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5)
-------------- 91/952 --------------
“너 나랑 이야기 좀 해.”
유림이 쉬는 시간에 단유를 잡아끌었다. 한동안 얌전히 있기에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인데?”
“너 왜 발표 안 해?”
잔뜩 약이 오른 목소리로 단유를 다그치는 유림이 생경스럽게 여겨졌다.
“응? 무슨 말이야?”
“상훈이만 발표하잖아. 넌 왜 안하냐고?”
단유는 유림이 자신을 혼내는 모습이 선뜻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일단, 굳이 내가 발표를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고, 상훈이가 발표하는 게 어떤 문제라도 되는 거야?”
단유의 되물음에 유림이 당연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넌 반장이잖아. 반장이면 솔선수범해야지.”
일단 전제가 합의되어야 대화가 될 것 같았다.
“솔선수범이라는 게 수업이나 학교생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내가 소극적인 면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게. 하지만 난 솔선수범이란 의미가 수업시간 발표를 하느냐 안하느냐를 두고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수업태도에 관한 면에서 수업에 집중을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해.”
“···넌 말을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어.”
“수업시간에 딴 짓하지 않고 선생님 말씀 잘 듣는 태도가 학생의 본분이고 솔선수범해야 할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야.”
유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발표도 중요해. 발표를 해야 수업에 잘 참여하는 학생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야.”
“누가?”
“선생님이.”
“선생님?”
“···아이들도.”
“아이들이?”
“그래.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만약 니가 맨날 발표는 안하고 책만 읽고 있으면, 아이들이 널 반장답지 않다고 생각할거야.”
신선하고 획기적인 관점이라고 단유는 생각했다.
“하지만, 난 굳이 궁금한 게 생겨서 질문하는 게 아니면 나서고 싶지 않아.”
“아우, 답답해.”
가슴을 콩콩 두드리는 유림. 영문을 모르는 단유는 그저 유림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바보야. 지금 엄마들이 상훈이만 발표하게 만들고 있단 말이야.”
“왜?”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런데 상훈이를 진짜 반장처럼 만들게 하려고 한다고 들었어.”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이야기, 라고 단유는 생각했다. 단유가 어리둥절해 하자 유림은 더 이상 자신의 말로는 단유를 설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단유를 한차례 노려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단유는 다른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는 제쳐두고, 사실관계만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상훈만 발표할 수 있도록 지시를 내렸다. 상훈은 매시간 발표를 한다. 어머니들은 상훈이를 진짜 반장으로 만들려고 한다?’
엄연히 학급 선거를 통해 반장으로 뽑힌 사람이 있는데, 또 다른 반장을 만드는 제도가 있나? 지난 3년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문제라 단유는 고민에 빠졌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시스템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만약 그 말대로라면, 자신은 가짜 반장이 된다는 말일까?
‘진짜 반장과 가짜 반장의 차이는 뭐지?’
단유는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웅이라도 있으면 물어보기 좋겠지만, 기웅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주변에 이 사실을 털어놓고 의논할 사람이 있는지를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았다.
****
“자, 이거 먹으면서 해.”
오여사가 군것질거리를 접시에 담아 상훈의 책상에 올려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오여사는 흐뭇한 미소를 띠며 상훈을 바라보았다. 현재 상훈은 내일 있을 교과목의 예습을 하고 있었다. 일정부분은 학원에서 지도강사의 특훈(?)으로 미리 발표할 내용이 정리된 상태였고, 오여사도 한 손 거들어 둔 상황이었다. 상훈은 미리 준비된 발표문(?)을 달달 외워가면서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엄마는 처음에 니가 반장 선거 떨어져서 많이 실망할 줄 알았어.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것을 보니 얼마나 대견한지 몰라. 우리 아들, 진짜 반장이 뭐라고?”
“아이들과 선생님께 인정받는 반장이 진짜 반장이에요.”
“그렇지.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가짜 반장이요.”
“그래. 아들처럼 열심히 수업 준비하고 발표도 하고 그래야 진짜 반장인거야. 알았지?”
“네. 제가 진짜 반장이 될 거에요.”
“넌 이미 진짜 반장이란다.”
상훈은 다시 노트로 눈을 돌렸다. 책상 위 탁상시계의 바늘이 12시를 지나고 있었다.
****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어김없이 상훈의 독주가 이어졌다. 선생님은 난감해 하면서도 상훈의 독주를 도왔고, 아이들은 상훈의 발표가 끝나면 박수를 쳤다.
단유는 묘한 교실 분위기를 둘러보다가 이내 선생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선생님도 단유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
‘넌 왜 발표를 안 하니?’
라고 묻는 눈이었다. 하지만 단유에게서는 어떤 답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은 선생님으로서도 거의 경험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어느 정도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눈치는 챌 수 있었다.
이것은 정치였다.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성공하기 힘든 정치적 술수였다. 그리고 어쩌면.
‘에이, 너무 나갔나?’
선생님은 상념을 멈추고 수업을 이어나갔다. 내일 있을 ‘학부모 총회’에 맡길 위원회 임원 명단을 생각하기에도 복잡한 머리로 딴 생각을 할 여력은 없었다.
하지만 머리가 복잡한 것은 비단 선생님뿐만이 아니었다. 단유는 어젯밤 들은 이야기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어제 저녁, 단유는 보육 교사에게 찾아갔다. 사실 보육교사랑 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눠본 적이 없었던 단유였던 터라 이런 시도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육원에서 물어볼 사람이라고는 원장선생님이나 행정 과장, 보육교사와 생활지도원들 뿐인데―행정과 직원들은 거의 공기 같은 존재였다―, 저녁시간에 비교적 편하게 물어볼만한 사람은 보육교사들 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넉넉한 몸매를 지닌 김명숙 선생님을 찾아갔다. 명숙은 단유가 이 보육원에 들어올 때부터 계속 일해 온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물어볼 게 있어요.”
“응?”
생전 이런 적 없던 아이가 갑자기 물어볼 게 있다고 찾아오니 명숙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보육원내에서도 유별나기로는 명수 못지않은 단유였다. 물론 명수와는 다른 의미로 유별난 아이였지만, 어쨌든 선생님들한테 폐 안 끼치고, 질문도 거의 없이 늘 도서관에 살던 아이가 갑자기 찾아오니 보육교사로서는 순간적으로 좋지 않은 생각부터 떠올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니?”
혹시나 공부와 관련된 거라면, 다른 젊고 유능한 생활지도원 선생님들을 추천해줄 요량이었다. 그러나 단유가 질문한 것은 뜻밖의 것이었다.
“진짜 반장이랑 가짜 반장이란 게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니?”
단유는 반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했고, 유림의 이야기까지 덧붙였다. 명숙은 느닷없는 이야기에 영문을 몰라 하다가, 단유의 설명이 이어지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보육원 내에서만 생활하는 보육교사라지만, 아이들을 맡아 생활한지 벌써 20년에 가까운 명숙이었다. 초등학교의 운영 실태 정도는 원내 식당 식단표 보듯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때문에 단유의 이야기를 통해 단유의 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유추해냈다. 아이들 간의 이야기라면 이게 뭔가 싶겠지만, 학부모가 끼어들었다면 당연히 이 문제는 정치적인 상황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아마 유림이라는 아이 말대로, 상훈이라는 아이가 진짜 반장 노릇을 하려고 하나보네.”
“전 이해가 안 돼요. 왜 발표를 하는 게 진짜 반장인거죠?”
“걔가 발표만 하는 건 아닐걸? 매일 일찍 등교도 할 거고, 청소도 나서서 하거나, 혹은 친구들 문제도 나서서 도와주고 있을 거야. 교실 내 대소사를 자기가 직접 맡으려고 하고 있을 텐데? 그렇지 않든?”
단유는 상훈의 행적을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딱히 관심이 없었던 터라 상훈이 평소에 어떻게 하는 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오로지 수업시간에 거수하는 장면만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친구를 도와주는 것도 봉사의 일종이잖아요. 그런 게 반장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상훈이는 아이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거지.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서 신뢰를 얻으면 거기서 힘이 생기니까.”
“······.”
“반장이란 아이는 가만히 있는데, 나는 이렇게 나서서 너희들을 돕고 있다. 반장이란 아이는 수업 때도 가만히 있지만, 나는 손을 들고 발표도 하면서 선생님의 인정도 받고 있다. 뭐 이런 거겠지.”
“그런 게 어떻게 마음을 얻는 거란 거죠?”
명숙은 순간 대답이 궁해졌다. 실제로 궁해졌다기 보다는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표현해야 옳겠다. 아이들의 마음, 사람의 마음이 가는 방향을 논리적으로, 단유의 시선에 맞춰 구술한다는 게 어렵기도 하거니와, 어쩌면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기웅이가 니 공부를 도와주면 어떤 마음이 들었니?”
“고마웠어요. 그리고 나중에 꼭 갚겠다고 이야기도 했어요.”
“자원봉사자들이 우리 보육원에 와서 봉사활동을 하면 그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이 드니?”
“어··· 고마웠죠.”
단유는 이 순간 솔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한 번도 자원봉사자들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가져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자신이 부른 것도 아니고, 스스로 와서 ‘자기들의 일’을 했을 뿐이라고만 생각했지, 단유가 해야 할 일을 도와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보육교사는 이런 단유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했다.
“그래, 그것처럼 상훈이는 아이들을 돕고 고마운 마음을 받고 있는 거야.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수업태도를 보여서 선생님에게도 인정받는 모습을 보이는 학생이라는 인식을 아이들에게 심어 주는 거지. 그러면 아이들이 상훈이를 마치 반장처럼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와. 예를 들어서 교실에 싸움이 벌어졌어. 이 때 아이들은 너를 찾지 않고 상훈이를 찾게 될 수도 있어. 왜냐하면 상훈이가 그럴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이해를 못하겠어요. 아이들은 반장인 저를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원래는 그렇지만,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넌 그냥 가만히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기면, 쉽게 다가오지 못한다는 거지. 대신 언제나 앞장서는 상훈이를 찾아가서 중재를 부탁하게 될 거야.”
쉽게 동의하기 힘든 내용이었는데, 보육교사의 말이 신빙성 있게 들린다는 게 이상했다.
“그럼 전 어떡해야 하죠?”
“그건 너의 선택에 달렸지. 지금처럼 행동하든, 상훈이처럼 행동하든 말이야.”
나름 진지하게 대답을 해주긴 했지만, 사실 명숙은 4학년 교실에서 ‘정치적’인 상황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놀라웠을 뿐이었다. 예측되는 결과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크게 의미를 두지도 않았다. 그래봐야 초등학교 4학년 반장직인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