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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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하는 날의 아침부터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선선한 바람에 아이들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대절한 7대의 버스가 줄을 이어 고속도로 위를 달릴 때,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선생님들은 일부러 엄한 분위기를 잡으려 애썼다. 4반 역시도 버스 안인지 전통시장 골목길인지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연출되자 선생님이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4반.”
에코가 너무 많이 들어간 탓인지 웅웅거리는 울림이 버스를 가득 메웠다. 아이들은 귀를 막고 마이크를 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기사에게 에코를 줄일 수 있냐고 묻곤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버스 안에서 어떻게 해야 된다고 했지?”
“조용히 해야 되요.”
“친구들이랑 이야기할 때도 조용히 해야지, 안 그러면 기사아저씨가 시끄러워서 운전을 못해요. 그렇죠?”
“네!”
선생님은 저 아이들이 30분만이라도 조용히 있어주기를 바랬다. 지금까지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저들이 30분만 침묵을 지키면 반 이상은 마법에 걸린 것처럼 잠들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이들이 2분도 지나지 않아 소곤거리기 시작했지만, 이 정도는 참을 만하다 여겼다.
“조금 시끄러워도 양해해 주세요.”
기사에게 넌지시 부탁을 했다. 50대 중년의 기사는 껄껄 웃으며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초등학생들이 탄 차를 운전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미 각오했던 바였다. 그리고 저 아이들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아줌마부대의 춤바람은 이기지 못할 터였다. 덩치도 큰 아줌마들이 좁은 좌석 사이에서 쿵쾅거리며 춤추고 노래 부르며 술판을 벌이는 와중에도 고속도로 위를 시속 100㎞로 달려본 경험이 있는 운전기사였다.
한편, 중간 자리에 앉은 단유는 가만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는 건너편 자리에 앉은 아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쑥덕대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젯밤을 설쳤던 까닭에 머리도 멍했고 달리 끼어 들 명분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젯밤부터 시작된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마법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마법을 배우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절박감이 없었다. 물론 절박감이 있더라도 쉽게 마법을 배우는 것은 어려웠다. 이미 많은 것이 이전과 달라졌다. ‘김단유’라는 정체성을 인정한 이후로,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과 인지 체계가 바뀌었다. 직관적이며 추상적인 사고에 의지한 인지체계에서 벗어나, 분석과 논리를 도구로 구체적이며 실증적인 인지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법은 이러한 인지체계에서 ‘아나그노리시’, 즉 ‘인식’이 어려웠다. 안트는 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었다.
“이곳에서 가장 쉬운 마법의 하나로 꼽는 게 사실은 사물구현마법이다. 그 중에서도 돌이지. 정형적인 형태를 갖지 않으면서 그 속성은 누구나 알 수 있거든. 돌은 돌이야. 이게 당연한 인식이지. 그런데 넌 그게 안 되는 거지. 왜냐하면 너의 머릿속에서 돌은 여러 가지 성분들이 포함된 ‘광물질’로 인식되니까. 그 성분들 하나하나도 또 다른 성분으로 분해될 수 있다고? 그럼 그 성분마저 인지해야 하는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때문에 그런 인식 체계라면 돌이란 것을 원형 그대로 인식한다는 게 어려울 것이다.”
집어들었던 돌을 숲 밖으로 내던지며 안트가 말을 이었다.
“세포라든가, 분자라든가··· 니가 말한 그런 속성들에 대해 내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식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게 그 쪽 세계의 진리라면, 그 세계에서 마법은 쇠퇴하거나 아니면 사멸했을 거다. 아니면 아예 발현이 불가능했던 세계일 수도 있고.”
안트의 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난 시간동안 단유는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법 때문에 공부를 안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이곳의 학문 체계에 길들여진 상태인데다가, 이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마법보다 학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옆을 돌아보니 어느새 주변의 아이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쩐지 조용하더라니.
단유는 슬며시 손바닥을 들어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응시했다. 아직 작고 하얀 손바닥에 불과했다.
단유는 주먹을 꾹 쥐었다. 뭔가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강한 열망을 담아 손이 하얘지도록 쥐었다. 하지만 강한 열망만큼 두려움과 불안감이 커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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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입지가 좋은 지 잘 모르겠네요. 너무 외떨어진 기분도 들고.”
“그래서 좋은 거지. 높으신 분들이 조용히 요양하러 오기 딱 좋잖아. 서울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앞에 도로만 잘 나면 그만이겠는데?”
“도로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로비 좀 하면 되지 않을까? 이왕이면 요 앞에까지 잘 닦아달라고 기름칠 좀 해야지. 몇 백억 짜리 병원이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설마 가만히 있겠어?”
은발 사내는 연신 전자 담배를 뻐금거리며 폐교 본관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산을 뒤로하고 높이 10층짜리 초호화 병원이 건설된다면···. 거기다 앞에 놓인 개천도 돈 좀 들여서 정비하고, 뒷산에 등산로도 좀 닦아두고 그러면 거의 리조트 급 병원으로 우대받을 지도 모르겠다.
“선배, 그런데 이제 머리 좀 새로 염색하는 게 어때요?”
보라는 땅은 안보고 남의 머리나 관찰하고 있네?
“안 그래도 할 거야. 니가 그렇게 콕 집어서 말 안 해줘도 할 거라고.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에 할아버지도 한 소리 하시더라.”
“뭐라고요?”
“걸레를 머리에 얹고 다니냐, 고.”
주영은 고개를 돌리고 실소를 지었다. 감히 보는 앞에서 웃음을 터뜨릴 수는 없으니까.
“연재훈, 정말 많이 죽었구나. 후배한테 비웃음이나 사고.”
먼 산 바라보며 푸념을 늘어놓는 말에, 주영이 표정을 가다듬고 변명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선배를 비웃겠습니까?”
“이상한 다나까는 쓰지 마시고. 지적도나 한 번 보자.”
주영은 들고 있던 태블릿을 꺼내 지적도를 보여주었다.
“몇 사람이지?”
“4명에게서 사들이면 이 곳 부지매입이 완료될 것 같아요.”
“급한 건 여기랑 여기니까, 이것부터 해결하도록 해.”
“알겠어요.”
“공기도 좋고, 땅도 넓고, 주위에 사람도 적고. 나쁘진 않겠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중, 주영이 눈치를 보며 넌지시 말했다.
“선배, 나 화장실 좀.”
“그런 건 말하지 말고 그냥 가라. 내가 그런 거 신경 쓰냐?”
주영은 재훈을 힐끗 노려보았다가 이내 본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주영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재훈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10대 재벌가에 속하는 분이시다. 그 할아버지가 말년에 의료사업에 관심을 쏟는 것은 단지 자신의 노구 때문만은 아니었다. 손자인 재훈이 국내 유명 의대에 진학을 하게 되면서부터 조금씩 관심을 두고 계셨다. 게다가 재훈의 형이 사업을 물려받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막내손자에게 색다른 선물을 준비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볼 따름이다.
그렇다면 선물을 받는 당사자로서 재훈은 자기 몫은 알뜰히 챙겨야 했다. 단순히 의료 법인 설립하고 병원 하나 뚝딱 짓는 것으로 그칠게 아니라 다른 가족들 모두가 감탄할 정도의 성과는 거둬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게 재훈의 계산이었다.
마침 눈치 있고, 말 잘 듣고, 몸매도 좋은 후배가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산골 벽지에 병원 하나 짓는 걸로는 재훈의 야심을 채울 수 없었다. 영리 의료 법인만으로 형을 뛰어넘는 성과를 보이겠다는 재훈의 야망은 이곳에서부터 시작이 될 뿐, 여기서 끝나지는 않으리라.
“저기, 누구신지?”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다. 멀겋게 메마른 얼굴의 남자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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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이 어디야?”
이 작은 건물 안에 화장실이 없을 리가 없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오래된 건물치고 청소가 잘 되어 있었지만 주영은 그걸 알아보지 못했다. 복도에는 흔한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았고, 천장에는 거미줄 하나 보이지 않는데, 주영은 그저 오래된 외벽 페인트의 바래진 푸른색만 머리에 담아두고 있었다. 연녹색 벽 위로 낡은 나무창들을 바라보며 시멘트 바닥 위를 걷던 주영은 걸음을 멈췄다.
“밖에 있나?”
이럴 줄 알았으면 건물 주위를 다 돌아볼 걸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 때였다.
“누구세요?”
흠칫 놀란 주영이 급하게 뒤를 돌다가 덩치 큰 사내가 바로 뒤에 서 있다는 사실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앗!”
덩치도 웬 낯선 여자가 자길 보더니 마치 도깨비라도 본 것 마냥 놀라면서 넘어지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래도 사람이 넘어졌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다가가려는데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아악!”
여자의 비명이 복도를 지나 바깥에까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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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나타난 메마른 얼굴의 남자는 사실 인평초등학교 수련회의 수련캠프를 돕기 위해 와 있던 사람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학교에 와 있었던 남자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수련캠프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캠프 기간 동안 쓰일 각종 기자재를 트럭에 싣고 왔을 뿐만 아니라 수련회 기간 동안 이용될 건물 상태를 최종 점검 하고 있었다.
지난주에 다른 학교가 한 번 사용했던 터라 청소는 비교적 되어 있던 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구석구석마다 살피며 남겨진 쓰레기는 없는지, 깨진 창문이나 부서진 곳은 없는지를 확인했다. 아침도 먹지 않고 일하다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칭얼대는 동료를 위해 다함께 차를 타고 10분 거리에 있는 읍내 식당으로 갔었다.
늦은 아침을 마친 무리가 학교로 돌아오니 낯선 고급 승용차가 운동장에 서 있었다.
“뭐야? 저건?”
“벤츤데?”
누가 그걸 몰라 물을까? 마른 얼굴의 사내가 차에서 내려 벤츠에 다가갔다. 차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단 이 대리랑 너는 교문 앞에 현수막부터 설치해. 이제 곧 도착할 테니까 할 일은 해야지. 넌 나랑 같이 안에 들어가 보자.”
아무도 오지 않을 벽지라 감시자 한명 두지 않고 읍내로 나섰던 부주의함을 속으로 탓하며 마른 사내는 덩치를 데리고 본관으로 향했다.
“넌 교실에 가서 기자재 확인해봐. 난 학교 뒤로 둘러보고 갈게.”
“예.”
짤막하게 지시를 마친 사내는 곧장 건물 뒤로 돌아갔다. 몇 걸음 안가 사내는 고급차의 오너로 보이는 남자를 발견했다. 누가 봐도 차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이런 산골에서 화려한 은발에 키는 180을 넘을 듯 훤칠한데다, 어깨도 떡 벌어진, 캐주얼 정장 차림의 남자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농사 짓는 할아버지가 저런 모습이라면 그야말로 난센스다.
“저기, 누구신지?”
사내의 물음에 은발의 사내가 돌아보았다.
‘얼굴도 잘생겼네.’
얼굴이 합쳐지자 꽤 잘나가는 패션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외형이었다.
“그러는 그 쪽은 누구신지?”
듣기 좋은 중음의 목소리에 사내가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아악!”
건물에서 들려온 여자의 비명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먼저 움직인 것은 은발의 사내, 재훈이었다.
건물에 들어선 재훈은 복도 중간쯤에 선 덩치의 사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내 앞에 넘어져 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주영이었다.
“주영아!”
재훈이 고리눈을 하고 뛰어갔다. 그 기세가 요란해, 덩치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되레 뒷걸음질로 물러나려 했다. 재빨리 다가간 재훈이 쓰러진 주영을 먼저 부축하려 했다.
“아악! 선배! 잠, 잠깐만!”
재훈이 주영을 안아들려 하는데 주영이 먼저 큰 소리로 제지했다.
“왜?”
“나 손목.”
“응?”
“넘어질 때 다쳤나봐요.”
재훈이 덩치를 째려보았다.
“이 새끼가?”
덩치는 흠칫 놀라 더듬거리며 변명을 하려고 했다.
“아, 아니에요. 저 아니에요.”
“김 대리, 무슨 일이야?”
뒤따라 재훈의 뒤를 쫓아온 마른 얼굴의 사내, 박 과장이 물었다.
“김 대리?”
재훈이 박 과장을 올려다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