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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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화요일 주번일 때 상훈이가 먼저 와서 도와줬습니다. 도와달라고 말 안했는데도 먼저 와서 교탁과 칠판 정리하는 걸 도와줘서 고마웠습니다.”
“상훈이가 교실에서 쓰레기 줍는 걸 보았습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는데 상훈이만 쓰레기를 주워서 버렸습니다. 교실 환경 미화를 위해 열심히 한 상훈이한테 고마웠습니다.”
“수학문제가 어려워서 상훈이한테 물었는데, 친절하게 풀어주워서 고마웠습니다.”
“아침에 학교 올 때마다 상훈이가 이름을 불러주면서 반겨주워서 고마웠습니다.”
“쉬는 시간에 교실에서 장난치다가 넘어졌을 때 상훈이가 달려와서 다친 데 없냐고 물어봐주었습니다. 그 때 상훈이한테 고마웠습니다.”
아이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서로 경쟁하듯 손을 들었고, 단유가 지명하면 일어나서 상훈이에게 고마웠던 점을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조금 전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반이 떠들썩해지면서 혹시 옆 반에 방해라도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았고, 서로 게임하듯 경쟁적으로 손을 들어서 발표를 했다. 상훈을 바라보았다. 상훈은 다른 의미로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눈꼬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대신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모양새가 귀여워 보이기만 했다.
이후로 4반은 매주 감사의 인사 시간을 정했다. 한 주 동안 고마웠던 친구를 정해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 내용을 부반장이 적어 교실 뒤편 게시판에 붙이기 시작했다.
『3월 4주의 고마운 사람 ? 지상훈』
가장 첫 장을 장식한 상훈을 필두로 여러 아이들의 이름이 교실에 걸리기 시작했고, 학급 분위기는 이보다 좋을 수 없다는 듯 화기애애하게 변해갔다. 선생님은 자신이 이것을 ‘지시’했다면 결코 이런 결과를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기적 같은 일이었다. 자발적으로 나선 일이었기에 더욱 흥미를 가지고 이어나가는 이벤트가 되었고, 아이들은 말 그대로 ‘솔선수범’을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그 와중에도 단유는 앞장서지 않았다. 소년의 목표가 어디서든 튀지 말자, 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수업시간에 발표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가끔 가다 학생들 사이에서 생기는 말싸움이나 분쟁이 있을 때는 늘 앞장서서 싸움을 말리고 중재했다. 있는 듯 없는 듯 행동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묵묵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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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지난 5년간 단 하나―제대로 듣기―만 이루기 위해 집중했던 시간을 통해 인내심이나 끈기가 많이 생겼다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지 학기 초의 인내심은 이내 사라지고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물리학은 혼자서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자료 조사의 한계도 있지만, 혼자서 궁리하고 연구해도 용어나 개념의 정의 등을 혼자서 이해하는데 한계를 느낀 것이다. 기웅이 과외를 해 줄 때는 이런 부분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는데, 기웅이 졸업을 하고 보육원을 나간 뒤로는 도움을 얻을 길이 막혀 버렸다.
여기에 단유의 성격이 한몫을 했다. 쉽게 도움을 요청하는 성격도 아니고 넉살좋게 다가가는 성격도 아니다 보니, 주변에 단유의 공부를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애초에 선생님들에게 묻는 것은 포기했다. 지난 과거의 일―교무실 습격(?)사건―을 통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홀로 한계를 뚫는 게 어렵다보니 단유는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덕분에 그간 눈 밖에 나 있던 국어나 사회, 예체능 계열과 운동 쪽으로도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특히 두드러지게 보이는 면은 체육 쪽이었다. 일단 눈으로 보일만큼 성장 속도가 빠른데다가 체감하기가 빠른 면이 있어서 더욱 신이 나는 면이 있었다.
“와, 몇 개야?”
“20개 넘은 거 같은데?”
철봉 앞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모여 다들 단유의 턱걸이를 보고 있었다. 나이답지 않게 불끈 솟은 이두근은 남자 아이들의 로망이었고, 여자 아이들의 판타지였다.
“그만.”
선생님의 신호로 단유는 철봉에서 내려왔다. 진작에 힘이 부족해 내려왔던 아이들과 몰려있던 반 아이들 모두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이제껏 보지 못한 괴력은 단유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반 아이들의 체력 평가를 위해 곁에 서서 감독하던 선생님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까지 교직 생활을 하는 동안, 초등학교 4학년이 턱걸이 24개를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프로에서나 가끔 나올법한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니 신기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시선이 몰린 상황에서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법. 선생님은 빨리 교무실로 달려가서 5반 선생님을 붙잡고 수다를 떨고 싶었다.
단유는 꾸준히 운동을 계속했다. 달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틈틈이 날 때마다 운동장을 돌거나, 턱걸이를 하거나, 팔굽혀 펴기를 하는 정도의, 체육 교과서에 나오는 정도의 개인 운동만 했다. 단, 디아트리의 호흡법을 지키면서 했을 뿐이다.
물론 지금이야 빠르게 자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정확히 말하자면 불균형 상태에서 몸을 단련했던 기간의 숙련도와 지금의 성장이 일치되는 순간부터는 몸의 성장이나 발달 속도가 느려질 것이다. 하지만 느려진 후의 일을 미리 대처할 방법이 없는 지금은 당장 운동의 성과가 눈에 보인다는 사실이 즐겁고, 땀을 흘리며 몸을 훈련하는 자체가 재미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보육원 더비에서의 포지션이었다.
“석고야, 여기! 여기!”
건너편 골문 근처로 달려가던 명수가 소리쳤다. 단유는 손에 든 공을 살짝 띄운 후 정교한 컨트롤로 공을 찼다. 공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다 정확히 명수의 발 앞에 뚝 떨어졌다. 정말 이거 하나만큼은 조금 과장해서 국가대표 급이다. 허구한 날, 골킥을 하다 보니 숙련도가 거의 끝을 채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이스 패스!”
그 뒤로도 단유는 골문 앞에서 2시간을 서 있었다. 가끔 중학생 형들이 차는 공을 막기도 했지만, 이제 단유가 서면 거의 들어가는 골이 없다시피 했다. 아주 가끔씩 절묘한 2:1패스가 이루어지면서 골을 먹을 때는 단유도 어쩔 수 없지만, 그 외에는 단련된 골키퍼로서의 감각과 꾸준히 연마된 체력과 근력이 실점을 막았다.
“석고야, 수고했어.”
이마에 비 오듯 땀을 쏟아내는 명수가 와서 어깨동무를 했다. 축축한 소매 자락이 단유의 뒷목을 짓누르지만 개의치 않았다. 조금 찝찝하면 어때.
“내가 진짜 오늘은 한 골 더 넣으려고 했는데 봐준 거야, 알지? 오늘 점심 때 2반이랑 시합하면서 너무 힘을 썼나봐. 그래도 2반이랑 할 때는 내가 2골 넣었거든? 그러니까 오늘은 3골을 넣은 거야. 해트트릭이잖아? 그 정도면 거의 축구선수라고 부를 정도 아닌가? 더 넣을 수 있었거든? 형들이 불쌍해서 봐 준건데, 나도 너네 반처럼 감사장 같은 거 받아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오늘 너무 배고프네. 오늘 식당 밥 뭔지 알아?”
“미역국, 제육볶음, 멸치볶음, 김치”
“제육볶음 나오는 거야? 야, 그럼 이렇게 걸어가면 안 되지. 뛰자!”
엉겁결에 명수를 따라 보육원 본관으로 뛰어갔다. 현관을 지나는데,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카키색 자켓을 걸치고 색이 바란 청바지와 때 묻은 운동화를 신은 여자였다.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여자는 안경을 추켜 올리다가 단유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이내 단유는 시선을 돌리고 명수의 뒤를 쫓았다. 여자 역시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는 두 소년을 힐끔 보았을 뿐, 별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여자가 두 아이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고 있을 때, 옆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뭐해?”
돌아보니 양기자가 어깨에 맨 검은 양가죽 크로스백을 고쳐 매고 있었다.
“아니에요. 일은 다 보신건가요?”
“여기 스케치는 끝난 거야?”
“아, 대충 둘러 봤어요. 도서관도 있고, 영상실이나 영아놀이방이나 뭐 그냥 있을 거 다 있던데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어떤 사람들이 일하는지, 그리고 그 사람들 전화번호라도 따 놓고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하다고 몇 번을 얘기해?”
“그건 진작 했죠. 행정실 직원이랑도 명함 나눴고, 생활지도원 몇 사람 전화번호도 따 놨죠.”
주위를 슬쩍 둘러본 여자가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근데, 단순히 보육원 취재차 온 거 아니죠? 무슨 일 있는 거죠?”
“일은 무슨···. 지난 연말에 인평시 복지예산 관련해서 말이 많았잖아. 그래서 조사하는 거라니깐.”
보궐선거와 맞물리면서 복지예산 운용실태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로 떠 오른 적이 있었다. 기관의 예산안 중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복지 예산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점검하자는 취지의 기사를 쓰겠다는 이야기는 보육원에 오면서 들었다. 하지만 여기자는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자의 촉이라는 게 발동했다.
“너 촉 좋아하지 마라. 촉 좋아하다가 고소미 먹고 펜 놓은 사람 한 둘이 아니다.”
“우와, 선배. 선배가 그런 이야기 할 줄은 몰랐네?”
“선배를 뭐로 보는 거야? 내가 사회부 10년, 정치부 10년이다. 촉으로만 살았으면 진작에 쫓겨나서 지금쯤 치킨 다리 튀기고 있었을 거야.”
양기자가 구겨진 신발 뒷창을 고치고 일어났다.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후배의 시선에 뒤통수가 따가웠다. 하지만 촉으로만 살면 위험하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바로 지금 양기자가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정말 위험할 뻔 했으니까.
“기자는 발로 뛰어야 기자야.”
아네스 보육원의 전 사무국장이 준 서류만 믿고 기사를 올렸다간 정말 제대로 갈 뻔했다. 행정과장이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그 서류의 정체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대로 발표했었을 때 양기자는 아마 일주일 내로 짐 싸서 집으로 돌아가 법원의 출석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행정과장의 이야기를 100% 믿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점은 재단 이사회 내의 암투가 있었고, 그 암투에 자신이 이용될 뻔 했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분명 제대로 캐내면 좋은 기사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재작년의 일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전국구급 뉴스가 될 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좀 더 준비가 되어야 했다.
“이번 주말에 서울에 가서 비싼 술이나 먹고 와야겠다. 지방은 놀 만한 곳이 없어.”
양기자의 중얼거림에 후배는 입술을 깨물었다.
“중앙이었군요.”
서울로 가서 취재하겠다는 말은 곧 전국구급 기사일지도 모른다는 말. 양기자는 능청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아까는 뭘 보고 있었어?”
“아, 아까 어떤 꼬마가 지나가는데 얼굴이 낯이 익더라고요.”
“아마 도서관 홍보모델일거야.”
“도서관이요?”
“시립도서관 홍보모델. 작년까지도 계속 사용한 포스터였으니까 오다가다 보면서 얼굴 봤을걸? 왜 있잖아, 책 읽고 있는 분위기 있는 꼬마 포스터. 사진 잘 찍혔다고 너도 한 마디 했던 거 같은데.”
“음··· 아! 걔!”
“그래. 걔.”
양기자는 주차된 승용차로 향했다.
“아, 피곤해. 갈 때는 니가 좀 운전해라. 난 눈 좀 붙여야겠다.”
“그러죠. 대신 운전비는 확실히 쳐 주셔야 합니다.”
“아까 줬던 거 아닌가?”
“아까요?”
“저기 현관에서.”
여기자는 ‘서울’이란 힌트를 주지 않았냐는 양기자의 말에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차키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사진이랑 실물이랑 조금 다르네요.”
“뭐가?”
“사진으로 볼 때는 되게 묘한 느낌이 있었는데, 실물은 그냥 평범한 아이 같아서요.”
“당연한 소릴 하고 그러네. 아무리 지방 시립도서관이라도 포스터로 쓰일 사진인데 포샵처리 안했겠냐?”
“그런가?”
이윽고 차에 시동이 걸리고, 불편한 소음을 뒤로 한 채 보육원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