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5화 (85/956)

풋사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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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데?”

뜬금없는 봉투와 선물에 놀란 소년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힌 소녀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나중에, 수업 끝나고 혼자 있을 때 봐.”

뒤에서 아이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유림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운동장에 풀어놓았던 아이들이 버팔로처럼 달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꼭, 꼭 나중에 혼자 봐야 돼.”

유림은 소년의 곁을 지나갔다. 소년이 뭔가 싶어 돌아보았을 때 이미 소녀는 교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정말 빠르다.”

키가 커서 그런지,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유림은 보통의 아이들보다 빨랐다. 소년은 잠시 손에 들린 물건들에 시선을 줬다가 이내 교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더 머뭇거렸다가는 달려드는 소 떼들, 아니 아이들에게 치일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어서였다.

****

수업을 마치고 보육원으로 돌아온 소년은 명수와 함께 공을 찼다. 명수가 공을 향해 달리고, 소년은 골문 앞에서 찬바람 맞으며 시간을 보냈다가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함께 축구를 했다. 저녁식사를 한 뒤, 소년은 보육원 도서관으로 가서 기웅에게 과외를 받았다. 수능을 마친 기웅은 졸업 때까지 남는 시간을 소년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

기웅이 보기에 소년의 현재 수준은 전체적으로는 중학교 1학년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수학이나 물리학은 그 보다 높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글을 읽고 해독하는 수준이나 일반 상식은 중학교 1학년 레벨 정도로 보였다. 물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상식이 부족한 면도 있었다.

“화산이 뭐예요?”

백두산, 한라산, 후지산 등을 이야기하면서 설명하려하면,

“백두산이 어디예요?”

라고 묻는 통에 당황스럽기도 했었다. 뜻밖에도 지구과학 수준은 초등학교 3학년 수준보다 못하다고 느꼈지만 그것이 소년을 가르치는 데 장애로 작용하진 않았다.

그래도 중학교 과정을 과외 하는 게 부담이 적었다. 초등학교 수준이라면 오히려 방대한 지식을 요구하는데다가 적당한 수준으로 난이도를 조정하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학생 레벨의 과외이다 보니 기웅이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에서 과외가 가능했다. 게다가 말귀도 잘 알아듣고 이해도 빠르다보니 진도를 나감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최근 기웅이 가르치는 과목은 중1과학이었다. 물리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래된 일이었지만 그 외 다른 분야, 예를 들어 화학, 생물, 지구과학 등을 배울 마음으로 과외를 요청했고 기웅은 순순히 도와주기로 했다. 기초가 튼튼해서 중학교 1학년 교과서를 두고 가르쳐도 이제 초등학교 3학년에 불과한 소년이 잘 따라오는 게 기특하기만 했다.

“지난 시간에 어디까지 했었지?”

“온도와 열이요.”

소년에게 매우 익숙한 분야였지만, 역시 과학적으로 체계화시켜 배우는 것은 이제껏 여러 책을 통해 잡다하게 익히는 것과는 달랐다. 대부분 아는 내용이더라도 체계적으로 정리해가며 익히다보니 훨씬 이해가 깊어지는 느낌이었다.

“온도가 질량, 시간, 길이와 같은 기본적인 물리량이라는 사실은 이해했지?”

“예.”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집중하는 자세와 빠르게 이해하는 모습을 보면 신이 나기 마련이었다.

“열은 물질 사이의 온도 차이에 의해서 이동하는 에너지이고, 분자의 평균 온도에너지가 큰 곳에서 작은 곳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두 물체 사이에서 이동하는 물리량이라는 것도 이해했지?”

당연히 잘 아는 사실이었다. 심지어는 몸을 던져(?) 실험까지 해 본 마당이니. 몇 가지 질문들로 학습상황을 점검한 기웅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복습은 잘 된 것 같으니까, 넘어가자.”

두 사람이 과학교과서를 파고 들 때, 소년의 책가방에 들어간 편지와 선물은 점점 잊혀져갔다.

그 시간, 유림은 자기 방에서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자기가 살아오는 동안 가장 큰 모험을 시도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당장 내일 소년이 어떤 얼굴로 자기를 바라볼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혹여나 불쾌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하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자기를 쳐다볼까, 설레기도 했다.

“유림아, 나와서 과일 먹어.”

딴 생각을 하느라 어머니의 부름을 듣지 못한 유림은 재차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거실로 나갔다.

“뭐하고 있었길래 엄마가 부르는데도 못 들어?”

“아이 참, 엄마는. 공부하고 있었지.”

“얘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그럼 접시에 담아줄까?”

“아냐, 됐어. 여기서 먹고 갈래.”

살짝 삐친 척 하는 유림의 모습이 귀여워 입 꼬리를 올리던 아버지가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마침 뉴스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한 달여간 인평시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주인공.

「감사합니다. 이번 선거는 인평시 여러분의 승리입니다.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살리려는 열망이 가져온 인평 시민 여러분들의 승리입니다. 저에게 주신 신뢰와 믿음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여보 다른 거 틀어요. 뉴스는 나중에 혼자 봐도 되잖아요.”

힘없는 아버지는 리모컨을 어머니에게 건넸다. 이 시간에 공중파 일일드라마가 시작되는 것을 모르지 않는 아버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시 채널을 멈췄던 것이었는데 역시나 였다. 소파에 모로 누워 바라보니 두 모녀가 사과를 포크로 찍어 야금야금 베어 물며 일일드라마를 시청하는 모습이 참으로 닮았다.

재미도 없는 걸 잘도 본다, 싶었지만 어느새 덩달아 바라보며 스토리를 꿰맞추는 아버지였다.

「미안해. 사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어떻게? 어떻게 니가 그럴 수 있어?」

“아유, 저 나쁜 놈. 지한테 그렇게 잘해준 여자한테 어째 저런대?”

어머니는 욕했고,

“······흑.”

유림은 울었다.

“어머, 유림아 너 왜 그래?”

“흑, 아니, 불쌍해서.”

뒤에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한 말씀 하셨다.

“애들 교육에 안 좋게 뭐 저런 걸 보고 있어? 당장 돌려.”

어머니는 리모컨을 다시 건네려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유림아, 너 접시 들고 들어가. 너 그냥 하던 공부 계속해.”

“엄마······.”

“어서. 들어가.”

단호한 어머니의 태도에 유림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유림의 희생으로 어머니는 리모컨을 지켜냈고, 아버지는 여전히 재미없는 드라마의 전개방향을 머릿속으로 추리해나가야 했다.

****

소등시간이 되어 방으로 돌아왔더니, 어느새 명수는 꿀잠을 자고 있었다. 소년도 잠들 준비를 하기 전에 내일 학교에 가지고 갈 책들을 준비하기 위해 책가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가방 안에 고이 잠들었던 편지와 선물의 존재를 깨달았다. 소년은 명수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봉투를 개봉하고 속지를 읽었다.

「···오래 전부터 널 지켜봤어.」

와 같은 상투적인 문장에서 시작된 편지에는 10살 소녀의 감성과 낭만이 적당히 버무려진 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주로 소녀가 기억하는 일상적인 기억들과 순간의 감정들을 약간의 과잉과 열망을 섞어 묘사하고 있었다.

「···니가 돌아보았을 때, 너의 눈에서 별빛이 흘러내리는 걸 보았어. 난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거야. 흘러내린 별빛이 내 마음에 박혀버렸거든.」

소녀는 특별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켜주려한 소년의 용기에 감탄했으며, 그 마음에 자신의 감정을 확인했음을 알렸다.

「···니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내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 한 거야. 난 니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내 마음을 확신할 수 있었어.」

소녀는 자신의 사랑이 위태로운 가운데서도 빛날 것이며, 역경과 고난, 조롱과 비난에도 꺾이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내가 널 좋아한다는 사실을 우리 반 아이들이 알게 되면, 모두 날 놀리겠지? 그래도 난 이겨낼 수 있어. ···나보고 키다리라고 놀려도 니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어떤 별명이나 놀림도 참아낼 수 있을 거야. 난 너만 있으면 되거든.」

소년은 이 글을 계속 읽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갈등하면서도, 읽지 않는 것은 마음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꿋꿋이 읽어 내려갔다.

「난 널 사랑해.」

로 끝나는 문장을 보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부담스럽다!’

문장마다 흘러넘치는 감정의 과잉은 전혀 공감을 하기 어려웠고, 중간 중간 맞춤법에 맞지 않거나, 문법에 어긋나는 단어와 문장을 보면 빨간 줄을 긋고 싶었다. 무엇보다, 상대의 감정을 일절 고려치 않는 일방적 고백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부담을 줄 수 있는지를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담의 극치는 단연 마지막 고백이었다. 소년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책으로야 여러 분야에 걸쳐 나오는 단어였고, 주제였기에 의미를 모르지는 않지만 소년은 그 감정을 감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돌아보면, 자신이 누군가를 아끼고 보듬어주고 싶다는 감정을 느낀 적이 없지는 않았다. 당장 옆에서 코를 골며 잠든 명수만 해도 소년이 이 곳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명수에 대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보면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정’이라는 감정이라면 오케이지만.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아도 ‘사랑’이라는 감정에 어울리는 것은 오직 ‘가족’ 뿐이었다. 그 외의 대상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결론적으로 소년은 유림이 가족도 아닌데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리 만무하다는 이야기였다.

‘답장을 써줘야 하나?’

고민하던 소년은 문득 선물꾸러미를 쳐다보았다.

‘열어봐야 하나, 아니면 그냥 돌려주어야 하나?’

어차피 마음을 받지 않을 생각인 소년은 그냥 돌려주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런데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 소년이 느끼는 감정은 묘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분명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들은 많았었다. 명수, 기웅, 윤정, 학교 선생님들, 보육교사 선생님들, 원장선생님, 핀체노, 무슬라, 샤피로, 에리카, 디아트리, 안트, 신테. 그런데 그 사람들과 유림과의 차이를 살펴보니 바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온도차에 있었다.

명수나 무슬라 같은 사람들에게서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매우 뜨거운 감정을 받았고, 또 주었다. 디아트리나 학교 선생님들 같은 사람들에게는 뜨거운 감정보다는 은은한 감정을 받기만 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친절에 감사해했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늘 품고 다녔다.

그런데 유림의 경우는 너무 일방적인 감정을 받은 데다가 그 온도가 너무 뜨거워서 화들짝 놀란 셈이었다.

“열은 에너지가 큰 곳에서 작은 곳으로 이동한다.”

유림의 에너지는 너무 크고, 자신은 너무 작았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주고받는 감정을 열에 비유할 때, 온도가 뜨겁든 차갑든 금방 열평형 상태를 이루었기 때문에 놀랄 이유가 없었다면, 유림의 경우는 너무 극적인 열량의 차이로 자신이 적응을 하지 못한 탓이라 여겼다.

‘유림이랑도 열평형 상태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지금 생각해보기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생겼다.

‘열전도가 되지 않는 물체가 있을까?’

마치 자신처럼 열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물체가 있을 수 있을까? 만약 있다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을까?

이른 사춘기에 빠진 한 소녀의 절절한 세레나데가 담긴 편지 한 장이 한 소년에게 물리학적 상상력을 계발시키는 밑거름으로 사용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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