있으면 니 동생을 살릴 수 있을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