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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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입술이 바짝 마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껏 여러 경험을 했지만,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일전에 혜진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달려들었던 경험은 있었지지만, 지금은 그 때와 전혀 달랐다. 40명의 반 아이들이 모두 자신만을 쳐다보는 광경은 솔직히 두렵기 까지 했다. 차라리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게 더 쉬웠으려나?
선생님은 단유가 긴장하는 모습이 또 새롭게 보였다. 뭐든 잘하는 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또 제 나이에 맞는 모습같이 보였다.
“단유야. 너무 긴장하지 마.”
선생님의 부름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단유는 호흡을 한 번 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저, 저는··· 제가 반장이 된다면, 여러분들을 위해···.”
갑자기 말을 멈춘 단유. 아이들과 선생님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단유를 앞에 세운 장본인인 유림 역시 여태 보지 못한 단유의 모습에 의아해하다가 말을 멈추기까지 한 것을 보고는 조금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과 다른 사정이 있었던 단유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저는 제가 어떤 반장으로서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제가 반장이 된다는 것을 가정하고 공약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전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약속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께 이야기드릴 수 있는 건, 여러분과 더 많은 대화를 통해 서로가 원하는 점을 찾고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치고, 지켜야 할 것은 지키면서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과도 대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 혹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들을 논의하고 합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서로가 만족할 수 있고, 화합할 수 있는 교실이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어느 한 쪽의 편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편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반장으로서 구체적 공약을 내거는 것은 사실 어려웠다. 준비가 안 된 것도 있지만, 반장이라는 직위에서 할 수 있거나 해야 하는 직무 범위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무작정 공약을 남발하는 것은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유에게 있어 약속은 어떤 경우에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이나 말은 상대를 속이는 것인 동시에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는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며, 자신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였다.
“반장으로의 책무를 다하도록 노력할 것이며, 4반의 학생으로서의 의무도 다하겠습니다. 반장으로서 태만하지 않으며, 학생으로서 나태해지지 않겠습니다.”
반장으로서의 직위와 학생으로서의 위치는 서로 상충될 수 있음을 5년 전―이곳의 시간으로는 작년―에 경험한 바가 있었다. 때문에 각자의 위치에 맞게 행동하는 자세가 요구되며, 또한 그 둘을 모두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두 지위가 모두 ‘나’를 구성하는 요소일 테니까.
“김단유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반장이자, 학생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한 책임과 가치는 자신의 이름에 대한 가치로 귀속된다. 이름은 단순히 세 글자로 구성된 단어가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사물의 고유성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될 뿐만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특정 짓는 것이다. 곧 이름은 ‘나’의 직관적 표징(表徵)이며 내재된 본질의 표상(表象)이다. 그리하여 단유에게 이름이란, 실존주의적 자아이며, 주체성을 가진 본질인 동시에 고유의 ‘나’였다.
지난 5년간의 시간에 디아트리와 안트, 신테가 알려주려 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때문에 말 한마디로 허투로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름을 내거는 행위는 이 세계와 자신 사이에 발생하는 약속의 인장(印章)을 찍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아이들은 뭔가 어마어마한 걸 들었다는 얼굴로 멍하니 단유를 바라보았고, 선생님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말을 멈추고 가만히 있을 때는 너무 긴장해서 그런가, 싶은 생각에 걱정이 들었고 다시 이야기를 진행할 때는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구나 싶었는데,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뭔가 가슴 깊은 곳까지 전해지는 울림에 아이를 바라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아마 저 아이가 뱉은 말을 글로 펼쳐놓으면 어렵지 않은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으로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전달하는 소년의 모습이 심히 감동스러울 정도였다. 이제껏 저런 연설(?)을 한 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역시 단유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구나.’
차마 밖으로 뱉을 수 없는 진심이었다.
한편, 이 연설에 감동받은 사람은 비단 선생님뿐만이 아니었다.
“와!”
침묵에 빠져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거 해주겠다, 저거 해주겠다, 하는 공약보다 훨씬 귀에 와 닿고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였다. 그동안 단유가 자신들과 조금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 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1학년 때는 제외하더라도―그 때는 동떨어진 건지 가까운 건지 파악할 정신도 없이 제 앞가림하기 바빴던 나이였다―, 2학년이나 3학년을 거치면서 단유가 수업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늘 책만 읽고 있는 모습을 봐왔다. 같은 반이 아닌 아이들이라도 부모님들께 늘 ‘전교1등 하는 단유’의 이야기를 들어왔던 터라, 어쩐지 연예인 보는 기분처럼 멀게 느껴졌던 것이 현실이기도 했다.
그랬던 단유가 ‘알아듣기 쉽게’, 자신들과 ‘함께’하겠다는 말을 진실성 있게 전하니, 그 말에 담긴 울림이 아이들의 가슴을 진동시켰다.
유림은 고개를 숙였다. 괜한 심술이 들어 무심코 일을 저질렀는데, 오히려 치명적인 반격을 당한 느낌이었다. 유림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싫어할 수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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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지금도 생각하면 완전히 감동인거 있죠?”
“아니, 뭐 조금 특이하긴 한데, 그게 그렇게 특별하다고 호들갑 떨 정도는 아닌 거 아닌가?”
시큰둥하게 받아들이는 옆 반 선생님의 반응이 답답했다. 그리고 괜히 자신이 무시당한다는 생각이 들만큼 뿔이 났다.
“제가 이렇게 그냥 이야기하면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걔가 이야기할 때는 정말 말로 표현 못할 정도였어요. 아까 우리 반 애들 박수치고 소리치는 거 못 들었어요?”
“에이, 뭐 그 정도가지고.”
5반 선생님은 별로 듣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고 티를 팍팍 냈다. 4반 선생님은 누굴 붙잡고 이야기해야 자신의 감동을 이해해줄까 둘러보지만 마땅한 선생님들이 안보였다. 고학년 선생님들은 아직 수업중이고, 저학년 선생님들은 다들 나가고 없었다. 아마 방과 후 수업이나 혹은 서류작업 혹은 그냥 바람 쐬러, 라는 이유로 교무실을 비운 상황이었다.
다시 5반 선생님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사실 4학년 대화라는 주제로 그런 연설을 하는 게 가능할까, 이런 생각도 했다니깐요?”
“그래요, 알았어요. 대단해요, 대단해.”
조금이라도 경험 많은 내가 이해해줘야지, 라는 태도로 어물쩍 넘기려는데, 그냥은 넘어가지 않을 모양인지 4반 선생님은 5반 선생님을 붙잡았다. 아무리 귀찮아도 이런 식으로 넘어가려는 태도를 보이는 선생님이 아니신데 이상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가 있음이 분명하니 물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5반 선생님을 돌려세웠다.
“아까 잠깐 들으니까 5반은 막 웃고 난리던데, 무슨 일이었어요?”
“아.”
5반 선생님은 미간을 좁혔다. 말할까 말까를 고민하던 선생님은 아무렴 어때, 라는 생각으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1시간 전, 5반 교실.
“저요!”
“예. 인명수 어린이. 말씀하세요.”
명수가 주먹을 굳게 쥐고 힘차게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저는 저를 추천합니다!”
“와!”
아이들이 깔깔 웃고 넘어졌다. 선생님은 머리를 싸맸다. 그러나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명수는 씩씩하게 추천이유를 설명했다.
“저는 운동도 잘하고, 축구도 잘합니다. 그리고 몸도 튼튼하고, 키도 큽니다. 그리고 석고가 제 친구입니다.”
“석고, 아니 단유가 친구인 게 무슨 이윤데?”
보다 못한 선생님이 한 마디 하셨다.
“제 친구가 똑똑하기 때문에 저를 많이 도와줄 겁니다. 그러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잘 풀 수 있습니다.”
다시 아이들이 깔깔대고 넘어갔다. 실제로 뒷자리에 한 아이는 진짜로 넘어갔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어쨌든 칠판에 ‘인명수’라는 이름이 적혔다. 그리고 잠시 후.
“제가 반장이 된다면, 5반 축구팀을 만들겠습니다. 그래서 점심시간마다 다른 반과 경기를 가질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반과 합동팀도 만들어서 5학년이나 6학년 형들과도 경기를 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계속 이겨서, 계속 운동장을 쓸 수 있게 하겠습니다.”
“와!”
남자 아이들의 열렬한 환호에 명수가 해맑게 웃으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남자 아이들이 ‘인명수’를 연호했고, 여자아이들은 야유를 보냈다.
“설마, 반장은 아니죠?”
4반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리고 실제로 걱정했다. 옆 반의 명수는 이름이 명수지, 사실은 ‘폭탄’이라고 불러야 옳다고 생각했던 4반 선생님은 혹시라도 자기 반으로 파편이 튈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 아이들이 그래도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았더라고요.”
시선을 들어 허공의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하는 5반 선생님의 태도에 순간 쫄았던(?) 선생님은 대답을 듣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체육부장이 됐어요.”
허공으로 올라간 시선이 내려오지를 못했다.
“예?”
“공약도 실천 하겠다네요.”
자포자기?
“네?”
“4반이랑 팀을 먹겠다던데요?”
허탈함?
“네?”
****
“그러니까, 니가 도와줘.”
명수가 단유의 팔을 붙잡고 졸랐다.
“이제 니가 반장이라며? 그러면 너네 반도 니 말 들을 거잖아? 그러니까 도와줘. 응?”
단유는 창밖을 보았다. 달리는 통학차 차창너머로 푸른 잎을 틔운 가로수가 지나가고 있었다. 하얀 햇살이 보도블록 위를 비추고, 그 위를 하얀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단유는 생존에 대한 절박함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왔었다. 게다가 보육원이라는 좁은 울타리에 있다 보니 바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관심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일이 있고나니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당장 전혀 경험해본 적 없는 ‘반장’이란 직위를 떠맡아서 생활하게 될 텐데, 아마도 지금껏 학교에서 생활해오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지내게 될 것이란 사실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하물며 저 바깥에서 다양한 직종과 직위를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들은 어떠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