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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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키가 커진 건 확실했다. 이제 자신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자랐다는 게 보이니까. 그런데 어쩐지 얼굴이 변한 것 같았다. 성장을 하면서 얼굴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거지만, 오랫동안 얼굴을 훔쳐보며 눈에 깊이 새겼던 유림의 입장에서 단유는 확실히 변했다.
‘분위기가 바뀐 건가?’
단유의 얼굴은 약간 외국사람 같기도 하고 한국사람 같기도 한데, 혼혈 같지는 않은 묘한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보통의 아이들처럼 보였다. 여전히 잘생겼다고 할 수는 있지만 흔한 한국 남자애, 라는 느낌이 강해졌다.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유림이 단유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소년이 바로 옆자리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단유가 유림의 짝이었다.
“안녕?”
단유가 스스럼없이 인사를 했다. 유림은 흘깃 쳐다보곤 시선을 피했다. 단유는 멋쩍게 웃으며 수업준비를 했다. 이내 종이 울렸다.
“차렷!”
“경례.”
“안녕하세요.”
임시반장으로서 단유의 첫 임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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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웅은 대학 진학과 함께 보육원을 졸업했다. 뜻하던 대로 의대에 진학을 했지만 형편상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지방 의대로 진학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기숙사에서 지낼 수 있게 되어 잠자리는 걱정을 덜게 된 기웅은 떠나기 전날 자신의 책을 모두 단유에게 물려주었다.
“공부 열심히 하고, 형이 시간 날 때마다 들릴게. 그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거 잊지 마. 나중에 형이 테스트 해본다?”
단유는 희미하게 웃으며 기웅의 손을 맞잡았다.
“나중에 제가 형을 찾아갈게요.”
“그럴래? 그래도 되겠네.”
기웅은 단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명수를 바라보았다.
“너도 공부 열심히 해. 공부 많이 하면 할수록 키가 커질 거야.”
“아 좀, 놀리지 마요.”
그래도 머리가 굵어졌다고 반항하는 척 해보는 명수였다.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과자 먹고 키가 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명수는 그래도 방학동안 만큼은 기웅과 함께 공부를 했다.
“내가 보니깐 넌 머리가 좋아. 공부만 열심히 하면 단유보다 훨씬 잘할 걸?”
“그럴 리가요.”
“진짜다. 내가 약속할게. 그리고 정말 훌륭한 축구선수는 머리도 좋아야 하는 거야. 머리 나쁜 축구선수는 국가대표도 못해.”
책임질 수 없는 말도 마지막이라고 막 하는 기웅의 속셈을 모르는 명수는 또 그런 건가, 싶어서 마음이 흔들렸다.
“아, 진짜 하기 싫은데······.”
그렇게 기웅은 보육원을 떠났다. 그리고 그 후, 명수는 단유와 함께 도서관에 자주 출몰하는 기행을 보여 보육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석고야, 이거 봐봐. 나 못 풀겠어.”
“명수야.”
단유는 한숨을 쉬었다.
“응?”
“매번 모르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막 들어올 거야?”
“응. 모르는 건 물어보라며?”
“그렇지. 그런데 지금은 우리 종례시간이거든?”
명수가 교단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팔짱을 끼고 명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수가 씨익 웃었다.
“이것만 물어보고 갈게요.”
“나가!”
명수는 후다닥 교실을 뛰쳐나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열린 문을 타고 복도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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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일보의 베테랑으로 알려진 양 기자는 시청 뒷골목에 위치한 국밥집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중이었다.
“이집이 이곳에서 30년을 있었대요. 국물 맛이 끝내주지 않아요?”
“예, 끝내주긴 하네요.”
기자의 넉살에 허름한 양복차림의 사내가 흐린 미소를 지으며 숟가락질을 계속했다. 양 기자는 싱거우면서 매운 양념의 배추 겉절이를 집으며 껄껄 웃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요. 내가 뭐 아무데서나 떠들고 다닐 양반도 아니고.”
사내는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부추가 들어간 뚝배기를 휘휘 저은 뒤 숟가락에 밥을 가득 담아 국물과 함께 먹었다.
“그리고 여기가 비록 시청 근처라 해도, 이 골목은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골목이 아니라서 오히려 사람들 눈에 덜 띈다니깐요? 이 골목만 나가면 설령 사람들이 그쪽을 보더라도 아, 시청에 볼 일이 있어서 왔나보다, 하지 저사람 어디 근처에서 기자 만나고 다니는 거 아냐, 이렇게 볼 사람 없다니깐요. 그냥 긴장 풀고 식사해요.”
“알았으니까 그만하세요. 긴장 풀었어요.”
“긴장 풀었다는 사람이 넥타이가 국에 빠진 줄도 모르고 먹나?”
화들짝 놀라 넥타이를 건져 낸 사내는 아예 목에서 풀어냈다.
“그래, 거 단추도 하나 풀고. 그래 이제 좀 낫네. 어때요? 넥타이라도 푸니까 좀 낫지 않소?”
사내는 이후로 말없이 국밥을 떠먹기 시작했다. 양 기자는 이미 식사를 마치고 화장지로 쓱쓱 문지르고 있었다. 양기자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마침 아무도 없는데, 여기서 그냥 이야기할까요?”
“······.”
사내도 주변을 둘러보지만, 늦은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너무 외진 골목에 있는 인기 없는 국밥집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없었다. 사내는 마른세수를 하며 각오를 다졌다.
“이건 절대 비밀입니다.”
“알죠. 비밀이니까 오셨겠죠.”
사내는 옆 의자에 얹어 놓았던 봉투를 슬며시 건넸다. 양 기자는 봉투를 열어 들어있는 몇 장의 서류들 윗 장을 대충 훑었다.
“재단 내 비자금 내역이요. 내가 있는 동안 정리했던 거라 요즘 건 없을 테지만, 아마 지금 그것보다 더 할 거요.”
양기자는 사내를 흘끔 쳐다보았다가 다시 서류를 훑어 내려갔다.
“특히, 지금 아네스 보육원의 김 원장이 손을 쓴 게 있는데, 그게 좀 클 거요.”
“많이도 해먹었네.”
양기자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언제 터뜨릴 거요?”
“······.”
양기자의 침묵이 불안해서 사내가 재차 물었다.
“이보시오.”
“자료는 이미 충분히 모았고, 이거라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곧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사내는 휴지로 귀 뒤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국밥이 제법 뜨거웠던 것 같았다. 양기자는 서류를 갈무리한 뒤 자신의 가방에 집어넣었다.
“제가 먼저 나갈까요?”
“내가 먼저, 아니··· 양기자가 먼저 나가시오.”
양기자는 입 꼬리를 올리며 가방을 둘러멨다.
“계산은 제가 하죠. 5분 뒤에 나와서 왼쪽 골목으로 빠지시면 사람들 눈에 들키지 않을 겁니다. 그럼 이만.”
“그리고!”
일어서는 양기자를 불러 세운 사내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이제 연락 하지 마시오.”
“물론이죠. 그럼 그동안 몸보신 좀 잘하시고요.”
양기자는 덜커덩거리는 문을 열고 가게를 나섰다. 따뜻한 봄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양기자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차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공기가 상쾌한 기분이었다.
10분 후, 사내가 가게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아귀가 맞지 않았는지 거친 쇳소리를 내며 열린 문을 나온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주변에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고 왼쪽으로 몸을 튼 사내는 궁시렁 거렸다.
“이 놈의 황사는 정말 지긋지긋 하구만.”
문득 할 일이 생각났다는 듯, 사내는 상의 안쪽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예, 접니다. 전달했습니다. 예.”
듣는 사람도 없건만 조심스럽게 통화를 이어가던 사내는 이내 다른 골목길로 몸을 감추었고, 빈 거리에는 미세 먼지 주의보가 발령된 봄바람만이 설렁거리듯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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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학급 어린이회 임원 선출을 시작하겠습니다.”
임시반장 단유의 선언으로 4학년 4반 학급 임원 선거가 시작되었다.
“반장으로 추천하실 분 있으면 추천해 주시길 바랍니다.”
교탁 옆 책상에 앉은 선생님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상하게 HR(학급 회의)시간만 되면 교탁 앞에 선 아이들은 마치 짠 것처럼 어색한 톤으로 진행을 했다. 자기들 나름대로 정례인양 어른들의 흉내를 내는 모양새가 진짜 어른이 보기에는 오히려 순수해보였다. 이제껏 교사생활을 하는 동안 쭉 봐오던 모습이라 무덤덤할 줄 알았는데, 나름 똑똑하다고 소문난 단유의 경우에도 어김없이 쉼표를 따박따박 찍듯이 끊어 읽거나 묘한 악센트 올림 현상이 나타나 웃음이 난 것이다.
‘별로 긴장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저 나이 때 애들은 웅변의 경험이 많지 않아서 여러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가운데 발표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나이든 선생님들이야 과거에 ‘국민교육헌장 웅변대회’같은 시답잖은 이벤트를 겪으며 단련이 되었다지만, 자신만 해도 어렸을 적엔 지금 단유처럼 앞에 나서는 걸 어색해 했었다.
선생님이 상념에 빠진 사이, 아이들은 한두 명씩 손을 들어 추천을 했다.
“강동원 어린이를 추천합니다. 강동원 어린이는, 공부도 잘하고, 결석도 안하고, 친구들한테 잘해줍니다.”
“지상훈 어린이를 추천합니다. 지상훈 어린이는, 공부도 잘하고, 청소도 잘하고, 솔선수범하는 어린이입니다.”
지난 3년간 아이들이 ‘HR시간에는 단정하고 예의바르게, 질서정연하게 행동하라’는 규칙을 ‘같은 어투로 발표’하라고 이해한 건 아닌가 의심을 품게 할 정도였다.
단유는 이름이 나올 때 마다 칠판에 바른 글씨체로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서유림 어린이를 추천합니다. 서유림 어린이는,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 이야기를 잘 듣고, 부지런한 어린이입니다.”
단유와 유림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지난 2주간 유림은 정말 단 한마디도 단유에게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서로 눈을 마주본 일도 거의 없을 정도였다. 수업 특성상, 짝과 함께 해야 하는 경우가 생겨도 유림은 무관심, 무간섭으로 일관되게 행동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유림이 눈을 피하지 않는 것이었다. 단유가 먼저 시선을 돌리고 칠판에 ‘서유림’을 쓰기 시작했다.
“더 없습니까? 없으시면······.”
유림이 손을 들었다.
“서유림 어린이. 발표하십시오.”
“김단유 어린이를 추천합니다.”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학급 어린이회 임원으로 나올 아이들은 거의 미리 정해져 있었다. 이미 SNS를 통해 학부모들 사이에서 입이 맞춰지고 후보가 등록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후보 추천처럼 보여도, 해당 후보들은 미리 연설문을 준비해 오는 것이 보통인 것이다. 유력 임원 후보들 간의 경쟁이 지난 일주일간 학급을 달궈놓은 상태에서 새로운 후보 추천은 아이들을 당황시킬 뿐만 아니라 지명된 후보마저 당황케 하는 행위였다.
단유가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재미있다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추천된 후보는 무조건 칠판에 적은 뒤, 후보연설 시간에 연설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복수?’
단유가 머릿속으로 떠오른 단어였다.임시반장 단유가 머뭇거리며 진행을 하지 않으니 선생님이 나섰다.
“이유를 말해야지?”
유림이 입을 열어, 당당하고 힘이 잔뜩 들어간 어조로 추천 이유를 설명했다.
“김단유 어린이는 우리 학교에서 제일 똑똑한 어린이이고, 운동도 잘합니다. 그리고 장난도 잘 안치는 진지한 성격과 친구를 아끼는 마음이 큰 친구라고 생각해서 추천합니다.”
‘내가?’
단유가 멍한 얼굴로 유림을 바라보는데, 유림은 노려보듯 매서운 시선으로 마주보았다.
“이름적어야지?”
단유는 선생님의 재촉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이름을 칠판에 적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후보는 없었다. 이윽고 호명된 후보들은 교실 앞으로 나와 공약 발표를 시작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딴 생각을 했다. 사실 단유는 어느 학년 어느 반에 가더라도 반장을 할 만한 아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했지만, 단유가 반장이 될 확률은 거의 없었다. 후보가 지명되는 방식이 그러했듯이, 학급 반장은 학부모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보육원 출신의 단유가 후보가 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지만, 단유가 당선될 일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기대하는 선생님의 속마음이었다. 적어도 투표는 아이들 마음에 달렸으니까.
“···마지막으로 저는 남녀차별이 없는 교실을 만들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전교회의 때 건의사항으로 잘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웃음이 넘치는 교실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쑥스러워 하는 아이도 있고, 말을 더듬는 아이도 있지만 그래도 각자 준비한 연설문을 보며 공약연설을 마쳤다. 유림이 나와서 당당한 목소리로 후보연설을 끝낸 뒤, 다음 발표를 위해 교탁 옆에 서 있던 단유가 눈치를 보다가 앞으로 나섰다.
아이들의 시선이 단유에게 몰렸다. 묘한 기대와 궁금증이 서린 눈빛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