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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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제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쉬셔야 할 것 같네요.”
재훈의 이야기에 할아버지도 그러마,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낫거라, 진심어린 당부를 남기고 연 회장은 병원을 떠났다. 연 회장이 나간 뒤, 주영이 도둑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병실로 들어왔다.
“뭘 그렇게 조심하고 그래?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냥 병실이 조용하면 심신 안정에도 좋을 테고, 그러면 선배도 빨리 나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 거죠.”
“말 잘하네. 말 하는 김에 이야기 해봐라. 사실 내가 기억이 다 안나. 어쩌다가 사고가 이렇게 났는지도 모르겠고. 다 알아봤을 거 아냐?”
주영은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조사한 바를 이야기했다.
“심하게 났구만. 용케도 살았네?”
“그런 말 마세요. 당시 구조대원들이 모두 놀랐었다니깐요. 차가 그렇게 망가졌는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살아있다고. 하늘이 도왔대요.”
“하늘이 도우면 사고가 안 났어야지.”
“또, 그런 말. 제발 말 좀 곱게 해요.”
“그건 됐고. 그래서?”
“예?”
“다른 사람들은?”
주영은 침을 삼키고 한 호흡을 쉰 뒤,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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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세단 안에 연 회장은 몸을 깊숙이 파묻은 자세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한 이사, 부탁 하나 하지.”
「예, 말씀하십시오.」
“우리 손주 해코지 한 놈, 확실히 처리하도록.”
「예. 회장님.」
연 회장은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비서에게 건넸다. 비서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어 품에 집어넣었다.
페라리를 운전하던 놈은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집안이 대단하다는 일설도 사실이었는지 응급조치 후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팔과 다리가 하나씩 부서졌고, 고관절부상에 복강내출혈도 있었지만, 워낙 뛰어난 의사가 집도한 탓인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게 되었다.
하지만 감히 상대가 연성그룹이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룹회장이 가장 아끼는 손자를 상대로 위험한 장난질을 쳤으니, 그 죄가 대수롭지 않을 리 없었다.
“지역 유지?”
회장이 혼잣말 하듯 넌지시 뱉은 말에 비서가 재깍 대답했다.
“예. 자산규모가 대략 1조원정도 되는 업체를 운영하고 있답니다.”
“구멍가게 하나 가지고 있는 주제에 건방을 떨었다는 거지? 자식교육도 못시키는 것들이 무슨 장사를 하겠다고···.”
비서는 가만히 앞을 바라보았다. 뿔이 난 회장의 말에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내심 동의하는 바였다. 고작(?) 그 정도로 가진 척을 하는 게 우습지도 않았다. 한 이사가 아니더라도 비서실장의 직급에서 충분히 제재를 취할 수 있겠지만, 이번에는 자기 몫이 아닌 것 같아 참았다. 한 이사라면 자기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진 않을 것이다.
사실 마음에 하나 걸리는 것은, 그간 사업에서 멀리 떨어진 쪽이라 생각해서 다소 소홀하게 대한 면이 있던 둘째 손자에 대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고 나니 앞으로 그룹 차원에서 의전이라든가 경호라든가 신경을 써야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 섣불리 제안하긴 힘들지만 조금 시일이 지난 뒤 별다른 지시 사항이 없을 경우에는 회장님에게 직접 건의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건의가 통한다면 자신에 대한 신뢰도 올라가지 않을까, 라는 개인적인 사심도 조금은 섞여 있었다.
****
“혜린아···.”
혜린의 어머니는 창 너머로 보이는 딸의 처참한 모습에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각종 호스와 기계장치가 딸의 몸 곳곳을 유린하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비단 어머니만의 감정은 아니었던 것이, 이제는 전 남편이 된 혜린의 아버지 역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뿐만이 아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입술만 짓뭉개고 있었다.
누구에게 이 분노를 투사해야 할지, 대상이 없었기에 더욱 화가 났다. 아이가 이 지경이 되도록 엄마라는 사람이 뭐했냐고, 화를 낼까? 사람이 다쳤는데 응급차도 부르지 않은 학교의 선생님들에게 화를 낼까? 도로에서 지키라는 속도도 지키지 않고 무리하게 내달린 운전자라는 사람에게 화를 내야 할까? 중앙선을 넘나들거나 차를 가로막는 등의 위협행위로 사고를 야기한 지역 유지의 아들이라는 놈에게 화를 낼까?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자신에게 화를 내야 할까?
눈에 핏발이 곤두서고, 꽉 깨문 어금니에 잇몸에서 피가 날 정도였지만 스스로는 알지 못했다. 주먹을 쥐었는데, 손을 너무 세게 쥐었던 탓인지, 손톱이 손바닥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지나가던 간호사가 목격했다.
“어머, 보호자님!”
간호사가 카트를 끌고 와 호들갑을 떨자, 그제야 자신의 손바닥에 상처가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힘을 풀고 손바닥을 펴서 간호사의 조치를 받았다. 옆에 서 있던 혜린의 어머니는 그 것을 보고 다시 가슴이 아팠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내 자식 아픈 것만 보고, 내 가슴 미어지는 것만 생각하다가, 아이 아버지가 얼마나 아프고 힘들어할 지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랑 헤어진 것이지, 아이랑 헤어진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헤어질 때도 아이 때문에 얼마나 많이 싸우고 고민했던가. 결국 아이 아버지가 져 주었던 것일 뿐인데, 당시 아이 아버지가 아이를 부탁하며 했던 말이 새삼 떠올랐다.
“나 대신 혜린이 잘 보살펴야 한다. 바빠서 끼니를 못 챙겨줬네, 돈이 없어 옷을 못 사줬네, 이런 이야기 나오면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야. 혜린이가 혹시라도 다치는 일 생기면 당신도 내 손에 똑같이 다칠 거야. 혜린이가 혹시라도 우는 일 생기면 당신도 울어야 할 거야. 우리 딸, 혜린이 아프게 하지도 말고, 다치게도 하지 말고, 슬프게도 하지 마라.”
꽤나 살벌한 부탁이었는데, 그 만큼 아이 아버지는 상당한 희생을 각오하고 양육을 포기했었다. 그런데 이 사단이 났고, 당연히 아버지 된 입장에서 보통 정신으로 버티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아무리 정신이 없었다지만―이 사람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제가 잘못했어요. 여보.”
울음이 말을 먹고, 눈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떨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우는데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전남편은 전부인을 가볍게 안았다.
“지금은, 그런 생각 하지 마라. 그냥··· 기도하자. 우리 혜린이 무사히 돌아와 달라고··· 기도하자.”
간호사는 손바닥에 가벼운 처치를 한 뒤, 자리를 피했다. 중환자실 앞은 언제나 이런 광경이었고,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둔해질 만도 하건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익숙해지지 않기 때문에 몸은 늘 힘들지만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다.
중환자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담당간호사는 몇 가지 기기들을 체크하고 난 뒤,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뇌부종이 심했던 탓에 얼굴이 많이 부어올랐지만, 꽤 예뻤을 얼굴이었다.
‘빨리 일어나서 엄마, 아빠 만나야지.’
속으로 아이의 쾌유를 바라며 간호사는 병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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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린이가 많이 다쳤대. 같이 갔던 아저씨도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대.”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단유 옆에 앉은 유림이 소곤대듯이 이야기했다. 첫날에는 자세한 사정을 아무도 몰랐지만, 하루가 지나니 어느새 소문이 나고 퍼져서―이미 SNS와 카페모임 등을 통해 어지간한 학부모들은 모두 이 사태를 알고 있었다―유림이나 몇몇 아이들의 귀에도 들어갈 정도가 되었다.
단유도 혜린이가 다쳤다는 이야기는 어제도 선생님께 들어 아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유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정해주었다.
“그냥 다친 게 아니고, 어쩌면 죽을 수도 있대.”
“심한 거야?”
“응. 우식비명이라는데?”
‘우식비명’이라는 병이 있나, 곰곰이 생각하던 단유는 ‘의식불명’을 일컫는 것임을 깨달았다.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나는 경우도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본인이 그런 케이스였으니. 다만 자신이 의식불명이었다는 자각이 없었으니, 그 상태가 얼마나 환자에게 치명적인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경우와 달리 혜린이는 ‘죽음’을 언급할 정도로 심하게 다쳤다고 유림이 설명했다. 어쩌면 의식불명이란 상태가 치명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가졌다.
그런데 그와 별개로 단유에게 놀라움을 준 이야기는 바로 ‘재훈’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남자 역시도 사고가 나서 입원을 했다니.
‘그래서 돌아오지 않았던 걸까?’
물론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확신 할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어쩐지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어쩔 수 없었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어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많이 다쳤다고 하니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친절을 보였던 남자가 마음을 완전히 돌려서 떠난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 만으로도 조금씩 자라나던 앙금이 사라졌다.
선생님도 아이들 사이에서 퍼지는 소문에 대해 들었다. 선생님은 굳은 얼굴로 엄한 유언비어가 퍼지지 않도록 당부했고, 대신 혜린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각자가 기도하고 편지를 써서 보내자는 내용으로 아이들의 동요를 다독였다.
“2주 뒤에 기말시험 있는 거 알죠? 혜린이를 위해 걱정하는 것도 좋지만 기말시험 준비하는 것도 학생으로서 중요한 일이니 준비 열심히 하도록 하세요. 알겠죠? 반장, 인사하고 마치자.”
하루 수업이 끝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선생님도 바쁘게 준비를 했다. 오늘은 1반 주임선생님과 함께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으로 병문안을 가기로 했다. 정확한 사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연성재단 명함을 줬던 여자의 힘으로 이송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따름이었다.
“선생님, 가시죠.”
어느새 주임 선생님이 교실로 찾아왔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급히 정리한 뒤 주임선생님 뒤를 쫓아갔다.
그 시간, 학교 밖에서 통학차를 기다리던 단유 앞에 고급 승용차가 나타났다. 승용차에서 내린 사람은 다른 아닌 주영이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갑자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을까, 궁금해 하는 단유와 달리 함께 서있던 철용과 명수는 연신 주영의 얼굴과 차를 훔쳐보기 바빴다. 주영이 단유에게 다가올 때, 자기들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던 두 사람이었다.
“누군지 알아?”
철용이 명수에게 물었다.
“아니요. 처음 봐요.”
명수는 함께 수련캠프에 있었음에도 주영과 재훈을 보지 못했다. 운동장에서 달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장기자랑 시간에 무대 보며 박수치기 바빴던 명수였다.
“가서 물어볼까?”
철용은 형으로서 단유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딱히 검은 정장차림의 여자가 단유에게 해코지를 할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가만히 두고 보는 중이었다.
그런 철용의 마음과 달리, 명수는 거침없이 단유에게 다가갔다. 철용이 급히 말리려 했지만 명수는 빠른 걸음으로 단유 옆에 붙었다.
“아줌마, 누구세요?”
주영이 난데없는 호칭에 놀라 돌아보았다. 단유보다 작은 키지만 다부진 몸을 가진 작은 눈매의 명수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넌 누구니?”
“명수요.”
“얘 친구니?”
“네. 아줌마는 누구신데요?”
이쯤에서 단유가 말렸다. 주영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아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사람이야.”
“니가? 어떻게?”
“수련회 때 왔었던 사람이야.”
“난 못 봤는데?”
명수를 설득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단유는 주영에게 사정을 물었다.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재훈 ‘형’이 널 보고 싶어 해서 ‘누나’가 데리러 온 거야. 재훈 ‘형’이 다친 건 들었어?”
묘한 악센트는 무시하고 단유는 물었다.
“많이 다치셨나요?”
“다치긴 했지만, 심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야. 적어도 너랑 이야기는 나눌 수 있을 정도야.”
사실 주영은 재훈을 말렸다. 굳이 이 아이를 불러들여서 이야기를 나눌 이유가 어디 있는가 말이다.
“지금 불러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나중에 그 아이를 볼 낯이 없을 것 같아서. 아마 오해할지도 몰라.”
아니 무슨 헤어진 연인들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만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던 아이의 마음을 그리 걱정하시고 계신가, 어이없는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재훈의 설득에 넘어가 단유를 찾아온 주영은 자길 바라보는 아이에게 물음을 던졌다.
“같이 가 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