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7화 (87/956)

경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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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원목 테이블과 원목의자의 정갈함에 마음이 빼앗겼다. 말레이시아 수종의 멀바우 목재로 제작된 원목 테이블은 천장의 조명으로부터 떨어지는 빛을 받아 암적갈색의 미려한 색감을 뽐내고 있었다. 하드왁스로 수차례에 걸쳐 마감칠이 된 듯 고운 질감과 시각적 수려함이 시선을 사로잡고 검은 칠이 된 철재 프레임이 아래를 단단하게 받치고 있어 안정감도 보였다. 빈촌에서 사용하던 식탁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여서 소년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디자인’과 ‘기술’의 조화가 얼마나 아름다운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식탁이었다.

“멋지지?”

윤정이 식탁을 두어 번 톡톡 두드리며, 마치 자신의 것인 냥 자랑스러워했다.

“멋있네요! 가게가 정말 예쁜 것 같아요.”

소년이 해맑게 웃으며 칭찬했다.

기웅과 소년이 자리에 앉자, 윤정은 직접 서빙을 담당했다. 다른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두 사람을 위해 특별한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윤정의 마음씀씀이가 보기 좋았는지, 마스터쉐프가 직접 요리를 해 주었다.

“자, 우선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배고팠지?”

그렇지 않아도 아침부터 굶으면서―윤정은 꼭 굶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기다렸던 점심이었다. 뽀송뽀송하고 따뜻한 온열을 품은 빵 한조각도 맛있었지만, 뒤이어 나온 샐러드와 스테이크는 그냥 보기만 해도 화려하고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우와!”

먹기도 전에 절로 감탄이 나오게 만드는 요리였다. 아기자기한 색감과 마치 미술작품을 보는 듯한 데코레이션은 감히 포크를 찌르는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기웅이 용감하게 샐러드를 찍어 올렸다.

“누나, 이거 정말 맛있어!”

기웅의 찬사에 흐뭇한 미소로 화답하던 윤정은 뒤에서 지켜보던 마스터 쉐프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당연하지. 아마 인평시에서 제일 맛있는 레스토랑이 여기일걸?”

윤정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역시 소년은 음식 하나하나의 맛을 음미하며 먹을 줄 아는 아이였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바라보는 윤정의 입에 그 맛이 느껴질 만큼 생동감 넘치는 표정과 눈빛을 짓는 소년이었다.

“어때?”

소년이 입에 넣은 음식을 꼭꼭 삼키는 것을 확인한 후 물었다.

“고기가 질기지도 않고, 너무 연하지도 않게 딱 알맞은 느낌이에요. 이게 소고기인가요?”

장담하건대, 소년이 태어나 먹어본 음식 중 최고의 음식이라 할만 했다.

“10분간 대파로 마리네이드한 소고기를 버터를 두르고 미디엄 레어로 구운 거야. 맛있지?”

“···앞에 건 모르겠고, 일단 맛있네요.”

윤정은 소년의 접시에 자신의 고기를 썰어서 건넸다.

“괜찮아요.”

“아니야. 많이 먹어. 사실은 첫 월급 받았을 때 쏘고 싶었는데, 그 때는 학원 수강비로 써야 해서 여유가 없었거든. 그래도 이번에 연말 보너스로 두둑이 나온 게 있어서 이렇게 쓰는 거야. 너무 늦어서 미안해?”

일찍 초대하지 못했다고 되레 미안해하는 윤정에게 기웅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우리가 미안하지. 이렇게 비싼 음식을 얻어먹는 건데.”

기웅이 미소를 지으며 고기를 한 점 썰어 입에 넣었다. 따뜻한 육즙이 입안에서 터지며 고소하고 달달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괜찮아, 정말. 난 니들한테 이렇게 사줄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윤정도 고기를 한 점 썰어서 입에 넣고 맛을 음미했다.

“내가 나중에 진짜 의사가 되면 말이야. 누나 건강은 내가 책임질게.”

“아이고, 그럼 미래의 의사한테 미리 특진비 내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나?”

“어, 그렇게 되나? 그럼 뭐 특진비라 치고 많이 먹어줄게.”

기웅이 야무지게 고기를 크게 썰어서 입 안 가득 넣고 오물거렸다. 절로 웃음이 나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래, 그럼··· 넌 어떡할래?”

윤정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은 골똘히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은 어색한 웃음 외에 내밀게 없었다.

소년이 난감해하는 표정을 짓자 윤정이 머쓱해하며 괜찮다고 웃었다.

“우리 석고는 그냥 이대로만 잘 자라라. 그러면 누나가 나중에 매일매일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나는?”

기웅이 눈을 크게 뜨고 묻자, 윤정이 피식 웃었다.

“넌, 돈 잘 벌 텐데 뭐. 제 돈 주고 사먹어. 대신 맛있게는 해줄게.”

두 사람이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는 사이, 소년은 조금 심각해졌다. 사실 심각해질 만한 주제였다. 일전에도 자신의 꿈과 목표에 대해 고민을 했었지만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보류해 놓은 상태였다. 그 뒤로 또 5년이나 지나면서 잠시 잊고 있기도 했었고. 다시금 이 주제가 환기되니 소년으로서는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소년의 표정에 윤정이 살짝 미안해하며 물었다.

“너무 고민하는 거 아니니? 누나가 장난으로 그런 건데?”

“예? 아, 아니요. 그냥······.”

소년은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원장에게 꿈을 가지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부터, 최근 자신의 꿈과 목표를 찾지 못해서 답답하다는 이야기까지.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마. 니 나이 때는 그렇게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더라. 형이 오래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니 중학교나 고등학교 올라온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본다.”

기웅이 냅킨으로 입가를 쓱쓱 문지르고 물잔을 들었다.

“맞아. 사실 나도 요리사를 직업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얼마 되지 않았거든? 물론 기웅이나 내가 꿈을 이룬 건 아니지만 벌써부터 꿈이나 목표를 만들겠다고 억지로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좋아하는 게 있으면 저절로 꿈이 생길 테니까.”

윤정도 잔을 들어 건배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지금은 좋아하는 게 뭔지를 천천히 찾아보도록 해. 너무 서두르진 말고. 내가 보기엔 니가 공부하는 걸 좋아하니까 학자나 교수 쪽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아니 것보단, 넌 뭘 해도 잘할 거야.”

기웅이 입을 축이고 말했다. 윤정도 기웅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설마 꿈이 없다고 스테이크 하나 못 갚겠니?”

윤정의 익살스런 우스갯소리에 기웅이 마주 웃었다. 소년은 이렇게 고마운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를 더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니 이름도 그런 뜻이잖아?”

기웅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윤정이 기웅을 돌아보며 물었다.

“뭐? 무슨 뜻인데?”

“얘 이름을 원장님이 지어주셨잖아요? 그런데 이름 뜻이 그거래요. 무럭무럭 자라서 받은 만큼 보답하라는. 단련할 단(鍛)에 보답할 유(侑)래요.”

“그래? 원장선생님 답네.”

두 사람은 깔깔대며 웃었다. 소년, 단유는 아직 뜻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웃으니 그게 보기 좋아서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

만물이 웅크린 채 긴 시간을 이겨내고 마침내 일어나 따뜻한 햇볕을 마주하는 3월, 단유와 명수는 4학년이 되었다. 3월 2일, 첫 등교일을 맞아 보육원 현관이 북적였다. 올해부터는 초등학교 통학차에도 인원 변경이 예정되어 있었다. 철용(6학년)과 단유(4학년), 명수(4학년) 외에도 새로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세 명의 푸릇푸릇한 새내기 신입생이 동승하게 된 것이다.

“니가 지선이고, 니가 재민이고, 니가 ···유철이지?”

명수가 한 명씩 콕콕 짚으며 선배노릇 좀 해보려는 폼을 잡았다. 세 아이들은 고개만 끄덕였다. 평소에도 나이차가 많아서(?)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무시무시한 초등학교 입학식까지 예정되어 있어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때문에 명수의 질문에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얼어붙은 모습을 보였다.

“명수야. 왜 애들 겁주고 그러냐?”

철용이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승합차가 현관 앞으로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명수에게 한 마디 던졌다.

“겁이 아니고, 이름 외우는 건데요?”

“니가 그러고 있으면 겁주는 거야.”

철용의 말에 발끈하는 명수.

“나 참, 내가 이름을 물으면 겁이고, 석고가 물으면 관심인가?”

“잘 아네?”

“이씨.”

철용은 키득거리며 명수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명수가 짐짓 싫은 척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동무를 한 철용은 명수와 단유에게 당부하듯이 말했다.

“이제 니들이 얘네들 잘 챙겨야 한다. 나나 형근이 형이 너희들 잘 돌봐준 것처럼. 알았지 명수야?”

“형이 뭘 잘 챙겨줬다고 그래? 운동장에서 공 좀 차려고 하면 맨날 구석에 가서 놀라고 하면서.”

“형이 너 다칠까봐 걱정돼서 하는 소리지. 그걸 오해하면 안 돼.”

“우와, 형 6학년 되더니 말 되게 잘한다?”

“너도 빨리 철 좀 들어라.”

그간 당했던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듯, 뿔난 시늉을 하는 명수와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는 철용이었다. 그리고 올망졸망한 눈으로 두 사람의 만담을 귀담아 듣던 세 아이의 모습이 귀여워 단유는 슬쩍 웃음을 흘렸다.

“우와, 형. 얘가 우리 비웃는데?”

그걸 또 곁눈질로 봤는지, 명수가 씩 웃으며 단유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 너 우리 비웃냐?”

철용이 다른 쪽 어깨를 붙잡았다. 당황한 단유가 빠져나오려하는데, 아무리 힘이 세진 단유라고 해도 두 사람이 붙잡고 있으니 쉽게 몸을 빼기가 힘들었다.

“아, 아냐, 내가 뭘 비웃···큭.”

명수가 먼저 손을 내밀어 옆구리를 간지럽히고, 뒤따라 철용이 다른 쪽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아, 제발! 제발!”

명수가 우연히 발견한 단유의 약점, 바로 간지럼 태우기였다. 늘 진지한 단유였지만, 이때만은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다리를 동동거렸다.

“미안, 미안! 안 그럴게! 명수야! 형!”

승합차가 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합동 작전은 단유가 눈물을 흘릴 때까지 지속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때까지도 긴장을 풀지 못한 세 꼬마 아이들은 늦겨울의 얼음꽃 마냥 웃지도 못하고 제자리를 지켰다.

****

이번에도 명수는 단유와 같은 반이 되지 못했고, 명수는 입이 댓 발이나 나왔다.

“아무래도 누가 일부러 이렇게 만드는 거 같지 않아?”

“난 매번 바로 옆 반에 배치되는 게 더 신기한 거 같은데.”

단유의 학년은 매번 7반이 구성되는데, 신기하게도 매번 바로 옆 반에 단유와 명수가 나란히 배치되곤 했다. 이번 학년에도 단유는 4반, 명수는 5반이었다.

“이제 운동장은 내꺼다!”

명수가 선언하듯 소리 지르며 교실로 입장했다. 4학년부터는 운동장 가운데서 놀 수 있는 권한 비슷한 게 생겼다. 3학년까지는 어린애 취급을 하며 운동장 가장자리로 내몰렸지만, 4학년부터는 고학년 학생들도 인정(?)을 하는 분위기여서 운동장 가운데서 놀아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물론 달리다가 고귀하신 고학년 선배들의 존체(尊體)에 손상이라도 가면 바로 주먹질이 오갈만큼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명수였다.

사실 단유도 4학년이 되니 뭔가 변한 느낌이 들었다. 딱히 꼬집어서 뭐가 변했다는 것을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여섯 학년으로 구성된 초등학교 시스템에서 반을 넘었다는 것이 묘하게 사람 마음을 고양시키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단 4학년이 되었다는 사실만 변한 건 아니었다.

“자, 2주 뒤에 학급 임원 선거를 할 거에요. 그 때까지 누가 학급 임원에 어울리지 잘 살펴보도록 해요. 그리고 그 때까지 우리 반 임시 반장을 할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선생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실 둘러보나마나 이 아이가 자신의 반에 왔다는 것을 미리 알았을 때부터 시킬 마음이 있었다.

“김단유. 니가 2주 동안 우리 반 임시 반장이야. 다른 사람들도 단유 괜찮지?”

“네!”

단유는 나름 유명 인사였고,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터라 다른 반에서 온 아이들도 잘 아는 얼굴이었고, 인정할만한 친구였다. 잘생겼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라고 소문난 아이인데다, 어찌된 일인지 키가 훌쩍 자라서 또래 가운데서도 돋보이는 아이였다. 같은 반이었든, 다른 반이었든 3개월을 못 보고 지난 사이에 머리 하나는 더 커진 채 등장한 단유의 외모에 놀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중에 유림도 끼어있었다.

“얼굴이 조금 변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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