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2화 (92/956)

경쟁(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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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수업이 모두 끝난 뒤, 단유는 운동장 스탠드에 나와서 아이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6교시(2시~3시 사이) 정도 되면 운동장은 거의 텅 비게 된다. 특별한 체육교과를 하는 반이 없는 이상 고학년들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저학년 아이들은 이미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학원으로 향했다. 때문에 이 시간에 학교에 남는 아이들은 학원차를 기다리거나 놀다 가려고 하거나 혹은 고학년 학생이 마칠 때까지 학교에 남아야 하는 아이들 정도였다. 그런 아이들이 뭉쳐 운동장을 마음껏 활보했고, 단연 그 중심에는 명수가 있었다.

명수는 날아다니듯 뛰어다니며 아이들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그간의 경험치가 무럭무럭 쌓여 어지간하지 않으면 또래 중에서 명수를 막기 힘들 정도였다.

“······.”

아이들이 축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의외로 조용하다. 씩씩거리며 거친 숨소리만 날 뿐, 오고가는 대화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어른들이 패스해라, 수비해라, 공격해라, 막아라, 때려라, 이 새끼, 저 새끼 떠들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느라 시끄럽다. 저 순수한 아이들은 그저 공이 가면 발이 가고, 멀어지면 달려가고, 가까우면 차고 본다. 혹시 축구 동아리 활동이나 유소년 클럽이라도 다니는 아이들처럼 기술이라도 익혔다면 모를까, 막 차고 막 달려드는 저 무리 속에서는 명수가 가히 조자룡 급이었다.

“와! 고올!”

명수는 화려한 드리블로 아이들을 제치고 슛을 넣은 뒤 세레모니를 하며 운동장을 크게 돌았다. 보육원 더비에서 비록 중학생 형들의 양보가 있었다지만, 1학년 때부터 단련된 축구 실력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단유는 그 자리에 끼지 않았다. 하루 종일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던 문제 때문이었다. 어제 보육교사의 말을 들은 뒤, 오늘은 상훈의 행적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랬더니 보였다.

상훈은 부지런했다.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칠판 정리와 교탁 정리를 손수하고, 몇 몇 친구들을 불러 함께 책상 줄을 맞췄다. 모둠 활동 시에는 옆 모둠이 돌아볼 정도로 주도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임했다. 쉬는 시간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쓰레기통 주변을 정리한다든지, 주번의 일을 도와준다든지, 정 할 일이 없으면 아무에게나 다가가 대화를 시도하여 친밀감을 표현하곤 했다. 하루 수업이 모두 마친 뒤에도 남아서 청소하는 아이들 주변 정리를 도와주었다. 아이들은 상훈을 보면 웃었고, 고마워했고, 칭찬했다.

단유는 생각이 많아졌다.

‘상훈이는 부지런하고, 착하고, 친절하고, 똑똑하다.’

그렇다면 자신은 부지런하지 않을까? 착하지 않은 걸까? 또 반장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유림이 이야기한 솔선수범은 무엇일까? 너무 많은 물음이 던져지지만 단유는 어느 것도 정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정답이 없는 문제일까?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문제에 부딪힌 단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

“유민아빠, 와서 식사하세요.”

“응.”

거실에서 TV를 보던 유림의 아버지는 구수한 청국장 냄새를 맡으며 연신 침을 삼키던 중이었다. 아직 아이들은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았기에 단 둘만 식사를 먼저 했다. 작년까진 유림이 함께 식사를 했지만, 첫 째 유민과 둘째 지호가 모두 중학교에 들어가고 유림까지 4학년이 되면서 학원을 하나 더 추가시켰더니, 이 시간에 집에 남은 사람은 두 사람 밖에 남지 않았다. 아버지가 국을 한 입 떠먹고는 기분 좋게 웃었다.

“당신 내일 유림이네 학교 간다고 했었지?”

마주 앉은 유림의 어머니가 밥을 한 입 뜨면서 대답했다.

“예, 근데 올해는 좀 그만하고 싶네요. 위에 애들이 모두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이제 그만 시달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요.”

작년까지 유림의 어머니는 유림이 다니는 학교의 운영위원회 소속 학부모위원 부대표를 맡았었다. 유림 때문이라기보다는 큰 애인 유민이 전교 부회장을 맡는 바람에 떠맡은 직책이었다. 그 전에도 큰 애가 반장이나 부반장을 도맡아 하던 바람에 지난 4년간 줄곧 임원직에 있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두 애도 중학교로 진학을 한 마당인데다, 유림이 비록 부반장직을 맡긴 했어도 임원직은 맡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유림이네 반에 상훈이라는 아이 엄마가 좀 극성이더라고요? 상훈이 엄마가 그냥 임원 대표 맡아서 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래, 당신 그동안 마음고생 심했잖아. 이제 그만할 때도 됐어.”

유림 엄마는 임원직을 맡으면서 그간 속앓이를 많이 했었다. 실속도 없는, 명예직 같은 임원 대표를 맡는 바람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좋지 않은 대우를 받을 때도 나서기가 어려웠다. 의외로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가령 지호가 수업태도가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선생님께 혼이 나더라도 나서지 못했다. 다른 엄마들처럼,

“우리 애가 뭘 잘못했다고 혼내요?”

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명찰뿐인 임원이라도 임원이었기에 체면이 있어 나서진 못하고 애꿎은 아이만 다그치기 일쑤였다. 물론 다른 두 아이가 연좌되어 피해를 볼까 두려운 마음에 나서지 못한 면도 있었다. 또 학교 교권에 대항하는 학부모라는 이미지가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그 때문에 지호가 6학년 때 많이 힘들어 했었다. 쌍둥이 누나가 학교에서 잘 나갈 때, 알게 모르게 비교를 당하면서 위축된 면도 없잖아 있던 지후였는데, 중학교 진학과 동시에 남중, 여중으로 갈라지면서 요즘은 밝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학교 행사가 왜 그렇게 많은지, 여기 저기 쫓아다니느라 바쁘다보니 자연히 집안일에 소홀하게 될 때도 있어 유림아버지의 눈치를 볼 지경이었다. 한 번은 유림어머니도 힘들어하고, 아이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니 유림 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었다.

“그럴 거면 다 때려 치고 나와!”

그래도 명색이 전교 부회장 엄마인데다 1년만 참자는 생각으로 지호도 달래면서 힘겨운 시간을 보냈던 유림어머니였다.

“그 엄마는 사정을 잘 모르나?”

아버지가 작년 기억이 떠오르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유림아버지도 마음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에 대한 걱정과 사랑하는 아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도와줄 방법이 없어 애만 태웠던 1년이었다.

“예전에 몇 번 봤는데, 대가 센 여자더라고요. 이런 거 좋아하는 엄마들은 기를 쓰고 하려고 달려들 데요.”

“몇 십 년이 지나도 똑같네, 똑같아. 치맛바람 날리면 그게 애들한테 좋은 줄 아나?”

“단순히 치맛바람이 아니고 그것도 명패가 붙는 직함이라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엄마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나 참. 그게 다 허영이야. 쥐꼬리만한 권력도 권력이라고 달려드는 꼬락서니라니. ···이 나라 교육 시스템은 애들 교과목을 바꿀게 아니라, 근본적인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니깐.”

아버지가 혀를 차며 국을 한 입 떠먹었다. 짭짤한 청국장의 구수한 향이 입 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족쇄지, 족쇄야.”

아버지는 중얼거리며 다른 화제 거리로 넘어갔다.

“주말에 부부동반 모임 갈 때, 뭐 입고 가지?”

****

금요일, 학교에 등교한 단유는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교실 앞에서 주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훈을 발견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몰라도 서로 웃겨죽겠다는 듯 깔깔거리며 칠판과 교탁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침 등교하던 유림이 단유 옆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을 걸었다.

“뭘 봐?”

단유가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상훈이.”

“왜?”

“원래 반장이 저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반장이? 왜? 저건 주번이 할 일이지.”

단유는 눈을 껌벅거리며 유림을 돌아보았다.

“그래? 그럼 상훈이는 왜 주번 일을 도와주는 건데?”

“지가 도와주고 싶어서 하는 거겠지.”

“반장 일이랑 상관없이?”

그제야 유림은 단유가 자신이 했던 말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건 반장이 할 일은 아니지, 그래도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니까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할거 아냐? 저런 애가 반장이 되었어야 한다고. 자기들이 잘못 선거한 거 아닐까 생각하지.”

“저것도 솔선수범이라는 거야?”

“당연하지 않아? 친구의 일을 도와주는 걸 솔선수범한다고 이야기하는 거잖아.”

단유는 그제야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즉, 반장의 일은 아니지만 솔선수범해서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의 마음이 바뀐다는 거야?”

“그렇지 않을까?”

“니 마음도 그래?”

“응?”

“상훈이가 반장이 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유림은 입을 꾹 다물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의 눈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롱하는 말도 아니고, 의기소침해 있는 말도 아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다, 라는 게 느껴졌다.

“···아니. 난 니가 반장이 되길 잘했다고 생각해.”

“왜?”

“몰라. 그냥 니가 반장이니까 니가 알아서 해.”

괜히 얼굴이 붉어진 유림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벌떡 일어나 교실 뒤편의 사물함으로 갔다. 단유는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상훈을 바라보았다. 상훈은 등교하는 아이들한테 밝은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

점심시간이 되었다. 급식실에서 식사를 하던 남자 아이들이 허겁지겁 점심을 해치우고는 운동장으로 뛰쳐나가려 하던 때였다. 4반 아이들이 모여 있던 식탁 근처로 다가온 건장한 소년이 있었다.

“야, 우리 반이랑 축구 시합하자.”

명수였다. 단유는 피식 웃었다. 입가에 묻은 밥풀이나 떼고 말하지. 그 때였다.

“그래, 우리 시합하자.”

상훈이 일어나 화답했다.

“축구할 사람?”

상훈이 반을 둘러보며 아이들에게 의사를 물어보았다. 그 때.

“야.”

명수가 상훈을 불렀다. 상훈은 고개를 돌려 명수를 바라보았다.

“응?”

“니가 왜 나서?”

“응?”

“반장이 있는데 왜 니가 나서? 너 체육 부장이야?”

“응?”

상훈은 체육부장이 아니었다.

“난 정식시합을 제안한 거야. 대표가 결정해야지, 왜 니가 나서서 그래?”

상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냥 노는 거 아냐. 우리는 정식으로 시합을 요청하는 거야. 난 우리 반 반장을 대신한 체육부장이기 때문에 너네 반장한테 이야기한 거야.”

이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인가. 순간 명수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야기한 건 줄 알았다. 그간 공부를 도와주긴 했었지만, 명수가 저렇게 논리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단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야, 석고. 할 거야 말거야?”

“······.”

단유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잠시 생각을 한 후 대답했다.

“명수야.”

“응?”

“넌 우리 반에 정식으로 시합 요청 한 적 있어?”

“지금 하잖아?”

“지금 하면 우리가 어떻게 받아? 우리 반에서도 의견을 수렴해서 결정해야 할 문제를 니가 하자고 하면 우리가 어떻게 바로 대답을 해.”

“반장이잖아?”

단유가 머리를 짚었다.

“그러니까, 그런 건 반장이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는 문제인데다가, 우리 반의 아이들이 그 시합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하겠다면 어떤 선수로 구성할 지도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점심시간에 불쑥 나타나서 정식 시합 요청이니 하면 우리가 어떻게 그걸 받아들이겠어?”

“그런가?”

“너네 반은 선수가 정해졌어?”

“응. 정해졌으니까 말했지.”

“언제 정했는데?”

“음··· 어제 점심때?”

“그런데, 우리 반에는 지금 알려주면서 당장 시합하자는 거야?”

“그렇네?”

명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정하면 안 돼? 우리 반 애들 기다리는데?”

“순서가 틀렸잖아. 미리 이야기를 해줬어야지. 너네 반은 준비가 됐는데 우리 반은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시합이 안 되지 않겠어?”

“그럼 준비하면 얼마나 걸려?”

“우리 반에서도 의견을 물어보고 결정해야 하니까 당장은 어려워. 시합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구성해서 이야기 해줄게.”

“그래, 알았어. 그럼 오늘은 우리 반 애들끼리 하지 뭐.”

명수는 손을 흔들고 자기 반으로 돌아갔다. 4반 아이들의 식탁이 조용해졌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니까 각자 식사 계속하고, 오후에 종례 전에 잠깐 이야기하는 게 어때?”

단유의 제안에 아이들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수긍했다.

“그래, 그러자.”

“그럼 선생님한테 시간 좀 내달라고 할 테니까 오후에 회의하자.”

“콜!”

아이들은 기분 좋게 이야기하고는 식사를 계속했다. 단유도 이내 식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때까지도 상훈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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