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사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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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밤을 보낸 소년은 다음 날 교실에서 유림을 만났다. 자신의 고정석인 창가 측 가장 뒷자리에 앉아 있던 소녀는 소년이 등교하는 모습을 보다 눈이 마주치자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했다. 아무래도 주변의 아이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리라.
“유림아.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지, 지금? 그··· 조금 있으면 수업 시작할건데?”
“잠깐이면 될 거야.”
“오오~!”
주변의 아이들이 놀랐다는 듯 놀렸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았다. 괜히 시간만 끌어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고, 유림에 대한 배려도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 열량으로 치환해서 생각해보면, 이미 유림은 많은 열량을 빼앗긴 상태. 이 상태라면 분자활동이 둔해지며 온도가 낮아질 것이다. 평소 활동적이고 쾌활한 면을 자주 보이던 유림이 얌전해지고 둔중해지는 모습을 상상하면,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미안해.”
선물을 건네는 소년의 손에 시선이 닿은 유림은 입술을 깨물었다. 유림은 오늘 단단히 준비하고 나왔다. 딥레드 컬러의 풀오버 니트와 밝은 청색의 데님소재 스커트를 매치하여 여성미를 한껏 강조하는 스타일로 준비했다. 학교 가는데 웬 유난이냐며 어머니가 핀잔을 줬지만 꿋꿋이 버티고 나온 유림이었다. 그런데······.
“왜?”
이유도 설명해야 하는 건가? 소년은 잠시 고민을 했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된 거 같아서.”
유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싫어?”
“아니, 니가 싫은 건 아니고······.”
설마······.
“다른 여자애를 좋아하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왜 싫어? 내가 못생겨서? 아니면 키가 너무 커서?”
다른 건 모르겠는데, 키가 크다는 게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가 될 수 있나? 소년은 내심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일단 부정했다.
“아냐, 니 키가 왜 문제야? 그런 건 전혀 아니야.”
“그럼 왜 싫어?”
“아니, 싫다고 한 적은 없는데······.”
“그럼 좋아하는 거 아냐?”
소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림아. 같은 반 친구로서 널 좋아하는 건 맞을 거야. 싫어하진 않으니까. 만약 니가 사귀자라고 말하는 게 친구로서 지내자라는 뜻이라면, 그래 좋아.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난 아니야. 왜냐하면 난 그런 감정에 대해서 전혀 느껴본 적이 없거든.”
유림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마지막 말에 꼬투리를 잡았다.
“사랑을 왜 몰라?”
유림이 생각하기에 사랑을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지금 각종 드라마, 소설, 영화, 동화, 음악에서 ‘사랑’을 그리고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연기하고 ‘사랑’을 쓰고 있는데, 왜 ‘사랑’을 모른단 말이지?
“···넌 죽음이 뭐라고 생각해?”
“응?”
뜬금없는 질문에 유림은 나오기 직전이던 눈물이 쏙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만약 어떤 괴물이 너의 목에 이빨을 들이대고 물어뜯기 전이라고 가정하면, 넌 그 때 어떤 감정을 느낄 거 같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지금 내가 ‘사랑’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그런 거야. 경험해 본적이 없어서 모르거든.”
유림은 이 잘생긴 남자애가 사실 정신이 이상한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거랑 이거랑 어떻게 똑같니?”
“감정은 다르겠지. 다만 난 경험해보지 않은 감정은 모른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럼 경험해보면 되잖아.”
“사랑을?”
“응.”
“넌 죽음이라는 감정을 경험하기 위해 괴물의 이빨 앞에 니 목을 내미는 경험을 해보고 싶어?”
“···너 진짜 이상해.”
“아무튼 그런 거야. 미안해.”
소년은 교실로 돌아갔다. 소녀는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소년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그리고 교실로 돌아가 소년의 뒤통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절세미소년의 뒤통수가 평범해 보였다. 콩깍지가 벗겨진 순간이었다.
****
소년은 이전처럼 마법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신테의 말처럼, 이곳에서 공부를 하면서부터 인식체계나 사고 메커니즘의 변화가 일어났고, 이 때문에 전처럼 마법을 만들어 내거나 활용하기 어려워졌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었다. 이곳에서 이곳 나름의 법칙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연구하다보면 마법을 익히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조바심내지 않고 차근차근 공부를 해나가다 보면 익힐 수 있는 마법도 늘어날 것이라 믿었다. 전 세상처럼 항상 위험이 도사리는 곳도 아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도 없을뿐더러 당장 저쪽으로 넘어가더라도 지금의 마법정도라면 몸을 보호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느긋한 자세로 학과 공부에 임하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마법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홀로서기를 했을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서 마법이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 이런.”
도서관에서 책을 보던 소년은 혀를 찼다. 그리고 노트에 수식을 쓰고 외웠다.
과거 소년은 자신의 부족한 지식과 함께 잘못된 지식이 가져올 참변을 미리 경험했었다. 돌산 위의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 중력가속도에 대해 잘못된 수식을 세우는 바람에 위험에 처했었던 일이었다. 당시에는 ‘ma=mg-kv’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kv^2’이었다. ‘제곱’이란 수식의 변화만 해도 수치의 변화가 크게 나타나니, 자신이 위험에 처했던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 외에도 낙하하는 물체에 적용되는 다양한 변수와 ‘유체역학적’ 변화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모험을 강행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 새삼 자신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더욱 마법사용에 조심스러워진 소년은 조금 더 정확하고 깊이 있게 공부하기를 마음먹게 되었다.
소년이 공부에 대한 마음가짐을 새로 갖고 보육원 도서관에서 책을 후벼 파고 있을 때, 소년에 대한 마음을 깨끗이 정리하지 못한 유림은 서글픈 마음을 감추지 못해 밤마다 울었다. 차라리 싸우다 지면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이건 싸움도 못해보고 져버린 형국이라 억울하기까지 했다.
“시작도 못했는데···흑흑.”
콩깍지의 유무를 떠나, 생애 최초의 ‘사랑’이 시작도 못하고 봄비 맞은 벚꽃처럼 바닥에 추락했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아마도 ‘비련의 여주인공’이란 이런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일 테지.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기도 창피한 일이어서 혼자 끙끙 앓을 뿐이었던 유림은, 결국 학기말 시험을 망치고 말았다. 마음이 붕 떠서 자리를 잡지 못하니, 다른 사소한 일―수업이나 공부나 학기말 시험 같은 것―에는 집중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너, 이게 뭐야!”
유림은 어머니께 혼이 났다. 그리고 방학기간동안 특별조치의 일환으로 그간 피해 다녔던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그동안은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어도 이렇게 처참하지 않았었고, 운동도 잘해서 고른 성적을 보여 왔던 유림이었기에 굳이 지금 시점에 학원을 보낼 필요가 있겠냐는 아버지의 권고에 어머니가 한 수 무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반 전체에서 하위권을 차지한 성적을 보자 이대로 둬선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이 발동한 어머니는 소매를 걷어붙이시고는 유림의 학업관리에 전념코자 하셨다. 본격적인 치맛바람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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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되었다. 소년은 기웅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소년을 위해 쓰겠다는 마음을 가진 기웅 덕택에 소년은 충분히 알찬 방학을 보낼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몸의 단련에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은 까닭에, 소년은 쑥쑥 키가 자라더니 어느새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될 무렵 키가 145㎝에 육박할 정도로 자랐다. 5년간의 단련의 성과와 맞물리면서 균형을 찾아가는 소년의 몸이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근력과 체력은 덤이라고 표현할 만큼 외적으로 보이는 성장이 두드러졌다.
명수는 갑자기 커져버린 친구의 키가 부러웠다.
“너 몰래 뭐 먹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명수는 친구의 성장이 식습관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운동을 해도 자기가 더 많이 하고,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할 때도 자기가 더 많은 양을 먹는데, 자기보다 키가 커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명수였다. 이런 현상이 벌어진 데는 분명 자신이 모르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정도로 머리가 자란 명수는 소년을 붙잡고 캐물었다.
“너랑 매일 같이 있는데 뭘 따로 먹어?”
소년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명수는 갈고리눈을 하고 소년을 쳐다보았다.
“기웅이 형이 몰래 뭐 주는 거야. 그치?”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노라, 취조하는 형사의 어투에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더니, 명수가 고리눈을 뜨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닦달했다.
“그렇구나? 그랬네. 기웅이 형도 키가 크잖아? 형이 먹는 거 너도 같이 먹는 거지? 그렇지?”
마땅히 대답을 할 말이 없어 그냥 바라만 보자, 명수가 한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나도 달라고 해야겠다. 달라고 하면 줄까?”
소년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기웅형에게 얻어먹으려면, 우선 같이 공부해야 될 거야. 기웅이 형이 공부하는 것 좋아하잖아. 그러니깐 같이 공부하고 있으면, 착하다고 선물로 줄 지도 몰라.”
“공부? 공부해야 준다고? 아, 그래서 니가 기웅이 형한테 공부 배우는 거네? 그런데 어쩌지. 난 공부하기 싫은데.”
명수는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하루 종일 공을 차기도 바쁜 시간에 책을 읽고 있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명수였다.
“공부하면, 키가 커질 거야.”
소년이 명수가 알아듣기 쉽게 단정지어 말했다.
명수는 키가 커지고 싶었다. 축구선수는 키가 커야 좋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그 이유를 묻지 않아도 될 만한 것이, TV에 나오는 축구선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보육원 더비에서 키가 큰 철용이나 중학생 형들이 공을 잘 차는 모습을 목격하고 경험했다. 그게 다 키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자신도 키가 커야만 했다.
“좋아. 그럼 일단 방학동안 키 커지는 공부를 해야겠어.”
역시나 묘하게 핀트를 벗어난 다짐이지만 명수는 결심했고, 소년은 웃음으로 그 결심을 지지했다. 이후 도서관에 나타난 명수를 본 기웅이 놀라긴 했지만, 소년의 뒷공작에 사정을 알게 된 기웅은 날마다 과자 하나씩을 안기면서 명수의 공부를 도왔다.
키는 커질지 확신할 수 없지만 성적은 오르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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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끝나기 일주일 전, 소년은 윤정이 취업한 레스토랑을 들릴 기회가 있었다. 윤정은 사실 운이 좋게 풀린 케이스였다. 대부분 보육원 출신들이 알게 모르게 불편한 시선을 감수하고 어렵게 취업을 하는 것에 반해, 윤정은 손쉽게 취업을 할 수 있었다.
사정은 이러했다. 대학까지 갈 형편이 되지 않아 취업을 염두에 두었고, 평소에도 요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놓치지 않았던 윤정은 졸업 후, 이 쪽 방면으로 취업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하던 차였다. 마침 그 모습을 눈여겨 본 독지가 한 분이 주선해 준 덕택에 윤정은 인평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레스토랑에 취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윤정은 이곳에서 돈을 벌어 자격증 취득을 위한 준비도 할 수 있게 되었고, 곁가지로 여러 가지 조리스킬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1년여를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보조로서 자리를 잡은 윤정은 기웅과 소년을 레스토랑으로 초대했다. 첫 월급은 쓰지 못했지만, 첫 보너스는 이들을 위해 쓰자는 생각에서였다.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선 소년은 그리 크지 않지만 깨끗하고 화려한 레스토랑에 눈이 핑핑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누나, 여기 너무 좋다.”
“그치? 나도 여기 인테리어가 너무 보기 좋더라고. 나중에 내가 레스토랑 차리면 이렇게 만들고 싶어지더라.”
기웅과 윤정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소년은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