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05화 (105/956)

아름다운 이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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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 연락하고, 이 선생 목부터 안정시켜.”

간호사가 가져온 목보호대를 앳딘 얼굴의 의사가 받아들 때, 다른 의사가 소리쳤다.

“소아신경외과도 연락했습니다.”

“와서 도와!”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달라붙어서 구급용 들것에서 베드로 옮겼다.

“하나, 둘, 셋에 옮겨. 하나, 둘, 셋!”

그리고 곧바로 촉진을 비롯해서 간이 검사가 진행되었다.

“이거 뇌척수액인가요?”

이마로 땀을 쏟아내고 있는 이 선생이 오른쪽 귀에서 하얀 이물질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육안으로 관찰했다.

“확인해 봐.”

이 선생이 확대경으로 귀를 확인하는 사이, 지시는 계속 떨어졌다.

“20% 만니톨 준비하고 산소는?”

“포화도(oxygen saturation) 92%예요.”

이 선생이 잇따라 보고했다.

“외이도에 피가 고여 있습니다.”

“턱과 가슴 오른쪽에 bruise 확인됩니다.”

다른 레지던트가 보고를 했다.

‘hepatorrhexis(간 파열)?’

교통사고가 났을 때 가장 다치기 쉬운 부분이 간과 비장이다. 일단 킵 해두고 동공반사를 확인했다.

“동공은 반응이 있네. Skull Fracture(두개골 골절)인가?”

함몰은 아닌 것 같지만, 일단 역시 킵. 정확한 진단은 사진을 찍어봐야 나올 것이다. 이 선생이 복부 촉진을 하다가 말했다.

“복부 반동도 의심스러운 데요?”

“어떤 데?”

“촉진 상 느낌이 없는데 복강내출혈이 심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침 옆에서 돕던 수간호사가 소리쳤다.

“pneumothorax(기흉)이요!”

“튜브 어딨어?”

재빨리 기관호흡용 튜브를 삽입하여 호흡을 도왔다. 이것저것 급히 필요한 조치들을 취한 뒤, 더벅머리 레지던트는 이 선생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선생은 빨리 CT, MRI 다 찍도록 해.”

이 선생과 간호사가 들러붙어서 베드를 밀고 나갔다. 그 때 옆 침상에 누워 있던 남자가 이 선생을 불렀다.

“선생님, 꼭 좀 살려주세요. 살려··· 주셔야 합니다.”

이 선생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CT실로 내달렸다.

****

사고현장은 뒤따라 온 주영과 담임선생님에 의해 발견되어 곧바로 119에 신고 되었다. 두 차가 모두 도랑과 논에 뒤집힌 채 박혀 있어 두 여자의 힘으로는 구조 활동이 불가능했다.

신고 후 5분이 지났을 무렵, 119가 도착했다. 곧 차 안의 사람들을 구출하여 시내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사고 현장으로부터 병원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6분.

만약 시속 200㎞로 달렸던 재훈이라면 5분도 채 안 걸릴 병원을 앞에 두고 사고가 난 셈이었다.

이후, 인평초등학교 학생들의 수련회는 급히 취소되어 모두 학교로 돌아갔다. 그리고 돌아온 다음 날을 임시휴교 처리하여 하루를 쉰 후, 그 다음 날 다시 학교로 등교하도록 조치되었다.

사고가 난 다음날, 지역 신문에서 두 외산 차량의 과속 레이스에 대해 짤막한 보도가 나갔다가, 오후에 정정보도와 함께 기사가 내려졌다.

인터넷 신문에서는 재벌가 3세와 지역 유지의 철없는 아들이 벌인 죽음의 레이스에 대해 보도를 했지만, 역시 몇 시간 후 기사가 삭제되었다. 1명이 죽고, 3명이 중상이라는 정도의 사고 보도가 단신으로 전국 뉴스에 게재되었고, 그 외 다른 사고관련 뉴스는 없었다.

****

“단유야, 혹시 뭐 들은 거 없어?”

유림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 단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단유 역시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어제 보육원에 있는 동안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좀처럼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사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몇몇 학부모들이 전말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아이들 앞에서 함구한 탓에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취소된 수련회와 돌아오지 않는 친구에 대한 호기심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런 경우 아이들은 반장을 찾아왔다.

그래봐야 단유로서도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다만 억측을 남발하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자제를 시켰다.

“아직 혜린이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니까 무사하길 바라는 게 좋을 거 같아.”

하지만 보통 때와 달리 단유의 말에는 확신이 없었다. 스스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혜린에 대한 걱정과 다르게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재훈에 대한 것이었다.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은데.’

처음으로 자신을 ‘이해’해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지금껏 단유를 도와주거나 가르침을 준 사람들은 많았다. 물론 모두 고맙고 감사하지만, 단유가 걱정하고 있는 것, 현재 느끼고 있는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이야기해준 사람은 재훈 뿐이었다. 물론 차를 가지고 나가는 것을 보면서 다시 안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단유는 역시나 돌아오지 않는 재훈에 대해 약간 원망하는 마음도 가졌다.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이들이 웅성대며 갖가지 시나리오를 작성해나가고 있을 때, 아침 조례를 위해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그 어느 때보다 낯빛이 어둡고 침중한 표정이었다.

“차렷.”

단유가 일어서자, 선생님은 손사래를 치며 인사를 거부하셨다. 단유가 자리에 앉자 선생님은 고개를 숙인 채로 교탁을 붙잡고 가만히 계셨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쑥덕대던 아이들도 입을 닫고 가만히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선생님이 고개를 들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혜린이는···.”

선생님은 목이 메어 제대로 이야기를 마칠 수 없었다.

****

“일단 고관절 부위 수술은 잘 됐습니다.”

굵은 뿔테안경을 쓴 노년의 의사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환자가 문제가 아니라 선생님이 문제이신 것 같아요. 후두염, 후두암 같은 병명을 떠올리고 있던 주영의 귀에 다시 노(老)의사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다른 부위에는 큰 부상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차가 좋았던 탓이겠죠. 주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트를 옆에 대기하고 있던 젊은 의사에게 건네고 고개를 돌렸다. 주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른 궁금한 점 있으십니까?”

“언제쯤 낫나요?”

뭐라고 떠들어도 알아듣지 못할 주영이었기에 핵심만 물었다.

“···천천히 호전될 것입니다만 아마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회진이 끝나고 의사들이 우르르 몰려 나간 뒤, 1인실에는 조용한 기계음만 간헐적으로 울렸다. 주영은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았다. 정말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블랙박스와 여러 경위를 통해 확인한 바, 재훈은 미친놈한테 제대로 걸렸다. 갑자기 앞을 가로막질 않나, 옆에서 주행을 방해하지 않나, 종국에는 미친 레이스를 펼쳐 결국 대형사고까지 나고 말았다. 죄인은 죗값을 치루면 된다지만, 애꿎은 피해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재훈이 천만다행이었던 점은, 그 사고의 순간에 작동된 차량 내부의 안전시스템 덕분이었다. 에어백은 물론이고, 차량이 중심을 잃고 부딪치는 순간에도 각종 전자제어시스템이 차량을 컨트롤 한데다 차체의 튼튼한 구조가 운전자와 동승자를 안전하게 지켜주었다고 한다. 다만 이 사고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10살짜리 소녀였다.

만약 앉은 상태였다면, 안전벨트의 효용이 컸을 텐데, 사고 당시 누운 자세로 있었다는 점, 작은 체구의 소녀를 커버하기엔 안전벨트로는 무리였다는 점 등이었다.

주연은 잠든 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병실을 나갔다.

****

혜린의 어머니는 새벽에 전화를 받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핸드폰을 떨어뜨렸다가 간신히 수습해서 통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혜, 혜린이 많이 다쳤어요?”

울음부터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물었다.

“어디예요, 거기 병원 어디냐고요!”

손에 잡히는 걸 아무나 들고 집을 뛰쳐나왔다. 양말을 제대로 신었는지, 옷을 제대로 입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계단으로 뛰어가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온갖 생각이 밀려들었다. 겁이 났다. 그리고 이 순간 괜히 이혼한 남편이 생각났다.

“여보···.”

덜덜 떨다가 핸드폰을 눌렀다. 혼자서는 도저히 가기 힘들었다. 새벽이라 전화를 잘 받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모두 잠든 야심한 시간에 이혼한 전처에게 온 전화를 아무렇지 않게 받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남편도 연신 울리는 불길한 벨소리를 무시할 수는 없었나보다.

“여보세요.”

전남편의 소리가 들리자,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하염없이 울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혜린이가, 혜린이···.”

“무슨 소리야! 말을 똑바로 해! 혜린이가 왜!”

야밤에 우는 목소리로 딸의 이름을 되뇌는 전처의 목소리에 남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사, 사고가···.”

“지금 어디야? 나 그리로 갈게. 당신 거기 그대로 있어.”

30분 후, 전남편이 몰고 온 차가 괴성을 내지르며 혜린 어머니의 아파트 앞으로 도착했고, 둘은 다시 병원으로 이동했다.

****

“정신이 들어요?”

재훈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그를 반긴 것은 늙은 할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정신이 드느냐?”

“할아버지···.”

그리고 시선을 돌려 가장 먼저 목소리를 냈던 주인공의 얼굴을 찾았다. 할아버지의 왼편에 서 있던 주영이 재훈을 바라보며 처연한 웃음을 지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

“당연히··· 다 불편하죠.”

물어 뭐합니까, 라고 냉소적인 답을 할 뻔했지만 기력이 쇠한 탓인지 생각했던 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라고 하더구나. ···녀석아. 이야기는 이 팀장한테 들었다만 무모했어.”

“무모하다뇨?”

“도대체 그 아이가 뭐길래 거기서 그렇게 무리를 했냐는 말이다.”

재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할아버지가 자신을 아껴서 하는 이야기란 것은 이해했지만, 그래도 가끔씩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뉘앙스로 이야기할 때면 반발심이 생겼다.

“그냥 그 아이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구급차를 불렀어도 될 일이었다.”

그래, 차라리 구급차를 부를 걸. 그날따라 생전 부리지도 않던 생떼도 부리고 오지랖도 부렸다. 그 아이를 만난 탓이었을까?

“저기··· 그 애는 어떻게 됐어?”

주영은 입을 꾹 다물고 재훈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이런 사람 인줄은 몰랐다. 이 상황에서도 그 여자아이를 걱정하는 모습이라니. 자기 주위의 그 많은 사람들을 두고도 정 한번 주지 않던 사람이, 오만하기로는 자기 할아버지 못지않던 사람이 갑자기 웬 소년에게 진지한 충고를 해주질 않나, 구급차를 못 기다린다면서 응급 후송을 하겠다고 달려들기까지 했으니.

“일단 안정을 취하세요. 그 아이는 괜찮아요.”

괜찮지 않지만, 괜한 뒷말을 꺼내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무슨 말을 해도 부스럼을 내는 이야기밖에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영아.”

“네?”

“잠깐 나가있지 않겠느냐?”

주영은 연 회장에게 고개를 숙이고 병실을 나갔다. 그녀가 나간 사이 연 회장은 손자를 바라보다 손자의 손을 덮으며 입을 열었다.

“재훈아. 넌 니가 얼마나 나한테 귀한 사람인지 모르는 것 같구나. 비록 너희 아버지, 너희 형이 있어 사업체를 네게 물려주지 못한다 해도 그건 니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집안의 분란이 생기면, 그건 그것대로 모두가 불행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래서 대신 내 가기 전에 너에게 병원이라도 하나 주려고 생각했던 거야. 그걸로도 충분히 넌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연 회장은 손자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할애빈 널 누구보다 아낀다. 넌 어렸을 때의 나를 보는 것 같거든. 너의 총명함과 영특함은 아마 너희 형도 따라잡지 못할 거야. 그러니 말이다. 넌 니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지를 알아야 한다. 넌 다른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이야.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걸 부디 자각하길 바란다.”

너 위에는 오직 나만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연 회장은 말을 마쳤다. 차라리 큰 아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면 좋으련만. 지금 자신의 뒤를 잇는 둘째 아들은 고집이 강했고, 욕심이 많았다. 큰 형과 치열한 법적분쟁도 불사했고, 마침내 이겼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다시 자신의 장남에게 승계하기 위해 법적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여기서 연 회장이 괜한 욕심을 부리면 그룹 전체가 쪼개질 위험이 있었다. 연 회장은 아들의 야심을 이기지 못했고, 다만 막내 손자에게 자신의 남은 영향력을 다 쏟아 부어 주고 싶었다.

재훈은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맑은 정신이었다면 평소처럼 ‘훗’하고 웃어주었을 텐데, 지금은 웃지도 못하고 그저 늙으신 할아버지의 엇나간 고집을 묵묵히 받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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