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5화 (95/956)

감사합니다(3)

-------------- 95/952 --------------

시간은 언제나 흐른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체감하는 시간은 다르다. 아인슈타인 덕분이다.

“와, 개어려워.”

여기자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앞에 놓인 노트북을 노려보았다. 당장 내일 게재할 기사 원고를 작성해야 하는데,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확 저지를까.”

이번 주가 시작될 때만 해도 선배 덕분에 다음 주 내내 써먹을 기획 기사거리 하나 얻었다고 희희낙락했었다. 그런데 보육원을 방문한 뒤, 선배는 스톱을 걸었다. 당연히 여기자는 방방 뛰며 선배 멱살 잡기 직전까지 갔었다.

“야, 진정해라. 그리고 그 동안 내가 너한테 떠먹여준 기사가 한둘이냐? 고작 이거 하나 가지고 죽네 마네 하는 건 엄살이야. 당장 내일이 마감이래도, 즉석에서 만들어낼 이야기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기자라고 부르지. 안 그래? 대신 양고기 사줄게. 먹고 기운내서 쌈박한 거 하나 구해봐라.”

꽝, 다음 기회를. 어린 시절 과자에 동봉된 씰에서 뽑았던 문구가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눈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어쩌랴. 선배 각오하시라고 경고한 뒤, 벨트 풀고 양고기에 소맥을 들입다 부었다. 덕분에 다음 날 아침, 두꺼비눈으로 출근한 여기자는 노트북의 워드프로그램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 점심을 맞았다. 해장으로 얼큰한 콩나물국밥을 한 입에 뚝딱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와 자판기 커피로 입속을 헹구고 나니 정신이 반쯤 돌아왔다.

자리로 돌아와 여전히 흰 화면 그대로인 노트북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남은 숙취마저 사라졌다.

“내가 미쳤구나.”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랬지. 다음 주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내일 기사를 어떻게 써야 할지를 고민해야 했다. 복지예산 관련 특집 기사가 물 건너가면서 그간 조사했던 내용도 일단 올 스톱이 된 상태. 여기자는 머리를 쥐어뜯다가 일말의 희망을 품고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저예요. 보육원 말고요, 어린이집도 같이 조사한 거 있잖아요? 그거 쓰면 안돼요? ···안돼요? ···그렇죠. 섣불리 건들 면 안 되긴 하죠. ···예. 아, 그럼 혹시 다른 거··· 아, 없으시다고요? 예, 예.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여기자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책상에 머리를 쥐어박기 시작했다.

―쿵, 쿵

“어이, 오떡이! 그래가지고 머리가 부셔지겠냐? 여기 창문 열어 줄게. 여기로 뛰어내릴래?”

얄미운 인간, 박팀장이 한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든 채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말을 건넸다. 지네 팀도 아니면서 왜 쿠사리야?

오떡이라고 불리는 여기자, 오선혜는 날 세운 눈으로 박팀장을 째려봤다. 앗 뜨거, 하며 박팀장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법조팀의 박팀장의 뒷모습에는 여유가 철철 넘쳤다. 꼴 보기 싫게.

오선혜는 머리를 굴렸다. 오전에야 숙취 때문에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돌아가지 않는 머리도 억지로 굴려야 했다.

“아, 맞다.”

언니가 인평초등학교 학부모회 임원이 됐다고 자랑했었던 기억이 났다. 당시에는 별것도 아닌 걸 자랑한다고 속으로 구시렁댔었는데, 지금은 뭐라도 나오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핸드폰을 붙잡았다.

“여보세요? 언니, 나 선혜. 상훈이는 잘 있지? 응. 다름이 아니고···.”

선혜는 핸드폰을 어깨에 끼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갔다.

****

“···그래서 말이야. 우리 상훈이가 반에서 제일 처음으로 감사장을 받았다는 거지.”

“상훈이가 평소에도 착하다는 소리 많이 듣는 애였잖아. 받을 만하지.”

“애가 감사장 받고 좋아가지고 그날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오여사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커피 잔을 붙잡았다. 선혜는 마주 웃으며 커피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하지만 속내는 그와 달리 바싹 타들어가고만 있었다. 반에서 고마운 사람을 뽑는 이야기가 그리 특별할 리 없다. 언니의 입장에서는 아들이 첫 감사장의 주인이 되었다는 게 기분 좋은 일이어서 그럴지 모르겠지만, 그런 이벤트는 아마 조사해보면 전국에 30% 이상의 교실에서 시행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다만 그 과정에서 반장이란 아이가 스스로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게 재미있었는데, 과연 그걸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반장이란 아이는 어떤 아이야?”

오여사의 눈 밑이 살짝 굳어지는 느낌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욕심 많은 언니 눈에 아들의 반장직을 뺏은 아이가 마음에 들 리 없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사실 걔가 보육원 출신 아인데···.”

“보육원?”

선혜의 머릿속에 섬광이 번쩍였다. 오여사는 주저리주저리 반장에 대해서 털어놓았는데, 요약하면 지금까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은 똑똑한 친구가 사실 보육원 출신이며, 한 때는 도서관 모델도 하면서 학부모들 사이에 자주 거론되기도 했었던 아이라는 것이었다.

‘그 아이구나.’

어쩐지 눈에 띄더라니. 자신의 촉이 살아있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며, 기사의 방향을 잡았다.

‘교사 인터뷰, 아이 인터뷰, 제목은 「우리 반이 달라졌어요」 정도? 너무 유치한가?’

굳이 사건을 찾을 필요도 없고 만들 필요도 없다. 화제의 인물, 혹은 화제가 될 만한 인물을 찾아 인터뷰하는 것도 좋은 기사가 될 테니까. 뭐니 뭐니 해도 오늘은 넘기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지금 빨리 가면 아이들이 하교하기 전에 볼 수도 있으리라.

“언니, 고마워. 나 부탁하나 하자.”

“뭔데?”

“상훈이네 반 선생님 인터뷰 좀 하려고. 반 애들이랑. 전화 좀 미리 넣어줄래?”

“인터뷰를? 왜?”

“왜긴. 기사에 실으려고 하는 거지.”

“그래?”

가만 보니 뭔가 기대하는 눈치가 보였다.

“상훈이도 인터뷰할 거니까 걱정 말고. 지금 가면 안 늦으려나?”

“어, 그래, 먼저 가라. 언니가 전화 한 통 넣어둘게. 학부모회 임원으로서 이 정도는 해줘야지. 학교운영에 도움도 될 테니까.”

진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학교든 좋은 일로 신문에 오르는 것을 기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선혜가 급하게 집을 나갈 때, 오여사는 입 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최대한 교양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

그 시간, 4학년 4반 교실에서는 한참 창체활동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오늘의 주제는 직업 탐색이었다. 각자 책을 한 권씩 읽고 책 속에 나오는 인물의 직업에 대해 모둠별로 고민하고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그 후, 내용을 정리하여 교실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저희는 소방관 아저씨와 경찰아저씨들에 대해 발표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저희는 의사선생님에 대해 발표하겠습니다. 저희 모둠의 하연수 학생의 아버지가 의사선생님이셔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상입니다.”

각 모둠의 발표가 끝날 때마다 아이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정리된 내용은 교실 뒤편의 게시판에 붙여서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저희 모둠에서는 5가지의 직업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중에서 만화가와 과학자에 대해서 발표하겠습니다. 두 직업은 모두 창의성을 가져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만화가는 그림도 그려야 하고 글도 써야 하기 때문에 머리가 똑똑해야 하고, 과학자는 어려운 수학문제나 학문들을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머리가 똑똑해야 합니다. ···이상입니다.”

단유는 각 모둠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주의 깊게 들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직업도 있었고, 고민을 해 본적도 없는 직업도 있었고, 한 번쯤 생각해봤던 직업도 있었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웠던 점은 세분화된 직업의 다양성과 전문성이었다. 자신이 줄곧 살았던 세계에서 직업이라 하면, 고작 벌목꾼, 농부, 약초상, 대장장이, 사냥꾼 등이었고 기사라는 것은 직업이라기 보단 계급이었다. 때문에 의사, 변호사, 검사, 소방관, 경찰, 물리학자, 만화가, 영화감독 같은 직업은 단유가 고민하는 꿈과 목표에 대해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솔직히 단유는 그 모든 직업을 다 경험해보고 싶었다. 의사가 돼서 사람을 고쳐주고도 싶었고, 변호사가 돼서 사회 정의를 일해 일하는 모습도 상상해보고, 소방관이 돼서 사회 안전을 위해 출동하는 모습도 그려보고, 물리학자가 돼서 자신이 매일 공부하는 물리학의 끝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저희는 모델과 연예인에 대해서 발표하겠습니다. 저희 모둠에서 읽은 책에서는 동물나라에서 가장 잘 생긴 여우가 밍크코트를 입고 패션모델로 나옵니다. 여우가 입은 밍크코트가 많이 팔리게 되면서 여우가 인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모델이 들고 있는 가방을 사람들이 많이 삽니다. 우리 모둠에서도 세 사람이 같은 가방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좋지 않은 모델은 상품을 팔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델이 중요합니다. 우리 반 반장이 도서관 모델일 때, 사람들이 도서관을 많이 갔다고 합니다.”

“와!”

아이들이 환호를 질렀다. 단유는 난데없이 거론되어 어리둥절했다.

“내가 모델?”

모델이라는 것에 큰 자각이 없었던 단유는 새삼 자신의 첫 사회활동에 대해 인지를 했다.

“그렇네? 우리 반에도 모델이 있었네? 단유야, 모델 할 때 어땠어? 친구들한테 니가 겪었던 모델에 대해 발표할 수 있겠어?”

단유가 엉거주춤하며 일어섰다.

“저, 솔직히 별로 말할게 없는데요. 그냥 사진 찍으면 된다고 해서 사진을 찍었을 뿐인데요.”

“몇 장 찍었어?”

한 아이가 돌발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어··· 모르겠습니다. 아침부터 계속 찍었는데 많이 찍은 것 같긴 한데 몇 장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홍보포스터는 보통 수십 장에서 수백 장의 사진을 찍고 그 중에 가장 잘 나온 사진을 뽑아서 포스터를 만든다고 해요. 그렇죠?”

선생님이 부연설명을 해줬다.

“아, 예. 그렇습니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찍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찍을 때마다 카메라감독님이 자세를 바꾸라고 지시를 해주시고, 표정도 지시를 해줬습니다. 그래서 웃었다가 웃지 않았다가 바꿔 가면서 찍었습니다.”

그 후로도 아이들의 폭풍 질문 세례가 이어지자, 원활한 진행을 위해 선생님이 적절히 끼어들어 아이들의 질문을 막았다.

“자, 여기까지만 듣고 다음 모둠 발표도 들어야죠?”

다른 모둠의 발표가 이어졌고, 선생님은 힐끔 시계를 보았다. 10분 뒤 수업종이 울릴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교실 밖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는 여기자와 인터뷰도 해야 된다. 그 전에 아이들이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을 사진 찍고 싶다고 하니, 그것도 고려하면 지금쯤 들어오시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잠깐 그 전에 오늘 기자님이 오셔서 여러분들 수업 참여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싶다고 하셨어요. 여러분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모델이 돼야 하는 거예요.”

선혜는 아이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교실로 입장했다. 특히 상훈은 이모가 교실에 들어오자 괜히 신이 났다.

“우리 이모야!”

“정말?”

선혜는 괜히 이모소리 들으니까 아줌마 취급 받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결혼도 안한, 이제 겨우 30대 초반인데. 선혜는 억지로 웃으며 아이들에게 계속 창체활동을 진행하도록 유도하고 그 틈에 자연스럽게 나올만한 컷을 남겼다.

그리고 수업이 끝났다. 종례를 마친 후 선생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선혜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하실래요? 아니면 상담실에서 하시겠어요?”

“여기서 하죠.”

아이들이 모두 빠진 교실에서 선생님과 단유, 상훈만 앞에 모여 인터뷰를 시작했다.

초여름 따뜻한 오후 햇살이 책상 위로 온기를 남기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