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5)
-------------- 102/952 --------------
단유는 낯선 사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머리카락이 은발인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이가 몇일까?
“혹시 애들이 따돌리니?”
“선배, 무슨 그런 말을 해요?”
듣는 애 상처받을 말을 대놓고 하는 게 민망할 지경이었다. 주영이 재훈의 팔을 잡아 끄는데, 재훈은 낚싯대 드리운 강태공처럼 쉽사리 자리를 옮기려 하지 않았다.
“아니, 저렇게 선생님들도 계신대 애가 이렇게 떨어져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아?”
머뭇거리던 주영이 머리를 굴려 답을 내놓았다.
“다쳤을 수도 있잖아?”
저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다보면 넘어지는 아이도 있고, 다치는 아이도 있으리라. 물론 눈앞의 꼬마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재훈이 아이를 응시했다. 그러나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단유가 대답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재훈이 낯선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유로 접근했는지도 모르겠고, 자기들끼리는 쑥덕인다고 소곤대는데 그게 다 들렸다. 자기 마음대로 오해하는 내용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굳이 그걸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낯선 이의 질문에 대답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했다.
“가자, 선배. 왜 그래? 갑자기? 왜 어울리지 않게 고집이야?”
“아니, 별 건 아니고 괜히 사람 차별하는 거 같잖아. 얘도 지네들이랑 같이 왔을 텐데 왜 애를 이렇게 방치 하냐 이거지, 난.”
평소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오지랖을 부리니, 주영은 난감하기만 했다.
“안 되겠다. 니네 선생님 어디 있어? 내가 좀 물어봐야겠다.”
“···뭘요?”
단유는 이대로는 일이 커지겠다 싶어서 입을 열었다. 이 사람도 어쩌면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 대답하네?”
“뭘 물어보시겠다는 거죠?”
“당연히 널 왜 이렇게 따로 빼고 자기들끼리만 놀고 있는 건지를 물어보려고 하는 거지.”
“선생님이 절 따로 떼어 놓았다는 건가요? 저 아이들로부터?”
재훈은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방금 아이의 답변에서 어쩐지 묘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가만 바라보니 아이의 얼굴에 딱히 흠을 잡을만한 표정이 없었다. 화를 내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마치 뉴스 앵커 같은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기심일까? 재훈은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을 마주했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아이의 눈은 크고 맑다는 느낌이었다. 청명한 저녁 노을빛 서린 눈동자였다.
“처음에도 물었지만, 혹시 애들이 널 따돌리니?”
“오해하신 것 같네요. 친구들은 절 따돌리지 않아요.”
“그럼 왜 혼자 여기 있어? 다른 친구들은 모두 운동장에 있는데?”
“재미가 없어서요.”
“뭐?”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뒤에 서 있던 주영마저 풋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어린 애가 벌써 허세가 있다고 여겼다. 재훈의 옆에 같이 쭈그리고 앉은 주영이 질문을 던졌다.
“저 애들이랑 같이 어울리는 게 재미가 없어? 니가 쟤네들 따돌리는 거야?”
“역시 오해를 하신 것 같네요. 전 저 아이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지 않아요. 따돌리지도 않고요.”
“그럼?”
“말 그대로예요. 문제를 풀고 다른 모둠의 아이를 잡는 놀이가 재미없다는 거예요.”
그래, 뭐 각자의 개성이 있고, 각자의 취미나 기호는 다를 수 있으니까 저 아이들이 모두 즐겁더라도 한 명 쯤은 싫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이의 말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어쩐지 재훈은 물어보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뭐가 재미가 없는 거야?”
아이의 눈에 비친 나른한 감정? 혹은 무료함? 낯설지 않은 눈빛 같아서 물어보고 싶었다.
단유는 왜 계속 이 문답을 계속 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머리가 하얗다는 것 외에는 이 사람에 대해 평가할 게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단유는 조금 색다른 선택을 시도했다.
“왜 저만 대답해야 하죠?”
응? 재훈과 주영은 의외에 대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교문에 들어서며 봤던 현수막을 떠올리면, 분명 이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일 것이다.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초딩에게서 나올 대답은 아니라고 여겼기에 놀라움이 컸다.
“번갈아 가면서 대답하는 게 어때요?”
단유는 언젠가 책에서 한 번 본 기억이 있어, 한 번 써먹어보고 싶었다. 이런 식이라면 일방적인 질문을 듣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은발머리 외에 또 다른 특이점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재훈은 피식 웃으며 단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 그럼 누가 먼저 질문할까?”
흥이 돋은 재훈은 싱글 웃으며 물었다.
“당연히 제가 먼저 해야죠. 지금까지 저만 대답했으니까요.”
“그럴래? 그래, 그럼 물어봐.”
“그 머리는 원래 그 색인가요?”
“아니, 염색.”
아, 염색으로도 저런 색깔을 만들 수 있구나. 지금까지 갈색 아니면, 붉은 색 계열의 색으로 염색한 사람들만 봐서 그렇게 밖에는 염색을 못하는 줄 알았다.
“왜 재미가 없다고 생각해?”
단유는 바닥에 선을 찍찍 그었다. 가로 2줄, 세로 2줄 그어 9개의 칸을 만들었다.
“마방진을 푸는 문제가 있어요.”
단유는 막힘없이 숫자를 써내려갔다.
“가로, 세로, 대각선 수의 합이 모두 같아야 하죠.”
쓰고 지우고 쓰고 지웠다.
“이건 계산할 거리도 되지 않아요. 너무 쉬우니까 재미가 없는 거예요.”
눈앞에서 10가지 이상의 다른 숫자가 들어간 마방진이 만들어지고 지워졌다. 주영이 놀란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다 재훈을 바라보았다. 재훈도 바닥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아이가 숫자를 써 넣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순식간에 여러 다른 형태의 마방진을 만들어내는 아이라니?
“수학을 좋아하는구나?”
“제가 질문할 차례지만 간단한 질문이니까 대답할게요. 좋아해요.”
단유는 발을 쓱쓱 문대어 마방진을 지웠다.
“여긴 왜 오셨어요?”
재훈은 바닥으로 향해있던 시선을 들어 아이를 바라보았다.
“잃어버린 물건 찾으러. ···단지 문제를 푸는 게 재미없는 거야? 아니면 다른 재미없다고 여길 만한 게 있는 거야?”
“질문이 재밌네요. 있어요.”
두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하면서 대답하라는 꼼수라니.
“어떤 물건인가요?”
“태블릿. ···어떤 게 또 재미없었어?”
“뛰어다니는 거요. 이름이 뭐예요?”
“응?”
조금 즉흥적인 질문이긴 했다.
“연재훈. 왜 물은 거야?”
“그냥요. 직업이 뭐예요?”
“잠깐, 그냥이라는 답은 너무 성의 없지 않니?”
“그런가요? 사실은 매번 이름을 묻는 질문을 받기만 해서요. 한번쯤은 먼저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름을 묻는 사람의 의도나 생각이 궁금하기도 했고요.”
“어떤 느낌이었는데?”
“별로, 아무런 느낌이 없는데요.”
재훈은 가만히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너 지금도 별로 재미가 없구나.”
“네. 이렇게 하면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별로 재미가 없네요.”
재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영이 덩달아 일어서면서 물었다.
“왜 일어나세요?”
“이 아이, 지금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서.”
“네?”
“그냥 가자. 쟤도 혼자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네.”
단유는 순순히 대답했다. 돌아서던 재훈은 멈춰 섰다. 그렇게 있기를 잠시.
“주영아.”
“예.”
“아까 그 박 과장이란 사람이나··· 아무튼 아무나 찾아서 태블릿 찾아서 와.”
“···선배는?”
“여기서 기다릴게.”
재훈은 다시 아이 앞에 앉았다. 단유는 의아한 눈빛으로 재훈을 바라보았다.
“아까 하던 거 계속하자.”
“하나씩 질문하기요?”
“그래.”
****
운동장에서 놀이가 한참일 때, 일부의 이벤트 회사 직원들은 운동장 한편에 아시바를 쌓아서 소형 무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후에 사용될 레크레이션과 장기자랑을 선보일 무대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 일을 지휘하고 있던 박 과장을 찾아온 주영은 잃어버렸던 물건을 받았다.
“교실에 떨어뜨리셨나 봅니다. 아이들이 주웠다는데 그 때 이미 액정이 깨졌다고 하더라고요. 암호가 걸려서 아이들이 가지고 놀지는 않았겠지만 혹시 모르니 확인해 보세요.”
주영은 간단히 내용을 살폈지만 별 다른 문제는 없었다. 다만 액정이 깨진 게 눈에 거슬려, 차후에 다른 새 제품으로 바꿔야 할 것 같긴 했다.
“손은 어떠세요?”
깁스한 손을 보며 박 과장이 물었다. 자기들 잘못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도의적으로 미안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 괜찮아요. 1주일 뒤에는 깁스 풀어도 된다고 했어요.”
완치는 2주라지만 굳이 거기까지 세세히 밝힐 필요는 없지 않나 싶었다. 쾌차하길 바란다는 인사를 받고 주영은 돌아섰다. 물건도 찾았으니 빨리 서울로 돌아가야 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재훈에게로 돌아갔더니 두 사람은 가까이 붙어 앉아 쑥덕대고 있었다. 은발의 덩치와 초딩이라니. 삼촌과 조카?
“누구세요?”
뒤돌아보니 여선생님으로 추측되는 분이 서 있었다. 주영은 오전에 이곳에 들렀다가 태블릿을 떨어뜨리고 갔었는데 되찾으러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거 우리 반 애들이 주웠어요. 짐을 정리하다 교실에 떨어져 있던 걸 주웠다고 하더라고요. 거기 액정에 금 간 건 주울 때부터 그랬다는데······.”
혹시라도 물품 파손으로 아이들을 해코지 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기색이 보이는 선생님에게 주영은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선생님은 이내 고개를 돌려 재훈과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에게로 다가가려 했다.
“저기···.”
주영이 선생을 붙잡았다. 선생님이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자, 주영이 물었다.
“혹시 저 아이 담임선생님 되시나요?”
“예.”
“실례가 안 된다면 저 아이, 왜 저기 혼자 있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선생님은 머뭇대다가 왜 물어보냐고 되물었다. 주영이 아이와 나눴던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선생님이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실은 저 아이가 저희 반 반장인데요.”
로 시작한 이야기는 저 아이가 얼마나 똑똑하고 특별한 아이인지부터해서, 선생님이 ‘어쩔 수 없이’ 놀이에서 빼야만 했던 사정을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저희가 이제 곧 저녁식사 시간이라서요. 그런데 누구신지 여쭤보질 않았네요.”
참 빨리도 물어본다. 물론 주영도 아차,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담임선생님의 느슨한 태도도 그리 눈에 좋게 들어오진 않았다. 주영은 명함을 꺼내 보여주었다.
“연성그룹에서 사업차 나온 거였습니다.”
연성재단 기획팀 3팀장 이주영이라고 적힌 명함이었다.
****
“룰을 조금 바꾸자. 서로에게 문제를 하나씩 내는 거야. 그리고 시간 내에 문제를 맞히지 못하면 그 시간에 질문을 하나씩 하는 거지. 질문은 상대가 답을 맞히는 순간까지는 계속 할 수 있어.”
“저 놀이의 변형이네요.”
“그래. 대신 문제를 내거나 질문할 땐 빠르게. 스피디하게 하는 거야. 순발력이 필요하지. 해 보겠니?”
“제가 불리한 거 아닌가요?”
당연히 재훈이 단유보다 배운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을 테니 이 게임이 재훈에게 유리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나는 10초 내로 풀지 못하면 벌칙, 넌 30초 내로 풀지 못하면 벌칙. 오케이?”
단유가 받아들이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간단한 것부터 해볼까? 4학년이 어디까지 아는지 모르겠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 되서 말이야.”
헤픈 웃음을 실실 짓던 재훈이 문제를 먼저 냈다.
“1부터 100까지 모두 더하면 얼마야?”
“5050. 212와 108의 최소공배수는?”
흠칫 놀란 재훈. 그러나 10초가 되기 전에 답을 구할 수 있었다.
“···5724. 답이 맞는지는 어떻게 확인하니?”
“쉬운 계산이니까, 정답이에요.”
“···. 9더하기 4는 1, 3더하기 11은 2, 그럼 10더하기 8은?”
12진법 문제.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단유는 답을 알아냈다.
“···6이요. 연속하는 두 개의 정수의 곱이 552일 때, 두 수는 뭘까요?”
단순 암산 문제는 숫자의 길이에 따라 시간제한이라는 룰을 이용하기 좋다. 가령 7자리 숫자를 제곱하는 문제만 내도 1분 안에 풀기는 힘들 것이다. 다만 재미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재미없는 문제는 내지도 않을 단유와 재훈이었다.
“23, 24. 조금 난이도를 올릴까? 100이하의 소수의 합은? 소수가 뭔지는 알겠지?”
단유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30초 지났어. 질문하나 할게. 이름이 뭐지?”
“김단유요.”
“두 번째 질문. 지금 니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게 뭐야?”
“···과학이요.”
“너무 범위가 넓은데?”
“물리요.”
“세 번째···.”
“1060. 달걀을 세우는 방법, 아세요?”
단유는 질문하는 동안에 답을 알아냈다. 재훈은 놀라기를 잠시, 달걀이라는 흔하디흔한 소재에 고개를 일단 끄덕이며 안다고 대답했다.
“깨지 않고 세우는 방법, 아세요?”
깨지 않고? 생각이 길어졌다. 10초가 지나자 단유가 물었다.
“질문할게요. 식사하셨어요?”
“응?”
그러고 보니 6월이라 낮이 길다지만, 그래도 주위가 어둑해지는 시간대였다.
“아니.”
“저희 선생님이 오신 것 같아서 그만 가봐야 할 거 같네요.”
재훈이 돌아보니, 낯선 여선생과 주영이 나란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