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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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고야, 컴온!”
드디어 명수가 영어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단유의 귀에는 ‘석고야, 가자!’로 들리지만, 명수가 영어를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확실히 명수도 공부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억지로라도 붙잡고 공부했던 게 도움이 되긴 했나보다. 아니면 5반 선생님이 정말 훌륭한 교사라는 반증일지도.
“그래, 가자.”
단유는 명수와 함께 운동장으로 향했다. 오전부터 현관 앞이 시끌벅적했다. 주말을 맞아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온 탓이다. 여름이 가까워오면서 자원봉사자들의 방문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이맘때면 보육원 철새도래지라도 된 것 같았다. 한 달 뒤쯤이면 온전히 철새로 뒤덮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오, 명수구나. 단유도 잘 지냈어?”
“네. 안녕하세요?”
자주 얼굴을 마주치는 푸근한 인상의 자봉단장님은 이제 인사를 나눌 정도로 친해졌다. 짧고 뭉툭한 손을 가진 자봉단장님은 명수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축구하러 가니?”
“예. 남자는 축구예요.”
단장님이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명수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단장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는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형! 형! 나도!”
뒤를 돌아보니 1학년 유철이랑 재민이가 중앙 계단을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짧은 다리로 계단을 뛰어내려오느라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요령 좋게 뛰어내려 온 리틀 명수를 꿈꾸는 아이들이었다. 단유는 손가락을 뻗어 운동장을 가리켰다.
“벌써 갔어. 얼른 쫓아가.”
“예!”
두 아이들은 짧은 다리를 재빨리 움직여 하얀 햇살 속으로 몸을 던졌다. 초여름 오전인데도 날이 뜨거웠다. 단유도 운동장으로 달려가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층계참에는 지선이가 서 있었다.
지선이는 사실 조금 안타까운 면이 있었다. 동성의 친구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나이 때의 언니가 다영이었는데, 다영은 중학교로 진학한 후 거의 공부만 하고 지냈다. 아니 사실 소미 사건이후로 외부 사람들과 말을 잘 섞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 옳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지선이 중학교 2학년인 언니에게 쉽게 다가가기도 힘들 뿐더러, 애가 숫기가 없는 편이어서 종종 또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멀리서 구경만 하곤 했다.
“지선아, 공지선.”
단유가 지선을 불렀다. 멀리 운동장을 바라보던 지선이 화들짝 놀라며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리와. 같이 가자.”
지선이 도리질을 했다.
“가자. 오빠가 같이 있어 줄게.”
머뭇거리며 손가락만 꼼지락대는 지선을 바라보던 단유는 계단을 다시 올라가 지선의 옆에 섰다.
“심심하지? 밖이 따뜻하니까 밖에서 오빠랑 같이 애들 공놀이하는 거 보자.”
손을 잡고 끌자, 그제야 끌려간다는 식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지선이었다. 조그만 손을 잡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났다. 이제는 너무 오래전의 일이 되어버린 동생에 대한 기억이었다. 사실 동생 손을 붙잡고 마을 뒤 언덕을 올랐던 기억도 이제는 가물가물했다.
숲 속에 땔감을 주우러 다닌다는 핑계로 동생이랑 많이 놀아주지도 못했는데, 그 동생은 이제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도 없었다. 포기한 건 아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현실을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 단유는 그런 기억들도 억지로 누르고 오로지 자신의 생존에만 매달렸다.
그러던 게 올해 초, 지선을 만나며 조금씩 마음이 흔들렸다. 혼자였기 때문에 살아남는 데만 집중했던 지난날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는 지선만큼은 잘 돌봐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씩 했다. 다만 지선이 너무 낯을 가리고 성격도 수줍은 탓에 통학차 안에서나 학교에서 가끔 마주칠 때도 서로 이야기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어쩌다 얼굴이 마주쳐도 지선이 먼저 도망가기 일쑤였다.
“혹시 추워?”
지선이 얇은 긴 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이 보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지만 지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기 몸에 너무 큰 티셔츠였는지 소매를 몇 단은 접었는데도 손목에 이를 만큼 크고 넓은 티셔츠였다.
“단유야, 뭐해? 빨리 와!”
명수가 운동장에서 리틀 명수들이랑 공을 주고받다가 뒤늦게 나온 단유를 보고 소리쳤다.
“오늘은 그냥 구경만 할게.”
“왜?”
“그냥. 오늘은 나 쉴 거야.”
“안 돼! 너 운동해야 돼. 안 그럼 또 쓰러진다!”
“괜찮아. 요즘 운동 많이 하고 있어.”
몇 차례의 거절이 이어지자 명수도 포기했다. 명수도 이제 단유가 웬만해선 자기 말을 다 들어주는 편이지만, 한 번 고집을 부리면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윽고 운동장에서 간이 축구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명수가 많이 발전했다는 게 느껴졌다. 경기장 안에서 볼 때랑 밖에서 볼 때는 다르다더니, 철용이랑 공을 주고받는 모습도 능숙하고, 가끔씩 리틀 명수들에게 일부러 패스해주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저런 패스가 명수를 좋아하게 만든 건지도…….’
경기를 보다가 옆이 너무 조용해서 힐끔 쳐다보니, 지선이 입을 꼭 다물고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팔을 둘러 다리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예전 언덕 위에서 하늘을 감상하던 동생의 모습 같았다.
단유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지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심심하지?”
지선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빠가 재미난 놀이라도 할 줄 알면 너랑 놀아줄 텐데, 아는 게 없네.”
“…….”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
지선은 운동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유가 옆에 앉아 있지만 외로워보였다. 문득 지선도 단유가 예전에 느꼈던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걱정?’
단유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슴을 천천히 진정시켰다. 푸른 숲에서 배운 호흡대로, 숲의 공기처럼 묵직하고, 숲 속의 바람처럼 가볍게, 숲의 향내처럼 은은하게 가슴을 안정시켰다.
“김단유?”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어제 만난 여기자였다. 상훈이 이모라던가?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머, 예의도 바르네. 옆에는?”
“공지선이라고 우리 학교 1학년이에요. 같이 해바라기 중이에요.”
“어쩜, 요즘 애들이 ‘해바라기’란 표현을 다 쓰네? 어제도 느꼈지만 넌 좀 특별한 애 같애.”
“아니에요. 그냥 자주 이러고 있으니까 선생님들이 말씀해주셔서 알게 된 거예요.”
선혜는 히죽 웃으며 옆에 단유 옆에 앉았다. 2단짜리 시멘트로 된 스탠드에는 운동장에서 날린 흙먼지가 자욱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엉덩이를 붙이곤 단유를 바라보았다.
“뭐하고 있었어?”
“아이들 축구하는 걸 구경하고 있었어요.”
선혜가 시선을 돌려 명수가 드리블로 한 사람을 제치는 모습까지 관찰하다 입을 열었다.
“왜 같이 안하고?”
“지선이랑 같이 있으려고요.”
“착한 오빠네?”
“…….”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것으로 대신했다.
“혹시 시간되니?”
“…점심 때까지는요.”
“그럼 혹시 인터뷰 좀 할래?”
“어제 다 하신 거 아닌 가요?”
“오늘은 심화 인터뷰.”
능청스러운 웃음으로 아이를 휘어잡으려는 선혜의 속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딱히 해코지하려 하는 것도 아니어서 일단 응하기로 했다.
“언제 보육원에 왔니?”
“초등학교 들어가기 1년 전이요.”
“그 전에는?”
“…….”
뭔가 있긴 있는데 대놓고 물어보기가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어 선혜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어제 꿈 이야기를 했었잖아?”
“네.”
“지금까지 한 번도 뭐가 되고 싶다거나, 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보통 니 나이 때 애들은 하고 싶은 게 많잖아? 놀이공원을 가고 싶다거나, 외국으로 나가보고 싶다거나 그런 거.”
“별로 없어요.”
말 그대로였다. 단유가 하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 가족을 찾는 일 뿐이었으니까. 어제는 조금 딱딱한 어조긴 해도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은데, 오늘은 따뜻한 햇살이 내려쬠에도 서늘한 기운이 들었다. 인터뷰이의 문제인가, 인터뷰어의 잘못인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뭐니?”
“책 읽는 거요.”
“어떤 책을 읽는데?”
“아무거나 다요.”
어쩐지 오늘 날이 아닌 것 같았다. 선혜는 수첩을 덮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두 팔을 뒤로 하고 몸을 기댔다. 초여름의 날씨라 바람도 적당하고, 하늘의 구름도 적당했다. 소년의 말 그대로 해바라기하기 좋은 날이었다. 눈을 살짝 감으니 주변 잔디에서 풍기는 풀냄새와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적당한 오케스트라 배경음처럼 들려, 이대로 여유를 즐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님, 물어볼 게 있는데요.”
“뭔데?”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꿈꾸는 기분으로 되물었다.
“정치가란 직업이 뭔가요?”
“음… 정치를 하는 사람이지.”
“…….”
불친절한 대답이었으려나? 괜히 꼬마한테 심통 부린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처럼 국민들의 투표로 뽑힌 사람들이야. 이 사람들은 국민들의 뜻을 대신해서 정치를 하지.”
애 앞에서 선출직공무원과 정무직공무원 운운할 수 없으니 대충 이 정도로 만족하라지.
“정치가 뭔데요?”
하, 이쯤 되면 기껏 안정시킨 마음의 평화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입장이 뒤바뀐 거 아냐?
“정치를 사전에 나오는 것처럼 정의내리기엔 내가 너무 아는 게 없어서, 대답하기가 힘드네. 그래도 굳이 이야기를 하자면, 더 좋은 사회와 국가를 만들기 위해 서로 의견을 나누고 방향을 제시하는 일, 이라고 해두자.”
“…어제 학급회의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그래. 그것도 일종의 정치지. 좋은 학교, 좋은 교실을 만들기 위해 너희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을 모아서 방향을 정하는 것.”
“그런데 왜 저한테 정치가가 꿈이냐고 물었던 거예요? 전 아무것도 안한다고 말씀드렸는데.”
“…내가 생각하기엔, 아무것도 안하는 정치가가 제일 좋은 정치가처럼 보여서.”
실은 ‘누나가 생각하기엔’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조카 친구한테 ‘누나’라는 표현을 쓰는 게 너무 오글거렸다. 그렇다고 아줌마라고 자신을 호칭할 순 없지 않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지 않나요?”
“그렇지. 아무것도 바뀌지 않지. 그런데 니가 그랬잖아. 부족함이 있다면 학급회의에서 이야기를 한다고. 넌 그걸 듣고 조정하거나 혹은 정리해주는 역할만 맡는 거잖아?”
“예.”
“내가 생각하는 좋은 정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정치가야. 그리고 사람들이 바꾸길 원할 때 바뀌도록 돕는 사람이 제대로 된 정치가라고 할 수 있지. 자기 욕심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욕심을 들어주고 중재해주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하거든? 사람들이 아무리 떠들어대도 귀 막고 눈 막고 자기 맘대로 하는 정치가는 정치가가 아니지.”
정치꾼이라고 하지. 속으로만 되뇌었다.
“어려운거네요.”
“왜?”
“전 우리 반 아이들의 이야기도 다 듣지 못하는데…. 정치가라면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거잖아요.”
선혜는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니, 소년의 눈 속에 맑고 깨끗한 빛이 서려 있는 느낌이었다. 볼수록 상쾌해지는 느낌.
“부탁이 있어.”
“뭔데요.”
“제발 이대로만 자라다오.”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니 선혜가 입 꼬릴 주욱 늘리며 단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운동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아이의 뒤에 어떤 거물 정치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어쩌면 망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선배의 말처럼 촉만 믿고 살면 안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촉을 믿고 싶었다. 이 아이는 분명 커서 문자 그대로 ‘훌륭한’ 어른이 될 거라고.
물론 그 앞에 많은 시련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겪어보았고, 주위에서 많이 보았듯이 바르게 사는 게 어려운 세상이다. 하지만 이 아이만큼은 지금의 모습처럼 커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고프지 않니? 누나, 아니 내가 인터뷰 해준 보답으로 맛있는 거 사줄게.”
“허락 없이는 못 나가는데요.”
“내가 허락받으면 되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단유가 옆을 돌아보았다. 운동장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지선이 낌새를 채고 고개를 돌렸다.
“얘도 같이 가도 되요?”
“그럼. 되지. 우리끼리 가면 섭섭하잖아. 대신 저 애들은 안 된다. 내가 지갑에 여유가 없거든.”
운동장에서 뛰는 아이들을 가리키는 선혜의 말에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어날까?”
“고맙습니다.”
“응?”
“궁금한 점 알려주셔서 고맙다고요. 맛있는 것도 사주시니까 고마워서요.”
“나야말로 고마워.”
“네?”
선혜는 팔을 쭉 뻗고 기지개를 폈다.
“그냥 너랑 ‘대화’를 했더니, 상쾌한 기분이 들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