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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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훈의 어머니인 오여사는 속이 상했다. 1학년 때부터 줄곧 학급 반장을 해왔던 상훈이가 반장을 하지 못해서 속이 상한 것도 있지만, 하필 단유라는 애한테 졌다는 사실이 더 속상했다.
“고아가 반장이 되면 어떡해?”
고아가 반장이 되면 자신을 비롯한 학부모들이 학급 일에 나설 명분이 약해지게 된다. ‘반장 엄마’라는 타이틀로 학급 일에 나서는 것과 ‘누구 엄마’로 나서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단독으로 나설 명분이 약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부모회’라는 이름을 걸고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부모회’라는 이름을 거는 순간 오여사는 다른 학부모의 눈치도 봐야 했다.
오여사는 전화를 걸었다. 잠시간 신호가 이어지다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원이 엄마예요? 저 상훈이 엄마예요. 예. 아, 다름이 아니고 소식 들으셨죠? 예. 예. 동원이가 아깝게 떨어진 것 같더라고요. 상훈이요? 에이, 상훈이는 좀 더 경험을 쌓아야죠. 3학년 때까지 반장한 거는 그냥 애들 장난인데요. 이제 4학년이니까 자기 앞가림도 하고 그래야죠. 아마 이번 기회로 많이 배운 게 있을 거예요. 좋은 경험이었다, 생각하면 되죠. 예. 그럼요, 동원이도 씩씩하니까 고작 이런 걸로 마음아파하진 않겠죠. 그나저나 말이에요. 사실 제가 좀 걱정이 돼서요. 아니, 그 단유라는 애가 이번에 반장이 됐다고 하잖아요? 사실 걔 똑똑한 거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공부 좀 하는 거랑 반장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거랑은 다른 거잖아요.”
‘반장 엄마’라는 타이틀은 ‘학부모회’에서 세력을 결집시키는 기준이 된다. 때문에 지금까지는 전화를 받기만 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뀐 지금, 오여사는 적극적으로 세력을 결집시켜 힘을 모아야 했다. 우선은 반에서 가장, 아니 이제는 두 번째일지 모르는 강동원의 어머니를 포섭해야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성적지상주의 아니겠는가?
“그렇죠? 제가 생각해보니까 지금 단유라는 애가 반장이 된 바람에 우리 반은 지금 학부모 총회 대표로 맡길 사람이 없는 거잖아요. 이러다 엉뚱한 사람이 임원이 돼서 전교 학부모회에 나가게 되면,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네, 맞아요. 그러니까 미리 우리끼리라도 우리 반을 위해서 강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을 임원으로 지정을 해놔야 나중에 학부모 총회에 나가서도 시간 낭비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학급 임원 선거가 끝난 다음 학교에서 ‘학부모 총회’라는 이름으로 학부모를 초청한다. ‘학부모 총회’는 학교 교육 운영 방안이나 담임선생님 면담 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개최되는 것이 명목상의 이유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학부모 총회’를 통해 학부모들이 모이면 학급 담임들이 학교의 각종 위원회 소속으로 할당되게끔 학부모 명단을 올리기에 급급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당연히 여기에 이름을 올리는 학부모들은 주로 학급 임원들의 부모들이 되기 마련이다.
“아이, 참.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제가 부끄럽죠. 예. 저도 사실 예전부터 동원이 엄마가 교양도 있으시고 학식이 풍부하시니 아이들 교육문제에 앞장서실 수 있겠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거든요. 예. 그러니까요. 그래서 동원이 엄마가 이번에 한 번 대표로 나서보시는 건 어떠실지 궁금해서 이야기도 나눌 겸 전화한 거죠. 네.”
‘학부모 총회’를 통해 이름을 올린 학부모 대표들은 ‘전교 학부모회’에도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는 주로 전교 임원들의 학부모들이 대표직을 맡는 게 불문율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문제는 차치해두더라도 ‘학부모회’에 들어서게 되면, 단순히 학부모들 간의 친목과 아이들 수발만 드는 게 아니다. 학교교육과정 운영 전반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곳이 바로 ‘학부모회’이다. 이 ‘학부모회’에서 한 자리 하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사회적 지위쯤은 무시하고도 남는다. 가령 어느 학부모의 직업이 ‘검사’나 ‘판사’라고 해도 바깥의 직종일 뿐, 학교 안에서는 아무개의 아빠, 혹은 엄마에 불과하다. 아무개가 다니는 학교의 운영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학부모회’ 간부에게 힘을 못 쓰는 게 현실이다. 이 정도 파워, 권력을 아무렇지 않게 포기할 학부모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예, 예. 그럼요. 예. 그럼 나중에 또 통화해요. 예, 들어가세요.”
“거 참.”
뭐가 못마땅한지 소파에서 신문을 펼쳐보고 있던 오 여사의 남편이 혀를 찼다. 교양 섞인 가식과 넉살좋은 웃음으로 버무린 체면치례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다. 오여사가 눈을 흘기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도와주진 못할망정, 뭐예요? 그 태도?”
남편은 헛기침을 하며 보던 면을 한 장 넘겼다. 단지 저 속마음을 감추고 가식을 떠는 태도가 맘에 안들뿐이지 학부모회에 들려하는 오여사의 태도를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그 역시도 그 자리가 만만치 않은 자리인 동시에 남 주기 아까운 자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오여사는 이내 전화부를 검색해 다른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림 어머니? 예, 안녕하세요. 저 상훈이 엄마예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대화를 이어가는 오여사를 신문 너머로 흘깃 쳐다보던 남편은 이내 시선을 돌려 신문을 바라보았다. 대구 어디쯤에 사고가 났다는 사회면 기사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다음 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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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반은 임시 반장일 때부터 익숙해진 단유의 구령에 맞춰 수업을 시작했다. 국어시간은 단유가 개인적으로 관심이 적게 가는 과목 중의 하나였었다. 적어도 작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4학년이 되면서부터는 국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러분, 얼마 전에 우리가 학급 선거를 했었죠? 그리고 반장이랑 부반장도 뽑았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일주일에 한 번씩 학급회의를 하죠? 바로 그 학급회의를 왜 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공부를 할 거예요.”
국어과 교육의 목표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전인적 성장, 창의성, 문화적 소양, 공동체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 학년에도 비슷하지만 국어과 학습과정에 따라 거의 기초적인 부분을 다뤘다. 때문에 학습 목표 달성을 심도 있게 다루지도 않았던 면이 있었던 데다가, 이미 그 시점에서 단유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이 읽는 서적들을 다독하던 상태라 국어과목에 대해 흥미가 별로 생기지 않았었다. 말하자면 선행 학습의 폐해라고 하겠다.
4학년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적어도 4학년부터는 지난 학년의 과정보다 심도 깊게 들어가게 되면서 단순히 읽기, 쓰기, 말하기의 수준에서 벗어나 좀 더 깊은 생각과 관찰을 바탕으로 논리적인 학습 태도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학습 과정에서 단유는 흥미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문제가 생길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해결방법을 뜻을 모아 찾는 과정이 바로 학급 회의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단원의 목표는 설득과 경청, 자신의 의견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능력 함양이었다. 선생님은 수업을 진행하면서 새삼 단유의 지난 연설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 당시 단유가 보여주었던 연설은 분명 이 단원에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함축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기본적으로 회의를 하는 방법과 절차에 대해 공부를 했다. 단유는 선생님의 말씀에 어느 때와 같이 집중하여 들었다. 그러나 앞으로 자신이 진행하게 될 학급 회의를 생각하면 보다 신경을 써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3학년 때까지 학급회의 많이 해 봤죠?”
“네!”
“그럼 그 때 했던 회의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지 발표해 볼 사람?”
상훈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 상훈이가 이야기 해볼래?”
상훈은 지난 3년간 반장이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친숙하게 다가오는 주제였던 데다가 직접 주재까지 했던 회의 과정을 모를 리 없었다. 상훈은 학급회의 시작부터 마지막 종료까지의 멘트도 꼼꼼하게 기억해내서 발표했다.
“그래 잘했어요. 여러분들도 다 기억나죠? 그럼 이 회의가 왜 필요할까?”
상훈이 손을 들었다. 다른 아이들은 손을 들지 않았다.
“상훈이 말고 발표해 볼 사람 없니?”
손을 드는 아이들이 없었다. 선생님은 다시 상훈을 지목했다. 상훈은 마치 준비된 것처럼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반에서 필요한 물품이 있을 때요, 각자 준비하기 어려운 경우에 회의를 해서요, 선생님이나 부모님들께 공식적으로 이야기해서 준비할 수 있었고요. 또, 학급 친구들이 여름에 더울 때도 학급회의를 해서 일찍 에어컨 틀 수 있게 한 적도 있어요.”
회의라는 이름으로 선생님께 보고된 내용은 거의 동시에 학부모들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학부모들이 필요 물품을 뜻(?)을 모아 전달하거나, 혹은 선생님께 부탁(?)하여 시행 날짜보다 빠르게 에어컨을 사용할 수 있게 했었다.
“맞아요, 학급회의를 통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죠. 또 다른 거 발표할 사람?”
상훈이 손을 들었다. 이쯤 되니 선생님도 교실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선생님은 지명을 통해 아이들의 발표를 들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어서 거듭되는 상훈의 발표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상훈은 발표를 잘했다.
그 후, 다른 수업시간에도 상훈의 독보적인 수업 장악이 이어졌다. 단유야 원래 발표를 잘 하지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마저도 손을 들지 않고 가만히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은 이상한 광경이었다. 물론 단유 역시 그런 분위기를 눈치 채긴 했지만, 딱히 나서서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는 동기가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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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만 계속 발표했어.”
“잘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야 돼. 니가 걔보다 못난 게 어디 있니? 그치?”
“응.”
“그래. 학원차 늦지 앉게 타고, 갔다 오면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게.”
“응.”
통화를 끝낸 오여사는 식탁 의자에 앉아 손가락으로 식탁을 톡톡 두드렸다. 몇 몇 학부모들의 협조를 통해 반의 분위기를 몰아가는 데는 성공하는 분위기였다. 어차피 반에서 손을 들고 적극적으로 발표를 하는 아이들은 몇 되지 않는다. 그 아이들만 잡으면, 반 분위기 전체가 잡힌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타고 주도권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반장, 그까짓 거 뭐 한 학기 정도는 양보를 해야지.”
물론 단순히 2학기 반장을 노리는 포석만은 아니었다. 지금의 반장이 단순히 학급 회의라는 애들 소꿉놀이에 진행자 역할만 하도록 만들면 되는 것이다. 명목상의 반장은 단유라는 아이가 맡겠지만, 실질적으로 반을 이끌어가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자신의 아들, 지상훈이 될 것이다. 더불어 이번 주 금요일에 있을 ‘학부모 총회’에서 대표를 맡는 것도 자신이 될 것이다.
오여사는 핸드폰을 조작해 학부모 단톡방에 들어갔다. SNS에서 한참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상훈이가 그렇게 발표를 잘한다고 우리 애가 그러네요?」
「별 거 아니에요. 요즘 우리 애가 논술학원 다니잖아요? 그 학원 원장이 그렇게 실력이 좋다더니 그 효과가 나오나 봐요.」
「어머, 그래요? 」
「상훈 엄마, 거기 학원 어디에요?」
오여사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한 건 올렸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조만간 논술학원 원장이랑 식사자리를 가지게 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