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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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말을 마친 뒤, 병실에 잠시간 침묵이 맴돌았다. 링거액이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가습기 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단유의 시선이 그 방울에 맺힐 때, 재훈이 입을 열었다.
“니가 오기 전까지 난 네가 영재원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곳에 간다면 아마 네가 잃어버린 ‘재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재훈의 말에 단유는 궁금하다는 눈으로 물었다.
“영재원에 가면 꿈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요?”
“아니, 꿈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내 꿈이 뭐지, 내 목표가 뭐지 하며 찾고 다닐 시간에 수없이 많은 과제와 흥미로운 실험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니 말을 들으니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 아니 그러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단유는 가만히 뒷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학교생활을 누리도록 해. 다양한 공부를 하고 다양한 친구들과 대화를 하는 평범한 생활 말이야. 그리고 너무 한쪽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혹시 물리나 수학 말고 좋아하는 과목 있어?”
“다 조금씩 좋아하긴 하는데···.”
“다 좋아는 하지만 물리나 수학만큼 공부해 본적은 없지?”
“네.”
“이제부터는 다른 과목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도록 해봐. 그냥 좋아지지는 않겠지. 노력을 해야 할 거야. 대신 그 노력한 만큼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거야. 이건 일종의 슬럼프 같은 거거든.”
“슬럼프요?”
“간단히 이야기하면 의욕상실상태를 말하는 거야. 성과가 보이지 않으니 의욕이 생기지 않고, 의욕이 생기지 않으니 성과가 나오기 힘들지. 그게 반복되는 거야. 이럴 때는 너무 한 쪽에 몰입하는 것보다는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보는 것도 좋아.”
단유는 눈을 반짝였다. 재훈은 ‘재미’라는 부분에 중점을 두고 해준 충고였지만, 단유에게는 ‘마법’의 지지부진한 성과에 대한 충고로 들렸다.
“예전, 그러니까 고대에는 말이다. 음악도 수학이었어.”
“음악이요?”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 천문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수학이 이용되었다. 수학과 음악의 경우는 둘 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정신적인 측면에서 접근한다는 과정의 공통점이 있었지. 머릿속으로 암산을 하듯, 음표와 음률을 머릿속으로 그려내는 것처럼. 여러 가지 식을 동원하여 숫자를 계산해내듯, 현과 현 사이의 거리, 음과 음 사이의 간격을 숫자로 계산하거나 표현해내기도 했었어.”
단유는 새로운 이야기에 조금씩 흥미가 생겼다. 음악에 수학이라니!
“가령 피타고라스는 하프 연주를 하면서 가장 듣기 좋은 음이 나오는 법을 연구했다고 해. 그리고 현의 길이나 현을 치는 힘이 정수비례 관계라는 것을 밝히기도 했고.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한 옥타브는 1:2의 비를 이룬다고 했던가, 그럴 거야. 아무튼 그런 연구를 통해서 피타고라스 음률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이게 오늘 날 음정이라고 부르는 것의 기원이라고들 하지.”
“대단하네요. 그럼 다른 것도 그런가요?”
“미술도 마찬가지야. 어떤 그림들에는 다양한 기하학적 표현이 나오기도 하고, 정확한 계산 아래 수치에 맞게 물건이 배치되도록 그려진 그림도 있지. 물론 제일 대표적인 적용사례라면 ‘황금비율’이라는 건데. 뭐, 이건 사람마다 이견이 있어. 어쨌든 수학은 곳곳에 사용되고 있지. 그런 걸 찾아보는 것도 재미일 거야.”
“전혀 몰랐던 내용이네요.”
단유의 밝은 목소리에 재훈이 싱긋 웃었다.
“애초에 내 생각은, 니가 영재원에 갈 수 있게 뒤에서 지원해줄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영재원 정도야 중학교 입학 후에 가도 되니까. 지금은 부디 한 쪽의 지식보다, 넓고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는데 집중하도록 해. 지금은 그게 더 중요한 시기일 테니까. 어찌됐든 불균형한 지식 습득은 불균등한 발전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니 피해야 한다.”
“그럴게요. 고맙습니다.”
“말을 너무 많이 했나봐. 오늘은 이만 여기까지 하자. 힘드네.”
“저 때문에 쉴 시간이 많이 줄어든 거 아닌가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앞으로 1년은 이 상태로 쉬어야 하는데, 몇 십분 정도는 티도 안나.”
이후 사소한 이야기가 오간 뒤, 단유는 주영과 함께 병실을 나갔다. 재훈은 웃음으로 배웅한 뒤, 조용한 병실에 홀로 남게 되었다.
“변덕···일까?”
처음 만난 아이한테 자신의 옛 모습을 보았고, 불현 듯 솟아난 죄책감을 위로받고 싶어서 고집을 부렸다. 그러다가 단유가 혜린의 부모에게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고쳤다. 단유는 자신과 달랐다. 단유는···.
재훈은 눈을 감았다. 잠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들어야 겠다. 너무 많은 생각을 했더니 두통이 나는 것 같았다.
“누나.”
“응?”
“혹시 혜린이 보고 갈 수 있나요?”
주영은 잠시 단유의 청을 들어줘야 하나 고민했다. 들어줄 수 있을까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전화 한 통이면 되니까. 선배가 아끼는 아이라는 점도 있지만, 조금 전에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아이의 마음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주영은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연락을 했다.
“가자. 대신 중환자실 바깥에서 봐야 할 거야. 안에까지는 들어가기 힘들어.”
중환자실에 도착한 단유와 주영. 병원이란 건물 자체가 본래 그러하겠지만, 특히 중환자실 앞은 침울하고 답답한 느낌이 강했다. 몇몇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들락날락 거리지만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서로 이야기할 때도 들릴락 말락 할 정도로 소곤거리듯 이야기를 나눴고, 느릿한 발걸음도 묵직하기만 했다. 몇 몇 보호자들이 중환자실 근처에 있는 의자에서 대기하거나 혹은 복도 바깥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혜린의 부모도 그 중 하나였다.
“어? 반장 왔네? 어디 갔었다가 오는 거니?”
혜린의 어머니가 먼저 단유를 발견하고 인사했다. 1층에서 주영을 따라 간 뒤 바로 혜린을 보러가는 줄 알았던 두 사람이었다. 단유는 애써 변명하는 대신, 꾸벅 인사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중환자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혜린이 누워 있는 침상이 보이긴 했는데, 자세히 보이진 않았다. 그저 조그만 아이가 온갖 줄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만 보였다. 주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각종 기계들이 혜린을 둘러싸고 있었고, 검은 모니터에서는 의미를 알기 힘든 숫자와 그래프가 그려지고 있었다.
“원래 7시 반부터 면회가 가능한데, 지금 들어가도록 해주겠다네. 들어가 볼래? 들어가 보실래요?”
30분 일찍 들어가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이야기에 부모들이 반색하며 부탁을 했다. 그리하여 네 사람은 간호사의 인도에 따라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얼굴을 보자마자 입을 막았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전 남편의 팔에 의지해 겨우 서 있을 수 있었다. 반면 남자는 눈을 부릅뜬 채로 마치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서 딸의 모습을 지켜봤다.
‘저 아이가 그랬지. 빨리 낫기를 바란다고. 너도 노력하고 있을 거라고. 그래. 혜린아. 넌 강한 아이잖아? 금방 일어날 거지?’
아버지는 손을 내밀어 혜린의 손을 붙잡았다. 퉁퉁 부은 손을 매만지니 더욱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키운 딸이었는데···.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을 때, 다가와서 애교 부리던 딸. 함께 옷 사러 백화점에 갔을 때, 하얀 원피스를 입고 싶다며 조르던 딸의 모습. 가족여행으로 바닷가를 갔을 때, 모래사장에서 파도와 술래잡기를 하던 모습.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오로지 딸이 무사히 일어나기만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되뇌어야만 할 때였다. 그 기도가 하늘에 닿기를, 신이 있다면 신의 귀에 닿기를.
단유는 가만히 혜린을 지켜보았다. 낯설었다. 평소 보았던 혜린의 모습이 아니어서 낯설었고, 어쩐지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낯설음을 느꼈다.
“어때? 괜찮아?”
땀을 뚝뚝 흘리며 묻던 혜린에게 단유는 박수를 치며 말했다.
“내가 잘은 모르지만, 멋있었어. 너도 그렇고 다른 애들도 그렇고. 음악과 동작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거 같았어.”
“그치? 우리가 그걸 맞추려고 얼마나 연습했는데. 그치, 얘들아?”
뒤에서 주저앉아 쉬던 애들도 손을 흔들며 기뻐했다.
“그럼.”
“반장, 괜찮았어?”
“야, 반장은 거짓말 안하는 거 알잖아. 그치?”
단유는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 번 더 연습할까?”
“야, 혜린아! 좀 쉬자!”
“넌 안 힘들어?”
“힘들어도 이렇게 맞춰야 다른 반 애들 이기지. 나중에 장기자랑 때 다른 반 애들도 우릴 보고 멋있다고 할 거 아냐?”
“10분 만 쉬자. 나 다리에 힘 하나도 없어.”
아이들의 아우성에 혜린도 못 이긴 척 주저앉았다.
“그래, 쉬자 쉬어.”
단유는 그 때 혜린이란 아이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끝없는 열정과 욕심으로 불타오르던 아이. 확고한 신념과 목표가 선명했던 아이. 어딘가 흐리멍덩하기만 한 자신과 전혀 달랐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은 혜린의 모습이었다. 그 혜린이 지금은 꺼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촛불처럼 보였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사이에 주영이 단유의 어깨를 짚었다.
“시간 다 됐어. 나가야 돼.”
단유는 혜린의 부모에게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섰다.
주영의 차를 타고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오던 길. 주영이 넌지시 물었다.
“많이 친했어?”
“···아니요.”
뜻밖의 대답이라 주영이 힐끗 쳐다보았다.
“그럼, 왜 혜린을 보고 싶어 했어? 그냥 같은 반 아이라서? 아니면··· 좋아하던 아이?”
“아니요. 그냥 일어나라고 말해주고 싶어서요.”
주영은 입을 닫았다. 단유는 한결되게 말하고 있었다. 일어나라고. 그걸 또 잊었던 걸까? 왜 내가 그런 질문을 했지? 라며 스스로를 반성하는 주영이었다.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파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위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사람과 어떤 관계가 있고 없고를 떠나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정말 당연한 그 일에 다른 해석과 해명을 붙여 이해하려는 태도는 당연하지 않은 행동이다.
주영이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는 동안 단유도 생각에 잠겼다. 이 세상은 안전하지 않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수련회를 가기 전날부터 시작했던 고민은 결국 이런 식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안심하지 마라. 긴장 풀지 마라. 자신을 지킬 힘이 필요하다. 단유는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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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주영을 보며 재훈이 웃음으로 반겼다.
“왜 안 자고 있어요?”
“생각이 많아서 잠이 안 오네. 아니면 약의 부작용 때문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주영은 침대 옆 옷장에 가방을 넣어둔 뒤 재훈 옆으로 다가갔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요?”
“있어.”
“어디요?”
“머리.”
“왜요? 아파요? 어떻게 아파요?”
“생각이 많다고 했잖아.”
주영은 가볍게 재훈을 흘겨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애는 무사히 들어갔고?”
“내가 무사히 돌아온 거 보면 몰라요? 설마 어디 팔아먹었을까봐?”
“모르지. 질투가 많은 녀석이니까.”
주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설마 이 사람 날 갖고 노는 거야?
“혜린이라고 했던가.”
낮은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내뱉는 이름에 주영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몇 시간 전에 봤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때?”
“···안 좋대요.”
이미 주치의와 이야기를 나눴다. 도의적인 책임을 지기 위해 연성재단에서 치료비 전액을 부담하고 있었고, 주치의는 치료경과를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비용이 얼마든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달라고 해줘.”
“이미 이야기했어요.”
재훈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살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놓였었다. 수능을 포기했던 순간, 해외여행을 결심한 순간, 돌아와 의대를 지원한 순간, 그 모두가 치열한 선택의 결과였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수많은 선택이 있었고 매번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선택은 미련이 남았었고, 어떤 선택은 후회를 남겼다. 그리고 며칠 전의 선택은 죄책감을 남겼다. 아마 이대로 그 아이가 눈을 뜨지 못한다면, 평생을 죄책감과 싸우게 될지도 몰랐다.
주영은 재훈의 표정을 살핀 뒤, 화제를 돌렸다.
“단유라는 애,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응?”
“아까 그러셨잖아요? 영재원까지 지원해 줄 생각이었다고.”
“아. 일단은 그 아이가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도록 놔둘 생각이야. 그 이후에는 보육원에서 데리고 나오는 것도 고려중이고.”
“데리고 나온다고요? 어떻게?”
“뭐, 그거야 방법은 많지. 그건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지금 그 아이의 상태가 문제지.”
“슬럼프요?”
재훈은 답을 하지 않았다. 주영이 의아한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자 재훈이 뒤늦게 답을 했다.
“슬럼프도 문제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