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03화 (103/956)

스피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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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선생님을 따라간 뒤, 주영은 재훈에게 다가갔다.

“가시죠.”

그 말에 재훈은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아니 무슨 울산바위도 아니고, 여기에 자리 잡을 생각인가?

“안 갈 거예요?”

재훈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저 혼자 가요?”

어차피 각자 차를 끌고 온 마당에, 가려면 혼자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가만 있어봐. 어쩐지 꽤 쉬운 답일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난단 말이지.”

“무슨 소리에요?”

“달걀을 세우는 방법 말이야.”

“콜럼버스? 그거야···.”

“그렇게 간단한 거였으면 내가 고민을 하겠니? 달걀을 깨지 않고 세우는 방법 말이야. 아, 너 답 알아도 말하지 마. 내가 알아낼 테니까.”

주영은 가슴을 쳤다. 산속이라 그런지 빨리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올라오는 길도 좁던데, 자칫했다간 밤이 되어서야 이 곳을 빠져나가는 불상사가 생길 것 같았다.

“주영아.”

“네.”

“가서 밥 좀 얻어먹을까?”

“선배. 전 도저히 이해가 안가네요? 왜 그러시는 거죠? 쟤랑 뭐 있어요?”

“지금 한 말, 잘못 들으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발언이었어.”

“농담하지 마시고요.”

재훈은 아이의 눈빛을 떠올려 보았다. 어린 시절, 자신도 저런 눈빛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재미없던 시절의 자신을 닮은 아이를 보니, 어쩐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도와준다? 아니 그냥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해야 하겠다. 단유라는 아이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자신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

****

“단유야, 저 아저씨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선생님이 넌지시 물었다. 연성그룹에서 나온 사람이라고 보기엔 헤어스타일이 너무 경박하긴 했지만, 팀장이란 사람이 꼬박꼬박 ‘선배’라고 존칭을 쓰는 것을 보면 무시하기 힘든 직책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는 굳이 감출 것도 없었기에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했다.

“고작 그게 다야?”

“예.”

선생님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인데, 하물며 단유라고 뭘 알겠는가. 그냥 변덕이 생겨서 몇 마디 말을 붙였을 따름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아이들은 다시 운동장으로 모였다. 레크레이션이 시작될 무렵, 단유는 선생님의 부름을 받아 대열에서 이탈했다.

“단유라고 했지? 선생님한테 허락을 받긴 했는데, 아까 그 아저씨가 답이 너무 궁금하다고 하셔서 말이야. 직접 가서 이야기 해주겠니?”

선생님 곁에 서 있던 주영이 웃으며 물었다. 그에 단유가 교문 쪽을 바라보니 재훈이라는 사람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턱을 괴고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선생님께 허락을 구한 단유는 다시 재훈에게로 갔다. 명함의 힘이 그리도 대단했지만, 단유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답이 뭐니?”

“질문부터요. 왜 기다리신 거예요?”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으니까. 답이 뭐야?”

“그냥 물어보세요.”

“답부터.”

“그냥 돌리면 돼요.”

“아!”

팽이와 같은 원리였다.

“물어보세요.”

“넌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

단유는 말문이 막혔다.

****

레크레이션은 어떤 강사가 어떻게 진행하느냐에 집중도가 갈리기 마련이다. 어떤 강사는 마이크만 잡아도 아이들이 모두 몰입을 해서 일사분란하게 지시에 따르는가 하면, 어떤 강사는 백날 떠들어도 난장판이 되기 일쑤였다.

“모두 일어나서 기타반주에 맞춰 춤추다가 노래를 멈추면 다들 멈추는 거예요. 아셨죠?”

그런 점에서 이번 수련회에 초빙된 레크레이션 강사는 중간은 하는 인물이었다. 흔한 레퍼토리를 그대로 붙여 넣은 것 같은 진행이었지만 식상해하는 것은 선생님들뿐이었고, 대부분 아이들은 왁자지껄 떠드는 가운데에서도 강사의 지시에 맞춰 춤을 췄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거나, 지는 사람은 앞 사람 업어주기 같은 벌칙에도 아이들은 열광했다.

몇몇 아이들이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부모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불안 증세―주위를 계속 살피며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거나,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리는 행위―를 보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4학년 쯤 되면 부모에 대한 의존증세가 많이 약해지고 대신 또래 집단과의 관계형성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러 부모를 찾는 아이들의 경우에는 선생님들이 데리고 나와서 천천히 상황을 설명하거나 설득을 해서 함께 레크레이션을 즐길 수 있게 지도하였다.

“자, 앞사람 어깨 주물러주고~. 돌아서서~. 뒷사람 어깨도 주물러주고~. 안마를 하랬지, 때리라곤 안했다.”

그렇게 어수선하고 떠들썩한 레크레이션 시간에 다른 이유로 즐기지 못하고 긴장한 아이가 있었다. 혜린은 시간이 다가올수록 몸이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에서 안무순서도 뒤죽박죽이 되는 느낌이었고 괜히 혀가 마르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평소에 워낙 조용한 성격이었던 탓에 아이들이나 선생님은 혜린의 이상증상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단유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은발의 사내, 재훈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재훈은 대뜸 사과했다. 꿈이 뭐냐고 물었다가 다시 사과부터 하는 재훈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껌뻑거리니,

“내가 어릴 때 제일 듣기 싫은 말이었는데, 어른이 되면 어쩔 수 없나보다.”

라고 변명을 했다. 재훈은 단유를 자기 앞에 앉혀 놓고 천천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표정을 보니 꿈이 뭐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나보네. 나도 그랬거든. 넌 꿈이 뭐니. 넌 뭐가 되고 싶니. 이런 거. 자랑 같지만 난 어릴 때 공부를 잘했던 편이었어. 그런데 사람들은 꼭 물어봐. 넌 뭐가 되고 싶냐고. 그런데 난 뭐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했던 게 아니었거든. 그냥 공부가 재미있어서, 책 읽는 게 좋아서 했던 건데 사람들은 마치 어떤 의도가 담긴 행동인 것처럼 받아들이더란 말이지. 덕분에 난 꿈과 목표를 정해야 했어. 꿈이나 목표가 없으면 잘못된 것 같고, 내가 잘못된 사람 같다고 여기게 됐거든. 그런데 방금 니 표정이 그렇더라. 꿈이 없어서, 목표가 없어서 잘못된 건 아닌가 자책하는 표정. 만약 내가 잘못 본 거라면 사과할게.”

단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훈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고개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야. 그게 굉장히 스트레스였어. 그런데 사실 어린 아이가 뭘 알까? 넌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직업과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는지 아니? 난 지금도 가끔씩 놀라. 이런 일도 있구나. 저런 직업도 있구나. 호기심이 가는 것도 있고, 해보고 싶은 것도 있어. 지금 내 나이에도 그런데, 니 나이 때 그걸 정한다? 말이 안 되는 거야.”

“······.”

“말이 너무 길었지? 그냥 내 생각엔 그래. 지금 정하려고 하지 마. 그냥 니가 좋아하는 걸 계속 해. 하다보면 찾게 될 거야. 억지로 니 꿈을 목표를 정하려고 하지 마. 억지로 하려고 하면 재미있는 것도 재미없어지니까.”

재훈은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어렸을 때 듣고 싶었던 말. 만약 그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겠다. 지금보다 행복해졌을 수도 있고, 더 불행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자신이 겪었던 스트레스와 슬픔, 좌절은 여전히 트라우마처럼 남아 자신을 괴롭히는 악몽처럼 따라 붙고 있었다.

적어도 이 아이는 자신이 겪었던 상처와 좌절의 시간을 걷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와!”

아이들의 함성소리가 크게 들렸다. 바라보니 무대에서 장기자랑이 시작되고 있었다.

단유도 돌아보았다. 연예인이 꿈이었던 아이들. 춤과 노래에 열정적으로 빠져있던 친구들. 자신은 그런 아이들과 비교해 너무 초라하고 한심했었다. 꿈도 목표도 없는 사람.

그런데 낯선 이 아저씨가 그게 잘못이 아니란다. 꿈과 목표를 억지로 정할 필요가 없단다. 돌이켜보니 기웅이나 윤정도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 때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고 마음에 와 닿지도 않는 이야기였는데, 지금은 너무 절절하게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람 때문인지 가슴이 터질 정도로 시원한 느낌이었다.

3반의 장기자랑 시간이 끝나고 박수갈채와 환호가 이어졌다. 그 가운데 4반의 장기자랑, 댄스를 선보일 13명의 아이들이 무대 위로 올랐다. 각자 조금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다들 힘내자는 의미로 파이팅을 외쳤다. 하지만 혜린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대조명에 반사된 아이들의 얼굴이 운동장에 퍼져 있는데, 마치 검은 바다에 사람의 표정만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침을 꿀꺽 삼켰다.

“혜린아. 힘 내.”

마주선 친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개를 살짝 끄덕였지만 자신이 고개를 끄덕였는지도 모를 정신으로 서 있는 혜린이었다.

이윽고 음악이 나왔다.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정박자에 맞춰 안무를 시작하지 못한 혜린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의 연습이 무색하지 않게 금세 음악에 맞춰 춤을 맞출 수 있었다.

“와!”

혜린의 긴장과는 달리, 팔 다리가 긴 혜린의 현란한 춤사위는 아이들의 시선을 뺏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음악과 하나가 되는 듯한 동작을 보이더니, 말미에 가서는 대열의 선두에서 가장 빛나는 댄서로서의 면모를 가감 없이 선보였다. 그와 함께 아이들의 환호성도 커져만 갔다.

혜린은 춤을 출수록 몸이 풀리고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긴장으로 굳었던 몸도 오랫동안 스트레칭으로 단련된 유연한 몸으로 돌아와 무리 없이 어려운 동작들도 해낼 수 있었다.

아이들의 환호성도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음악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자신의 몸도 자각이 되었다. 모든 통제권이 돌아오니 혜린은 신이 났다. 조금 더 동작을 크게 할수록 아이들의 환호와 박수가 커졌다. 발을 높이 뻗고, 팔을 크게 휘두르며 춤을 췄다. 오롯이 음악과 하나가 되는 기분이었다.

선생님들은 혜린을 보며 속닥거렸다.

“쟤는 정말 잘 추네요?”

“연습을 할 때도 보통이 아니었어요. 다른 아이들보다 배는 열심히 하던걸요.”

“이야, 저런 애가 가수가 되면 난리 나겠는데요? 얼굴도 예쁘고 말이죠.”

4반 선생님은 괜히 어깨가 으쓱거렸다. 우리 반 아이가 이 정도랍니다.

단유는 혜린을 보며 잠시 자신의 고민을 잊었다. 틈틈이 봤던 혜린은 그야말로 연습벌레였다. 자신이 책을 읽는 시간만큼이나 집중해서 춤 연습에 몰입하는 것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그 연습이 오늘의 무대를 빛나게 하고 있는 것이리라.

혜린은 신이 났다. 몸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고,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동작은 무리 없이 보여줄 수 있었다. 노래는 끝나기 직전. 그리고 남은 회심의 동작. 혜린은 약간의 발구름 뒤 앞으로 텀블링을 시도했다. 너무나 가벼운 몸은 깃털처럼 공중을 돌았고, 곧 두 발이 무대 끝자락에 무사히 안착했다. 어느 때보다 더 큰 아이들의 환호가 뒤따랐다.

그때였다. 발이 바닥에 착지했음에도 몸이 앞으로 살짝 기운 것은 아주 약간의 실수였다.

―아악!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무대를 보고 있던 선생님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혜린이 무대 밑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본 담임선생님이 서둘러 아이들을 헤치고 나갔다.

단유 역시 벌떡 일어나 비명과 소란의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주영도 갑작스러운 사고를 목격하고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서 있는 가운데, 재훈이 단유를 앞질러 떨어진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선생님과 거의 동시에 도착한 재훈은 선생님을 말렸다.

“손대지 마세요. 위험할 수 있어요.”

엄중한 재훈의 한 마디에 선생님은 멈칫했다. 그 사이 재훈은 조심스럽게 혜린을 바르게 돌려 눕혔다. 혜린은 정신을 잃은 채였다. 이마가 살짝 찢어진 것 같지만 다른 부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는 외상보다 보이지 않는 내상이 더 위험한 법이었다.

“선생님? 119는요?”

다른 선생님이 와서 4반 담임의 정신을 깨웠다. 그제야 4반 담임이 핸드폰을 꺼낸다고 허둥지둥 댔다.

“늦어요. 여기서 병원까지 30분이 걸렸어요.”

혜린을 살피던 재훈이 한 마디 했다.

“부목 댈만한 걸 가져다주세요. 제 차로 가면 부르는 것보다 빨리 갈 수 있을 거예요.”

응급조치를 취한 뒤, 재훈은 자신의 차를 운동장 안에까지 몰고 와 혜린을 조수석에 태울 수 있었다. 좌석을 최대한 눕혀 혜린의 몸에 부담이 덜 가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주영아. 나 먼저 갈 테니까, 선생님이랑 같이 니 차로 오도록 해. 병원 어딘지 알지?”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던 듯, 재훈은 서둘러 차에 시동을 걸어 학교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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