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8화 (98/956)

스피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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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하늘과 검은 산이 세계를 두른 시간, 하얀 달빛마저 구름이 집어삼키며 어둑해진 거리에 낡은 주황색 나트륨 계열의 가로등 불빛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거리 끝 어디서부턴가 코끼리 울음소리 같은 웅웅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귀를 찢는 듯한 소음과 함께 2대의 차량이 붉은 꼬리를 남기며 질주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브레이크가 고장이라도 났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거침없이 속도를 높여만 가며 도로와 풍경을 할퀴고 지나갔다.

“씨발, 안되겠는데?”

“닥치고.”

이미 풀악셀로 밟고 있던 운전자는 혀로 마른 입술을 훑으며 정교한 핸들링을 선보였다. 한 발 앞서 달리는 검은 광택의 벤츠 AMG C63 쿠페의 뒤꽁무니를 거의 박을 듯이 따라 붙었는데, 한 끗 차로 앞서지를 못하니 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코너!”

옆에서 떠들지 않아도 보인다. 눈이 삐꾸가 아니고서야 저게 안보이겠냐고? 운전자는 현란한 발기술로 기어를 변속하고 코너를 빠르게 진입했다. 차량에 가해진 감속G에 몸이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운전 중인 남자의 왁스로 멋을 낸 머리에 파란 조명이 번쩍이니 그 자체로 사이키나 다름없었다.

“윽!”

동승하고 있던 친구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G포스에 신음을 냈다. 이 정도로 신음을 낼 정도면 영암서킷은 글렀네. 운전자는 이를 악물고 핸들을 조정하며 악셀을 밟았다가 클러치, 기어 변속, 다시 악셀을 밟았다. 클러치와 악셀의 숨 가쁜 전환 속에서 코너 탈출을 위한 가속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앞선 차량은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다시 100m정도 이어지는 직선도로. 빠르게 최고 속도까지 도달하지만 앞선 차량의 붉은 브레이크 등이 비웃듯이 불을 밝혔다.

“흡!”

다시 감속. 몸이 쏠리지만 시선은 앞차의 꼬리에 고정했다. 핸들을 조정했다. 미세한 움직임만으로 하얀 쇳덩어리는 코를 틀어 선두의 뒤를 바짝 쫓았다.

“으으으.”

신음인지 떠는 소린지 옆에서 나는 소리가 거슬렸다. 젠장, 지고 있으니까 별게 다 거슬리고 있다. 너무 오랫동안 빨간 불빛을 보고 있었나보다. 시야가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사내는 다음 코너에서 승부를 걸기로 했다. 죽든지, 이기든지 둘 중 하나였다.

다음 코너는 오른쪽으로 굽은 코너였다. 운전자에게 많은 G포스가 가해지는 구간이지만, 버티고 나가면 이기리라. 앞차가 다시 감속을 걸 때, 사내는 핸들을 교묘하게 틀었다. 브레이크는 밟지 않았다. 0.2초라도 늦게 밟으면 저 차를 앞지르는 것은 무리가 아니리라. 다만 정교한 컨트롤로 코너를 진입한 뒤, 재빨리 탈출속도를 얻는 게 관건. 이럴 때 써먹으려고 배워둔 게 있다. 개나 소나 다한다지만 진정한 고수는 정말 필요한 순간에 적절하게 사용하는 법이다.

은색 포르쉐 911 카레라는 선두 차의 왼쪽으로 치고 나갔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핸들을 꺾고 악셀에서 발을 떼는 동시에 브레이크를 순간적으로 밟고 다시 악셀을 힘껏 밟았다. 노면에 접지된 뒷바퀴가 미끌리며 타이어 타는 소음과 냄새가 귀를 웅웅거리게 만들었다. 차는 속도를 잃지 않고 코너를 진입함과 동시에 앞차와 코를 맞추었다. 검게 썬팅된 유리 때문에 보이진 않지만 많이 당황했으리라.

“으어어!”

이 정도로 겁먹지 말라고. 사내는 핸들을 뒤틀면서 악셀을 밟은 발에 힘을 풀지 않았다. 하얀 차체가 거친 운전 탓에 덜덜거렸다. 하지만 이내 속도를 잃지 않고 미끌리던 차량이 힘을 서서히 받으며 코너를 탈출해 나간다.

“크크.”

이게 드리프트의 묘미다! 잠깐 흥분했었나보다. 핸들이 조금 더 꺾였던 걸까? 차가 중심을 잃고 뒷바퀴가 살짝 들리는 느낌이었다.

‘어?’

사내는 급히 핸들을 조작하려 하는데, 의도치 않은 피쉬테일이 시작되었다. 자동차의 뒷부분이 좌우로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해서 핸들을 조작해보려 할수록 움직임은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순간.

―쾅!

****

1달 전. 명수는 방에서 열심히 손과 다리를 흔들어댔다.

“뭐해?”

책을 읽고 있자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춤 연습.”

어떤 음악도 나오지 않는데, 춤이라니?

“무슨 춤?”

“그냥 춤이야.”

단유는 아무 말 없이 명수를 지켜보았다. 2사람이 쓰는 넓지 않은 방 가운데 서서 두 팔을 휘젓는 폼이 요란했다. 관절이 빠진 사람 모양으로 다리를 흔들어대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픈 사람이라고 착각할 만한 모양새였다.

“왜 하는데?”

명수는 헉헉대며 대답했다.

“조금 있다가 수련회 가잖아? 그 때 장기자랑 때 하려고.”

공 찰 때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 같긴 한데, 아무리 춤에 문외한인 단유가 보기에도 저건 그냥 ‘흔드는’ 거지 ‘춤’이 아니었다.

“음악도 없이?”

“아, 원래 있는데 여기서 틀 수 없잖아.”

본래 보육원에서 개인 물품 반입이 불가능하지 않다. 더러 부모님이나 친척들이 선물로 주는 물품들을 개인 소장하는 게 불법은 아니니까. 다만 그런 사치는 가족이 외부에 있는 경우에나 해당하는 것이었고, 단유나 명수는 그런 건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었다.

“형이나 누나들한테 빌리면 안 될까?”

찾아보진 않았지만 물어보면 오디오 플레이어 정도는 빌릴 수 있지 않을까?

“아냐, 괜찮아. 음악은 내 머릿속에 다 있어.”

설마,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저 움직임에 리듬, 박자가 있다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어질 단유였다. 보나마나 명수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원래 그런 성격이니까. 활달하고 쾌활한 성격이지만 남들에게 부탁하는 걸 굉장히 꺼린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낯을 가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명수는 웬만하면 부탁을 하지 않았다. 다만 단유에게만큼은 예외였다.

“후, 석고야. 처음부터 다시 할 테니까, 보고 평가해줘.”

뭘 보고 평가를 하란건지 난감하기만 했다. 애초에 대답은 들을 생각이 없었던 게 분명한 명수는 밑도 끝도 없이 팔을 휘젓고 다리를 흔들어댔다.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몸부림이었다.

“명수야, 노래라도 부르면서 맞추는 게 어때?”

“후, 후, 노래, 후, 부르면서, 후, 하면, 흐후, 힘들어, 후후.”

그래, 힘들어 보이는구나. 단유는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어때?”

단유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좋아.”

명수는 헤벌쭉 헤픈 웃음을 지었다. 저 웃음을 위해서라도 오디오 플레이어를 빌려야겠다.

며칠 뒤, 단유는 명수의 몸부림이 딴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기자랑을 준비해야 된다고요?”

선생님은 2박 3일의 수련회 중 첫날 있을 장기자랑 시간에 보일 장기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물론 단유에게 준비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각 반별로 장기자랑 시간에 선을 보여야 했기에, 학급회의 시간에 장기자랑을 주제로 의견을 모으라는 말씀이셨다.

그리고 회의 결과 4반은 노래와 춤을 선보이기로 했다. 의외로 여자아이들이 신이 나서 적극적으로 달려들었고, 16명 정도가 모여 춤을 추기로 했다. 몇 몇 남자아이들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여 함께 구성하다보니 인원이 늘어났다.

“저는 연예인이 꿈이어서 집에서도 춤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나도 춤 잘 추거든?”

이 때 처음으로 자기 반에 연예인을 꿈꾸는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장기자랑에 나가기로 한 16명의 아이들은 최신 유행가에 맞춰 댄스를 선보이기로 했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노래였지만, 단유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다만, 이 아이들은 방과 후 수업 후에도 교실에 남아 준비를 하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다음 날, 3명이 빠지겠다는 통보를 했다. 부모님이 학원에 빠지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 다음 날에는 다시 2명이 더 빠지고, 2명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 빠지는 2명 역시 학원이 이유였고, 참가를 요구한 2명은 첫날엔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이 없어 머뭇거리다가 허락을 맡은 뒤에야 참가 의사를 보인 것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13명이 장기자랑에 나가게 되었다.

13명이 모여 연습을 하는 시간. 우연히도 시간이 조금 남았던 탓에 교실에 남은 단유는 그들이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교실에 비치된 CD플레이어로 준비된 음악을 재생시키니 스피커에서 쿵쾅거리는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정한 비트의 드럼 위로 각종 전자음이 뒤섞인 일종의 ‘EDM 팝’ 곡이었지만 단유가 알 리 없었다. 다만 음악에 맞춰 춤추는 아이들을 보니, 단순히 7분여를 때우기 위해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맞춘 안무에 따라 춤을 추었다. 개중에는 리듬감 있게 몸을 움직여 보는 사람이 감탄할 수밖에 없게끔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명수 저리 가라 할 만큼 어설픈 몸짓으로 대충 형(形)만 맞추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꽤나 빠른 비트의 음악에 서로의 동작을 맞추는 그들의 모습은 유치하고 시시하다고 폄하할 수 없는 땀과 노력이 보였다.

첫 번째 시연이 끝나자, 단유는 박수를 쳤다.

“대단하다! 멋있어.”

아이들은 반장의 격려에 기분 좋게 웃었다.

“우리가 1등 하겠지?”

“아니, 너네 1등 못해.”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대답이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 명수가 있었다. 아마 보육원을 가기 위해 데리러 온 듯한데, 마침 4반의 춤 연습을 지켜본 모양이었다.

“왜?”

“우리 반이 1등할 거니까.”

아이들은 화를 내지 않았다. 명수에 대해 알만큼 아는 아이들이었다. 명수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화를 내는 아이들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명수는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이들이 대꾸를 하지 않는 이유가 자기 말이 옳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단유는 빨리 명수를 데리고 가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렀다.

“갈게. 연습 열심히 해.”

“반장, 잘 가.”

아이들은 대충 배웅하고 다시 연습에 돌입했다.

보육원으로 돌아오는 길, 단유의 머릿속에 조금 전에 들었던 음악이 반복되고 있었다. 몸이 음악에 맞춰 들썩이는 기분이었다. 최신 유행가라는 것을 주의 깊게 들어본 것은 처음이라 낯설면서도 흥이 돋았다.

‘음악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새삼스럽게 음악의 힘을 깨달은 단유였다. 어쩌면 명수도 이 음악을 머릿속에 품고 춤을 췄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수의 몸부림은 조금 전에 보았던 아이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긴 했다. 좋지 않은 의미로.

단유는 음악이라는 것도 공부해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

혜린이는 거실에서 TV로 영상을 보며 춤을 따라 추고 있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어서 혜린의 어머니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엄마, 이것 봐봐. 오늘 연습한 거야.”

어머니는 칼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몸을 돌렸다. 혜린이 신나는 얼굴로 음악을 재생시키곤 두 손을 앞으로 포개어 섰다. 박자에 맞춰 발꿈치를 들썩이더니, 이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안무를 선보였다. 자신의 딸이지만 팔 다리가 길고 유연해서 춤동작이 유려해 보였다. 딸이 연예인을 꿈꾼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 원한다면 서울로 데리고 가서 오디션도 보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딸은 오디션을 거부했다.

“난 아직 준비가 안됐어. 더 연습해야 돼.”

그 이야기를 듣고, 딸이 얼마나 진지하고 진심인지를 깨달은 어머니는 재촉하지 않았다. 애초에 방임주의를 선택한 어머니는 딸의 성장을 즐겁게 바라만 보았다.

“어때?”

숨을 고르며 묻는 딸의 말에 어머니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멋있어. 우리 혜린이가 아마 제일 멋있을 거 같은데?”

배시시 웃던 딸이 한 마디 했다.

“반장도 우리보고 멋있다고 했어.”

어머니가 정색을 했다.

“남자는 안 된다.”

혜린이 까르르 웃었다. 어머니도 금방 표정을 풀고 따라 웃었다. 행복한 모녀의 웃음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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