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01화 (101/956)

스피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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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과장은 자신들이 이벤트회사 직원이며 초등학교 수련캠프 때문에 와서 일하던 중임을 알렸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희야 말로 놀라게 해드린 것 같아 죄송하네요.”

엄밀히 말하면 죄송할 일이 아니지만, 저리 정중하게 사과하니 저절로 그런 반응이 나왔다. 화려한 은발의 사내의 모습에 ‘양아치’ 정도를 떠올렸던 박 과장은 재훈의 바른 태도와 정중한 어투에 생각을 고치고 응대했다. 적지 않은 사회생활에서 쌓인 경험이 눈앞의 사내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일단 제 후배가 다친 것 같아 먼저 일어서야 겠습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까운 병원이 조금 먼데···.”

“네비 따라 가면 되겠죠. 그럼 수고하십시오.”

재훈은 다시 고개를 숙인 뒤, 주영을 부축하여 자신의 차로 이동했다.

“어디가 아픈데?”

“손 등이 시큰거리는 게··· 부러진 건 아니겠죠?”

“골절은 아닐 거야. 골절이라면 니가 지금 내 옆에서 이러고 있을 리가 없을 거니까.”

“왜요?”

“아파서 죽는다고 바닥을 뒹굴고 있었겠지?”

주영은 도끼눈을 뜨고 재훈을 째려보았다. 재훈은 피식 웃으며 조수석 쪽의 문을 열어주었다.

“학교에서 이런 건 공부 안 해요?”

“그런 건 본과 가서 하는 거야. 난 아직 예과야.”

시동이 걸리자 거친 엔진음과 함께 잔 떨림이 느껴졌다. 재훈은 주영의 안전벨트를 걸어주며 물었다.

“엉덩이는 안 아파?”

“엉덩이는 괜찮거든요.”

“어떻게 뒤로 넘어진 애가 엉덩이는 안 다치고 손을 다치냐? 엉덩이에 뽕이라도 잔뜩 넣은 거 아냐?”

“선배, 그거 성희롱인데요?”

“고소해.”

네비를 조작한 후, 재훈은 차를 몰아 교문을 빠져나갔다. 주영은 이 요란스러운 남자가 자신에 대한 걱정을 농담으로 대신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대놓고 웃을 수가 없어 창밖을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오해한 재훈이 넌지시 한 마디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골절이라도 깁스하면 금방 나을 수 있어.”

“······.”

“잘 붙잡고 있어. 단순 골절인지 복합 골절인지 몰라도 신경 손상가지 않게 하려면 부목이라도 댔어야 하는데 정신이 없어서 그냥 나와 버렸네.”

“······.”

“골절 아닐 거야. 정도나 부위에 따라 통증의 정도가 다르다지만 아마 염좌 정도일지도 모르니깐 너무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해요.”

재훈은 흘낏 눈치를 본 뒤, 말없이 운전만 했다. 제법 놀아본 것처럼 보이는 이 남자도 여자 마음은 잘 모르나보다. 손은 아팠지만 마음은 따뜻해진 주영이었다.

****

「환영합니다! 인평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 여러분!」

저 문구를 보고 있자니 괜히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수련캠프라고 불리는 폐교는 낡은 탓인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고, 바람에 흔들리는 낡은 철 구조물에 매달린 현수막은 끼익 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이들을 환영했다.

“반별로 줄서세요.”

단유의 개인적 감상과 달리, 대부분 아이들은 들떠 있었다. 생애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할―부모님이 동행하지 않은―외박을 앞둔 아이들은 마치 거대한 놀이공원에라도 온 것처럼 굴었다.

즐비하게 늘어선 아파트도 보이지 않았고, 학교 앞 분식점이나 학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초여름을 맞이해 밝은 녹색으로 치장한 산들로 주위를 메우고 소나무, 전나무 같은 큰 나무들 뿐 아니라 작살나무, 산사나무 같은 작은 나무들도 주위에 뿌리 내리고 있었다. 비록 낯설고 부모님도 안계시지만, 친자연적인 환경에 놓인 아이들은 친구들과 함께 ‘모험’이라는 판타지를 꿈꾸며 들떠있었다.

“반장, 뭐하니?”

담임선생님의 부름에 단유는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뛰어갔다. 종종 정신을 놓고 있는 것이, 확실히 정상 컨디션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뭐라도 하면서 몸을 움직이려 했다.

간단한 입소식을 마친 후, 각 반은 배정된 교실로 이동했다.

“자, 선생님 따라 오세요.”

이 곳까지 오는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게 억울했던(?) 아이들이 우리를 탈출한 병아리 떼처럼 떠들어대는데, 선생님도 반쯤은 포기했다. 교실로 들어서니, 바닥에 매트가 깔려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얼씨구나 하며 배운 적도 없는 낙법을 하느라 난리가 벌어졌다.

“4반! 4반! 선생님 말 들어야지!”

“우아~. 야!”

“선생님, 얘가 욕해요!”

“야!”

“우와!”

선생님은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떠드는 사람은 점심 못 먹어요.”

곧 4반에 굶주림에 눈 먼 평화가 찾아왔다. 몇몇은 못 먹어도 고, 라고 떠들 기세였지만 다른 아이들의 눈총에 몸을 사렸다.

“12시부터 점심식사니까 각자 자신의 짐을 교실 뒤편에 두고, 나오도록 해요. 알았죠?”

“네.”

“반장은 교실에서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 다른 아이들이 모두 나가는 걸 확인하고 나오도록 하고.”

“예.”

단유는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 분주한 정리 시간과 함께, 남자아이들은 곧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점심은 운동장 한편에 마련된 천막에서 배식이 될 예정이었다.

짐이 섞이지 않도록 정리를 돕던 단유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돌아보니 유림이 손에 든 걸 건넸다.

“뭐야?”

“저쪽에 가방을 두려고 하는데 이게 떨어져 있어서 주워왔어. 누가 떨어뜨린 건지는 모르겠는데.”

유림이 교실 뒤의 어느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태블릿이었다.

“이게 뭔데?”

“태블릿.”

“그게 뭔데?”

“······.”

이럴 때 놀리면 안 된다고 배운 유림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컴퓨터 같은 거야.”

멀뚱히 쳐다보던 단유가 말했다.

“니가 선생님 드려.”

니가 주웠으니 니가 처리해, 라는 반응이었다.

“반장이 줘.”

“너도 부반장이잖아.”

“······”

귀찮다는 것일까, 아니면 부반장이니까 알아서 하라는 것일까. 다행히도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셨다.

“반장, 너도 가서 식사해야지.”

“선생님. 교실에서 이거 주웠어요.”

선생님이 받아보니, 액정에 금이 가긴 했지만 작동이 가능한 태블릿이었다. 암호가 걸려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모양새로 봐선 아이들이 쓸 만 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래. 선생님이 주인 찾아볼게.”

캠프 준비하던 사람들이 놓고 간 것일지도 몰랐다. 선생님은 태블릿을 챙겨 아이들과 함께 교실 밖으로 나갔다.

****

“어디 뒀지?”

“뭘?”

“태블릿이요.”

“없어?”

“예. 어쩌면 거기서 떨어뜨렸었나 봐요.”

“학교?”

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30분에 걸쳐 달려온 병원에서 X선 촬영 판독 결과 뼈에 금이 갔다는 소견이었다.

“손등에 선상골절이라. 운이 좋은 건가, 나쁜 건가?”

“무슨 뜻이에요?”

“완전히 부러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쳐도 하필 손등을 다쳤다는 점에서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놀리는 거예요?”

“응. 놀리는 거야.”

주영은 깁스가 된 팔을 들어보였다.

“이걸 보고도 놀릴 거예요?”

“그걸 보고 놀리고 있는 거야.”

한숨을 내쉬는 주영을 보며 재훈은 슬쩍 팔을 들어 어깨동무를 했다.

“2주면 풀 수 있다니까 조금만 참도록 해.”

“저리 치워요.”

어깨를 털어내는 주영이었다.

“돌아가자.”

“어디요?”

“어디긴? 집이지.”

주영은 가방을 둘러메다 그제야 태블릿을 학교에 떨어뜨리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송해요.”

“니껀데 왜 나한테 죄송해 하냐? 그리고 거기 금방 가. 얼마나 걸린다고.”

“저 때문에 번거롭게 돼서.”

“그런 건 걱정하지 말래도. 내가 시간이 남아도는 거 잘 알잖아.”

어차피 예과다. 예과라고 만만한 건 아니지만 본과 들어가기 전까지 마음 놓고 놀 셈이었기에 얼마 전에도 주말을 맞아 유럽으로 잠시(?) 놀다오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의 머리도 유럽가기 전에 기분이라도 낼 겸해서 염색한 머리였다.

“아, 잠시만.”

재훈은 아까 박 과장이라는 사람에게 받은 명함을 꺼내들었다.

“여보세요? 박 과장님 되시나요? 예, 저는 아까 학교에서 마주쳤던 연재훈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 후배가 거기에 태블릿을 떨어뜨렸다고 해서요. 혹시 습득하신 게 있으신지 여쭤보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아, 그래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나중에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거기 언제까지 계실건가요? 예. 알겠습니다. 예,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뭐래요?”

“있대.”

주영이 반색하며 웃었다.

“다행이네요.”

“그래. 가자.”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읍내를 나와 도로 위를 달렸다.

“어디 가는 거예요? 아까 이 길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뭐라도 먹고 가자고. 어차피 태블릿의 소재도 확인했고, 소지한 사람의 전화번호도 있는데 급할 게 뭐 있어?”

“그래도 찾고 나서 먹죠?”

“이 근처에 유명한 가든 식당이 있다더라. 배나 채우고 가지 뭐. 다시 돌아오기도 귀찮은데.”

주영은 재훈의 계획을 꺾지 못했고, 덕분에 두 사람은 꽤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

혜린은 점심시간 이후 가진 창작놀이시간에도 집중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계속 안무만 떠올리며 저녁에 있을 장기자랑을 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이다.

“잡았다!”

모둠별로 팀을 이루어 곳곳에 숨겨둔 문제를 풀어 시간 내에 푼 팀이 풀지 못한 팀을 잡는 게임이었다.

“어?”

혜린은 혼자 얼이 빠져서, 같은 모둠의 아이들이 도망가는 동안에도 가만히 서 있다가 그만 추적팀에게 잡히고 말았다. 추적팀에게 잡힌 아이들은 지정된 자리에서 대기하였다가 자신의 모둠이 추적팀이 되면 합류하게 된다. 반대로 모둠이 추적팀에게 모두 잡히면 그대로 탈락이 된다. 머리와 몸을 동시에 사용하는 터라 대부분 아이들은 신나게 게임을 즐겼다.

「가로, 세로, 대각선의 합이 똑같아지도록 숫자를 넣으세요.」

9개의 칸에 1부터 9까지의 수를 조건에 맞게 넣는 마방진 퍼즐이었다. 제시된 문제에는 5개의 숫자가 미리 입력되어 있었기에 4개의 숫자를 알맞게 넣으면 되는 문제였다.

아이들이 문제를 받자마자 단유에게 문제를 넘겼다. 단유는 빤히 바라보더니, 곧 숫자를 기입했다. 그 놀라운 속도에 바라보던 선생님의 눈이 커졌다.

단유는 카드를 돌려주었다. 선생님은 정답을 외치고, 모둠에게 추적팀 완장을 주었다. 그리고 5분간 모둠은 완장이 없는 팀들을 쫓아야 한다.

“잡았어.”

추적팀이 될 때마다 단유는 반드시 한 명은 잡았다. 단유가 달리기 시작하면 웬만해선 다 잡혔다. 하지만 단유는 한 명 이상을 잡지는 않았다.

뒤늦게 눈치 챈 아이들이 단유만을 피하려고 했고, 재수 없게 잡히면 투덜대기 일쑤였다.

“왜 하필 나야.”

단유의 답은 명쾌했다.

“니가 제일 똑똑해.”

잡힌 아이는 아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고, 단유네 모둠도 매번 추적팀이 되니 기분이 좋았다.

“단유야.”

담임선생님이 불렀다.

“네?”

“미안한데, 이리로 와 줄래?”

단유가 다가가니 선생님이 그를 데리고 조금 외떨어진 곳으로, 아이들의 귀가 닿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이런 이야기해서 미안한데, 넌 선생님들이랑 같이 외곽에서 애들 정리하는 거 도와주지 않을래?”

“그럴게요.”

단유는 쉽게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선생님들은 일부러 단유를 빼기 위해 핑계를 만든 것일 뿐이었다. 단유가 있음으로 해서 게임의 균형이 맞지 않아서였다. 말하자면 단유가 먼치킨이었다. 단유네 모둠은 별다른 머리도 쓰지 않고 단유의 능력에 편승함으로써 제대로 게임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고, 다른 모둠의 아이들은 먼치킨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양민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유가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아이고 이것 봐라. 이게 다 몇 명이야?”

“수련캠프로 쓰인다더니 그게 마침 오늘이었네요.”

학교 안까지 들어오려다가 학생들의 수련회활동 때문에 들어오진 못하고 외부에 차를 세워둔 재훈과 주영이었다. 낮은 담 너머로 바라보니 아이들이 악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성들을 질러대며 요란스럽게 놀고 있었다.

“저 옆으로 해서 들어가실래요?”

“그래.”

막 교문을 지나는데, 한 아이가 외따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던 재훈이 변덕을 부려 아이에게 다가갔다.

“꼬마야. 넌 왜 같이 안 놀고 혼자 있어?”

앉아 있던 꼬마가 뒤를 돌아보았다. 잘생긴 꼬마네, 재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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