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a Ver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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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가운 햇살이 눈을 찔렀다.
―츠르릉
먼 곳에서 차임벨 소리처럼 들리는 새소리가 아련히 귓가에 울렸다. 단유는 한 손으로 눈앞을 가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차가운 돌의 질감이 느껴져, 다른 한 손으로 주위를 더듬었다. 그제야 딱딱한 너럭바위 위에 누워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실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니, 밝은 햇살아래 익숙한 마을의 전경이 슬며시 보이기 시작했다. 낡은 기와, 정리되지 않은 집기들과 마음대로 열린 들창과 왜바람에 오락가락하는 문짝들이 보였다. 좁은 실골목과 껍질이 벗겨진 통나무 외벽의 귀틀집도 보였다. 단유는 불에 덴 것처럼 벌떡 일어나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런 풍경의 동네가 다른 곳일 리 없었다. ‘지구’에서 지낸 시간이 불과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다니!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무슨 이유로 이곳에 오게 된 것인가? 이유?
「나를 보라.」
“으윽!”
몸이 떨려왔다. 단유는 자신이 마주해야 할 그 시선과 감정을 온전히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나를 봐라」
명령. 단유가 고개를 들었다. 강한 분노를 담은 눈. 죽음을 불사한 눈. 허연 콧김이 뿜어졌고 그 틈으로 붉게 타오르듯 빛을 내뿜는 눈. 그 눈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슬픔이 느껴졌다. 안타까움이 느껴졌고, 두려움이 느껴졌다. 절망이 느껴졌고,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그동안 외면했던 감정들이 몰려들어왔다.
그 때였다.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다.”
디아트리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보지 않으려 했던가?’
무엇을 보지 않았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했다. 제대로 보는 연습을 했음에도 끝내 보지 않았던 것. 끝내 단유가 피했던 것.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어둠이 보였다. 어둠 너머를 바라보니 회오리치듯, 마구잡이식으로 얽히는 색색의 것들이 보였다. 그 색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이 쿵쾅거리는 기분이었다. 어떤 색을 보고 있으니 기쁘고, 어떤 색을 보고 있으니 슬펐다. 즐거웠고, 괴로웠다. 행복하고, 외로웠다.
단유는 멈추지 않고 계속 바라보았다. 이 색깔들 너머에서 자신을 부르던 것이 있었다. 그것을 봐야 했다. 색들이 흩어졌다. 물방울처럼, 먼지처럼, 마치 없었던 것처럼 흩어지고 사라지니 그 곳에 다시 어둠이 있었다. 가만 보니 어둠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느 순간부터인지 몰라도 늘 그 곳에 있었던 색이었다. 색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넌 뭐지?’
이름. 알고 있잖아? 죽음. 단유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단유의 안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 이후, 단유의 갇혀있던 기억들과 감정들이 생명을 얻고 피어나기 시작했다. 검은색에서 푸른색으로, 노란색, 붉은색으로 자라나더니 마치 마법의 그것처럼 폭죽을 터뜨리며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환한 빛의 향연에 단유는 눈물을 흘렸다.
이윽고 단유는 눈을 떴다.
****
시간이 흐른 뒤, 단유는 집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아무도 없었고,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집이었다. 하지만 집에서 느껴지는 냉기는 너무나 익숙했다.
“엄마.”
라고 불러보지만, 이제는 그 호칭마저 너무 어색하게 느껴졌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가족에 대한 의심으로 기억마저 변질되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가족이란 존재에 대한 의심. 이런 의심이 당연한가 싶었다.
“모든 걸 의심해라. 의심해야 진실을 볼 수 있다.”
안트는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아직은 이른 것일까? 단유는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다시 가족을 찾기 위해 막막한 대장정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이 버겁기도 했다. 흔적도 없고, 길도 없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단유는 이곳에 오기 전 ‘지구’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뇌사상태에 빠진 혜린.’
죽음에 이르렀다는 혜린이었지만, 단유는 엉뚱한(?) 궁금증이 생겼다.
‘가능할까?’
집 밖으로 나온 단유는 손가락으로 바닥에 번호를 붙여가며 몇 가지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했다.
1. 마법.
‘이 곳에는 마법사가 있다. 어쩌면 그 마법사가 혜린이를 살릴 방법을 알지도 모른다.’
저곳에서 혜린이는 죽음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 병을 고치지 못한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곳은 또 다를 수 있다. 무엇보다 마법이란 힘은 자신이 경험한 바와도 같이 기적의 힘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혜린이의 병을 기적적으로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 시간.
‘지금까지의 사례들을 보면, 이곳에서의 시간과 지구에서의 시간은 다르다.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지구에서는 순간에 불과할 수 있다.’
늘 그 시간의 괴리에 대해 궁금해 했지만, 여전히 원리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간의 경험을 통해 이곳에서의 1년이 지구에서 12시간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대로 지구에서 보낸 시간이 이곳에서 어떻게 적용되는 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두 가지만으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혹시 마법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그리고 빨리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면, 혜린이를 구할 수 있을까?’
당장 시도해봄직한 결론이었다. 결과를 확신할 수 없지만, 사람을 살린다는 것도, 혜린이를 구할 수 있다는 가정도 단유에게는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당장 하자.’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마을을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사실 디아트리네를 찾아가는 것도 잠시 고민했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말처럼 ‘지톤’일 뿐이고,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른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간도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마법사를 찾기 위해 자신이 서둘러 찾아갈 곳은 오직 한 군데 밖에 없었다.
‘녹스로 가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니, 거기에서 수소문하여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거기도 없다면, 녹스를 거쳐 ‘부오노 공국’의 수도에라도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수도라면 아무래도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 테고, 그 중에 마법사가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으리라 여겼다.
이전과 달리, 단유도 많이 성장했다. 이제는 키도 150을 넘어서 평균적인 또래 아이들에 비하면 꽤 큰 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몸 전체가 균형 있게 발달하여 튼튼해졌다는 것이 예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꾸준히 운동을 해 왔던 것이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서였다.
1분 1초라도 아껴보자는 마음에 단유는 쉬는 시간도 줄여가며 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마법사를 찾을수록 빨리 혜린이를 살릴 수 있다.’
근거는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짧아질수록 좋다는 것은 분명했다.
멀리 산 중턱에서 떠난 참수리 한 마리가 긴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가로질렀다. 눅눅한 바람을 가르며 날아든 참수리가 이방인의 존재를 눈치 채고 울음을 터뜨렸다.
―삐이
하지만 이방인, 단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리기에 열중했다.
****
“훌린, 오늘 왜 이렇게 졸리지?”
키보다 큰 창을 든 병사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건너편에 서 있던, 굵은 눈썹의 각진 턱을 가진 사내, 훌린은 눈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꾀부리지 마라.”
훌린은 두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리고 두 팔을 모두 뒤로 하여 뒷짐을 쥔 자세로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해자 건너편의 넓은 평야를 향하고 있었다. 꾀는 니가 부리고 있잖아!
“훌린, 창이나 들고 말해.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이제 막 태어난 우리 애가 밤낮을 못 가려서 그래. 너도 애가 있으면 알 거 아냐?”
“몰라. 우리 애는 밤에 잘 잤어.”
“거짓말!”
파트너가 소리를 지르거나 말거나 훌린은 뒷짐을 진 채로 눈동자만 굴려 평야와 하늘과 산을 번갈아보았다. 조금의 변화라도 생긴다면 곧장 옆에 세워 둔 창을 집어들 수 있도록. 다만, 그런 변화가 일어날 리 없다는 건 논외로 치고.
“훌린, 나 잠시만 눈 좀 붙이자. 진짜 너무 피곤해서 그래. 잠깐만 눈 좀 붙였다가 뜨면 개운해질 것 같아서 그런다고. 야, 너 파트너가 이정도로 부탁하면 못 이긴 척 해줄 수 있는 거 아냐?”
“제윅, 경비대장님 오신다.”
“지금 오시는 건 아니잖아?”
제윅은 제발 부탁이라며, 훌린에게 매달렸다. 훌린은 힐끔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셨다.
“조금 있으면 부오노에서 상단이 들어올 거야. 그 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없어.”
“그러니까, 그 전에 잠을 좀 자두겠다는 뜻이지. 맑은 정신으로 일을 봐야 사고가 나더라도 재빠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거, 알잖아?”
계속된 파트너의 조름에 훌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래, 그럼···.”
훌린은 말을 하다말고 뒷짐을 지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느새 그 손에 조잡한 창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어, 아, 안녕하세요.”
단유가 도개교를 건너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 둘에게 인사를 건넸다.
****
단유가 녹스에 도착한 것은 사흘이 지난 뒤였다. 이전에는 중간에 사고도 당하고 정신을 잃기도 해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에는 운이 좋았는지 생명을 위협받을 만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단유가 한 번 왔었던 길을 기억하고 있었던 탓도 있겠지만, 쉬지 않고 달린 소년의 절박한 각오가 시간을 단축시켰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해 그 짧은 시간에 퀭하게 변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넓은 평야 한 가운데 들어선, 여전히 높은 성벽을 자랑하는 녹스가 보였다. 단유는 남은 힘을 끌어 모아 녹스성으로 달려갔다.
녹스에 다가갔을 때, 동문 앞에는 2명의 성문 경비병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누구냐, 넌?”
게이트 앞에 선 한 병사가 거지꼴을 한 소년을 가로막았다. 엉망으로 뻗은 머리와 꾀죄죄한 옷차림, 신발도 없이 맨발로 평야를 가로질러온 소년은 누가 봐도 거지였다. 다만 이 근방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지라는 사실이 병사가 아이를 가로막은 이유였다.
“저, 전 루치드라고 해요.”
음, 제윅은 잠은 다 깼다는 얼굴로 옆머리를 긁으며 아이를 살폈다. 혹시?
“이름을 물은 게 아니잖아? 뭐하는 녀석이냐고? 이 근방에서 너 같은 녀석을 본 적도 없고, 아침에 신고를 하고 성 밖을 나간 녀석도 아닌데, 넌 봤어?”
제윅의 말에 평야에서 뛰쳐나온 메뚜기 보듯 바라보던 훌린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녹스성은 출입을 엄격하게 관리했었던 것 같다. 무슬라도 성을 나가 사냥을 하러 갈 때마다 출입처에 신고를 하고 나갔던 것을 기억해냈다.
다만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비슷한 이유로 경계를 받고 있음을 아직 모르고 있는 루치드였다. 지금 두 병사가 경계하는 이유 중 또 하나는 루치드가 ‘도망친 노예’가 아닐까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예전에 여기서 살았던 적도 있고요. 지금은··· 저 산 너머의 빈촌에서 오는 길이에요.”
“이봐, 저기 마을이 있었어?”
훌린에게 물으니 그저 어깨를 으쓱댈 뿐이었다.
“여기서 살았었다고?”
“예. 그··· 무슬라 아저씨랑 같이 성벽 근처에서 살았어요.”
“무슬라? 처음 듣는데?”
두 병사의 의심이 커져가는 가운데, 루치드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이내 다른 이름을 떠올렸다.
“아, 샤피로 아저씨 가게에서 일한 적도 있어요.”
“샤피로?”
“아, 약초상!”
훌린이 아는 척을 했다. 제윅이 미간을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
“알아?”
“아, 예전에 중앙대로에 약초상을 하던 할아범이었어. 너 몰라?”
“글쎄? 약초상은 알겠는데 가게 주인 이름까지는 모르겠는걸?”
“그 아저씨 이름이 샤피로였어. 지금은 없지만.”
루치드는 깜짝 놀랐다. 안 계신다고?
“그 아저씨, 예전에 가게 정리하고 드뷔시로 가셨어. 여기에 있기 싫다면서 말이야. 그 집 손녀가 드뷔시로 가고 싶다고 졸랐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뭐 당시에 여길 떠난 사람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워낙 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바람에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한다는 병사의 이야기였다.
“어쨌든 그 아저씨 이름을 알 정도면, 여기 살았다는 말도 거짓말은 아니라는 건가?”
“그렇겠지. 그런데 꼬마야. 그 아저씨도 없는데 어떡할 거냐?”
루치드 역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니 처음에 말을 걸었던 병사, 제윅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건 이 꼬마가 알아서 할 일이고. 어쨌든 꼬마 애를 성 밖으로 내쫓을 수는 없으니까, 일단 경비대장에게 맡겨야 하지 않을까?”
루치드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고, 그래서 순순히 훌린의 뒤를 따라 경비대가 묵는 숙소로 향했다. 떠나기 전 훌린은 한 마디를 남겼다.
“졸지 마. 금방 갔다 올 테니까.”
****
“부단주님, 저기 성이 보입니다.”
상단의 제일 앞에서 말을 타고 있던 대머리 남자가 소리쳐서 알렸다. 보고는 부단주에게 하는 것이지만 모두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한 탓에 모두가 만면에 활짝 미소가 피어났다.
세월이 지나고 길이 많이 변했다 해도 녹스로 오는 길은 언제나 험하고 힘들어서 각오를 다지지 않으면 오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이 곳에 오는 이유는 웬만한 상품은 모두 비싼 값에 팔린다는 점과 이 곳 사람들은 미처 모르는 특산품의 존재 때문이었다.
마차 근처에서 귀를 기울이던 한 사람이 이내 대머리에게 마차에서 내려온 지시사항을 전했다.
“속도를 높여서 빨리 가잡니다. 해 떨어지기 전에.”
“알겠어. 자, 모두들! 속도를 조금만 높여서 간다!”
“오우!”
고난의 길을 건넌 상단이 다시 힘을 내서 평야 가운데 들어선 ‘녹스성’을 향해 나아갔다.
“부단주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마차 안에서 굵은 인상의 사내가 정중한 어투로 반대편에 앉은 부단주에게 물었다. 길이 워낙 험했던 탓에 마차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여정이 되지 못했다. 특히 부단주는 녹스행이 처음이었다. 꽤나 아늑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꾸며진 실내였지만 오랜 여정에 사내도 허리에 통증이 올 정도였다. 하물며 부단주는 더 심했으리라.
“괜찮습니다.”
귀를 간지럽히는 미성이 마차 안을 잔잔히 채웠다. 아버지가 직접 다녀오라고 한 이유가 있겠지, 라고 편하게 생각했던 처음과 달리 지금은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다리가 저릴 정도로 지쳤다. 차라리 밖에서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안전과 호위의 문제 때문에 마차 밖을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우선 도착하면 여관부터 잡아서 쉬도록 하시고, 다음 날 아침에 성주를 뵙는 걸로 하지요. 지금 모습으로 성주를 뵙는 건 오히려 더 큰 결례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도 되나요?”
“그 정도는 이해할 겁니다. 다들 ‘리아빈’을 건너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아니까요.”
“말로만 들었던 ‘리아빈’이 그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요.”
공기, 바람, 냄새, 열기, 험한 지형. 이 모든 게 복합적으로 얽혀서 뭇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하는 천혜의 험지, 마치 미궁과도 같은 늪지대가 바로 ‘리아빈’이다.
“그래도 처음이라서 고생 하신 겁니다. 몇 번 반복하다보면 그 길도 익숙해지지요.”
부단주는 희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걸치고 있던 로브를 여미며 마차 밖을 바라보니 넓게 펼쳐진 산맥과 광활한 평야가 보였다. 첫 눈이 내리기 전에 도착해 다행이라는 남자의 말을 흘려들으며 부단주는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