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11화 (111/956)

아름다운 이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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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쾌청한 하루였다. 시험이 일주일이 남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오늘만큼 놀기 좋은 날이 또 있을까 싶은 하루였다. 맑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6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날이 덥지 않아 운동장에 공을 차던 아이들의 표정에는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남쪽에서부터 불어오는 훈풍에 더운 땀을 식히던 아이들이 수돗가에 모여 시원한 물로 세수를 했다. 옷에 물이 튀어도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았고,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장난치기 바빴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남자아이들이 빠진 교실에서 여자 아이들은 끼리끼리 뭉쳐 수다 삼매경에 빠져 들었다. 드라마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남자 이야기는 세월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언제나 주된 화젯거리였고, 다들 상대의 이야기에 맞장구치기 바빴다. 어젯밤 학원에서 장난치던 남자애 이야기, 엄마랑 같이 보던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입었던 패션에 대한 동경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만의 고민, 그들만의 사정, 그들만의 은밀한 이야기들이 청명한 햇살 아래 싱그런 꽃잎처럼 돋아나 아이들을 감쌌다.

모든 아이들이 햇볕처럼 따뜻한 미소를 베어 물었고, 그 미소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그런 날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단유는 낯선 단어를 들으며 얼굴을 굳혔다. 단어의 의미는 몰랐다. 하지만 그 단어를 언급하는 주영의 얼굴에서 언젠가 한 번 겪었던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꼈다.

“그 단어의 뜻을 모르겠어요.”

“···뇌가 활동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뇌가 활동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죽었다’고 표현해. 그래서 뇌사라고 불러.”

“뇌가 활동하지 않는다, 뇌가 죽었다는 말을 모르겠다는 뜻이에요. ···혜린이가 죽었다는 건가요?”

“······.”

뇌사자의 사망 진단은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었다. 간혹 가다가 뇌사자로 판명된 사람이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렸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나오곤 했다. 사실 이런 기적 같은 케이스는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기적은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의 확률로 발생할 때 부르는 단어다. 즉, 뇌사자가 정신을 차릴 확률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가족의 입장에서는 0%가 아닌 이상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 기적이 자기 가족에게도 발현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의사로서, 주변인의 입장에서 그보다 안타까운 순간은 없다.

주영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자기 입으로 혜린의 사망진단을 내릴 수 없었다. 태블릿으로 ‘뇌사’라는 단어의 의미를 인터넷 사전에서 찾아 보여주었다. 단유는 말없이 태블릿을 보았다.

「뇌활동이 회복이 불가능하게 비가역적으로 정지된 상태」

「뇌사 판정이 내려지면 뇌의 기능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

「뇌사 환자의 장기를 타인에게 이식」

다른 페이지를 살펴보았다. 비슷한 풀이에 비슷한 문장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장기 이식이란 게 가능한 건가요?”

물어보나마나한 질문이었지만 단유에게는 놀라운 지식의 단편(斷片)이었다.

“각막 이식이란 게 있어.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타인의 각막을 이식해서 앞을 볼 수 있게도 하고. 심장을 이식해서 심장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아픈 심장을 건강한 심장으로 바꿀 수도 있지.”

“의학이란 건 대단한 거네요.”

아마 이런 것도 재훈이 말한 지식의 불균등에서 온 무지의 한 단면일 테다. 주영은 매우 자연스럽게 장기 이식이란 것에 대해 설명했다. 말하자면 꽤나 흔한 상식일지도 모를 지식이었는데, 단유는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아무튼 혜린이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거군요.”

단유가 이렇게 말했을 때, 주영은 살짝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 재훈이 이야기한 것이 생각났다.

‘감정의 격리.’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아이라면 설령 ‘사이코패스’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아직은 살아 있어.”

확신할 수 없는 말이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단유는 주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영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직은, 살아 있어.”

그래, 살아 있는 거야. 속으로 한 번 더 외치자, 주영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혜린의 부모님들이 바로 이런 기분일까?

“제가 가도 되나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사실 주영은 재훈의 부탁을 받고 왔다. 아니, 재훈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왔을 것 같았다.

“그냥 일어나라고 말해주고 싶어서요.”

라고 이야기했던 단유였다. ‘감정의 격리’라는 이해하기 힘든 상태를 떠나, 당시 단유가 보여줬던 꾸밈없는 감정의 실체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리고 단유라면 혜린이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선생님께 허락을 맡아야 할 것 같은데요.”

잠시 생각에 빠졌던 주영을 일깨우는 단유의 말에 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선생님이랑 같이 갈 거야.”

****

오후 수업을 교감 선생님께 부탁한 후, 선생님과 단유는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과 푸른 나무가 그날따라 눈에 가득 담겼다.

만물이 싹을 틔우고 소생하는 계절이 봄이라면 풍성함과 화려함을 자랑하며 성장의 기쁨을 노래하는 계절이 여름이었다. 그 여름의 입구에서, 한참 성장의 기쁨을 노래해야 마땅할 아이가 눈을 감았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길지 않은 교직생활 동안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경험해봤더라도 적응하기 힘든 일일 테지만, 그래도 너무 가슴이 아파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이런 처지에 놓인 게 마치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무채색의 수채화 같은 희미한 표정으로 창 밖 저 멀리 풍경들을 눈에 담았다.

이윽고 병원에 도착한 세 사람은 곧장 병실로 향했다. 병실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졌고, 그 무게 이상으로 가슴이 묵직해졌다. 그리고 도착한 중환자실.

ECG(심전도검사)모니터는 규칙적인 신호음을 내고 있었다. 여전히 많은 선들이 혜린의 몸에 붙어 있었고, 혜린의 가슴은 천천히,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 했다.

“부모님들은요?”

주영이 중환자실 담당 간호사에게 물었더니, 어머니가 실신하셔서 잠시 응급실로 내려갔다고 했다. 선생님은 입을 틀어막고 혜린이를 보다가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 곧 등을 돌려 중환자실 바깥의 복도를 내달렸다. 주영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 쫓아가진 않았다.

“누나.”

“응.”

단유는 혜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죽었다면서요? 아니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면서요?”

“······.”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숨 쉬고 있는데요? 저기 위의 모니터는 심장도 뛰고 있다는 거 아닌가요?”

“······.”

주영의 다문 입술을 열리지 못했다. 단유는 이해하지 못했다. 주영이 답을 하지 못하자, 고개를 돌려 간호사를 찾았다.

“저기요?”

“응? 무슨 일이니?”

“저기 누워 있는 혜린이가 제 친군데요. 혜린이 살아 있는 거 아니에요? 숨 쉬고 있잖아요?”

간호사는 난감한 마음에 얼굴이 굳어버렸다. 입술이 쉽게 열리지 않아 우물쭈물 대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와줄 사람이 없을까 싶었지만 평소에는 그리 자주 찾아오던 레지던트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저, 저기 혜린이는 깊은 잠에 빠진 거야. 그런데 그 잠에서 일어날 수 없게 된 거란다.”

나름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설명을 했는데, 하필 단유였다.

“약을 쓰면 되잖아요? 병원에서 병을 고치기 위해 약을 쓰지 않나요? 저것도 병이라면 약을 써서 치료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눈이 부시면 눈을 감는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병이 있다면 치료하면 된다. 이 간단한 이치를 왜 모르지?

“저 병은 고칠 수 없는 병이야.”

불치병. 사실 뇌사를 불치병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고치지 못하니 불치병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다만 의학계에서는 병이 아닌 죽음으로 본다는 차이가 있겠다.

간호사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간호사의 등을 바라보던 단유가 몸을 돌렸다. 주영과 눈이 마주친 단유.

주영의 눈이 슬픈 이유를 알았다. 왜 살아있는 거라고 했었는지 이제 알았다. 살아있지만 죽었다. 혜린은 살아있지만 죽은 거였다.

단유는 고개를 돌렸다. 중환자실이 아닌 복도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혜린을 바라볼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서 있기가 힘들었다. 천지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오고, 무엇인가 뜨거운 콧김을 내 뿜으며 바로 등 뒤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나를 봐라.」

그렇게 명령하는 것 같았다. 결코 들어줄 수 없는 명령. 하지만 거역하기 힘든 명령이었다. 단유는 최선을 다해 돌아보지 않으려 애썼다.

“괜찮아?”

주영이 보고 있자니, 단유가 혜린에게서 고개를 돌린 뒤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다가가보니 식은땀을 흘리는데 비정상적이라 할 만큼 많은 땀을 흘려 순식간에 위에 입고 있는 티셔츠가 흠뻑 젖을 정도였다. 주영은 간호사를 불렀다.

그 사이 바닥으로 널부러지듯 쓰러지는 단유. 그리고 단유는 정신을 잃었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혜린의 아버지는 고개를 떨구고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의사는 매우 정중하고 간곡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장기이식을 통해 새 생명을 구할 수 있음을 알리고, 그것이 혜린의 숭고한 뜻을 이 세상에 남기는 좋은 방법이라는 말이 아버지의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당장 혜린의 어머니는 응급실에서 잠들어 있고, 자신도 간신히 끊어질 듯 말 듯한 이성의 끝을 붙잡고 버티는 중이었다.

세상 누구보다 소중하던 이를 이렇게 보낼 수 없었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아직, 살아 있잖아요.”

대부분 의사들은 이런 상황이 자신에게 오기를 바라지 않는다. 의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사망진단을 내릴 때라고 할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짓도 아니건만 사망진단을 내리는 순간만큼은 마치 자신이 환자를 죽이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렇게 뇌사환자의 경우에는 더욱 심했다. 거의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환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 한다. 여전히 따뜻한 환자의 손을 붙잡고 있는 보호자들에게 ‘죽음’을 이해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버님,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뇌사자는 언제 심정지가 올지 모른다. 그리고 심정지 이후 산소공급이 중단되면 장기에 손상이 오고, 그렇게 되면 장기 이식도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때문에 빠른 이식 절차가 요구된다.

“살아있다고! 살아 있잖아! 내 딸이!”

버럭 소리 지르는 아버지 앞에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 뜨거운 시선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는 의사였다.

“진정하세요, 아버님. 아버님이 원하실 때까지 연명치료를 계속 하도록 조치할게요.”

의사 뒤에서 다가오던 주영이 혜린의 아버지를 진정시켰다. 의사는 주영을 돌아보았다가, 주영의 눈짓에 허둥지둥 퇴장했다.

“···고맙습니다.”

남자는 끌어오르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뱉었다. 주영은 달리 대꾸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반장아이는요?”

아까 응급실에서 주영을 만났을 때, 반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아이에게도 충격이었던지, 중환자실 앞에서 쓰러졌다고 한다. 가여운 아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아이였다.

“괜찮대요. 지금은 잠시 잠 들었어요.”

“그 아이한테도 미안하네요.”

“전혀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 지금 누구보다 힘든 사람이 아버님이란 건 다들 알고 있으니까요. 조금 전 의사의 말도··· 그러려니 하세요. 그 사람이 결코 무정해서 그런 건 아닐 겁니다.”

“······.”

아버지는 깊은 숨을 토해냈다. 마른 입술 사이로 진득하고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

심연의 고지(故址)를 넘어 다다른 오지(奧地)

가지 꺾인 흔적 따라 다다른 미지의 세계

해거름을 눈에 담아 해오름을 반기리

보물을 훔친 공적(公賊)을 찾아 방랑하는 역적(逆賊)들이여

고집 꺾은 비적(匪賊)이 내리는 기적의 세례(洗禮)

보아라, 신의 유지(遺志)를 따르는 자여

들어라, 비탄의 고적(鼓笛) 소리를

홀로 남은 유적(遺跡)의 들판에서 무적(無籍)의 연자를 만나리

단유는 잠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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