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사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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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기온이 떨어진 늦가을 새벽. 부산스러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 보육원 현관에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시험 잘 보도록 해. 너라면 분명히 좋은 결과 있을 거야.”
보육교사의 덕담에 기웅이 미소로 화답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이거 꼭 쥐고 있다가 시험 풀 도록 해. 손이 얼어서 마킹 잘못하는 경우도 있다더라.”
다른 보육교사가 핫팩을 쥐어주며 말했다.
“형, 파이팅! 누나, 시험 잘 봐!”
보육원 아이들이 와글거리며 기웅과 또 다른 고3수험생인 정연을 응원했다.
“형. 이거, 엿 먹어.”
명수가 꼬마엿을 건네주며 응원했다.
“고맙다, 명수야. 네 덕분에 시험 잘 볼 것 같다.”
기웅은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소년 역시 명수 곁에 서서 기웅을 응원했다. 보육원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응원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차에 올랐다.
보육원을 빠져나가는 차를 바라보며 소년은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었다. 저들은 조만간 윤정이 그렇게 나가듯 똑같은 모습으로 보육원을 나가게 될 것이다.
정든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가는 것을 마냥 슬퍼할 수만도 없었다. 저들은 이 보육원을 나감으로서 비로소 ‘독립’된 한 사람으로서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소년 역시 자신의 ‘독립’을 천천히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세상에서의 일이지만, 오롯이 5년을 수련했던 과거를 떠올리면, 소년도 이제 마냥 철부지 애들처럼 지낼 수만은 없었다. 이제까지 이 세상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면, 지금부터는 홀로서기를 위한 노력도 겸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오늘 1시간 늦게 가니까 좋다, 그치?”
명수가 해맑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소년은 마주 웃으며 명수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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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끝나고 나니 메아리처럼 울려대던 확성기 소리가 사라지면서 모처럼 면학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제 방학이 한 달 쯤 남은 시점이어서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그래도 학기 말 시험을 앞둔 선생님들은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좀 조용하니 살 것 같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 6학년 담임을 맡은 남자 선생님 두 분이 흡연실 창가에 서서 끽연을 즐기고 있었다.
“도대체 학교 앞에서 유세를 했던 이유가 뭐랍니까? 암만 이 앞이 유동인구가 많은 거리라 해도, 학교 앞은 피해서 해야지, 상식이 없는 사람들도 아니고 말이죠.”
재를 톡톡 털어대던 선생님이 열린 창틈으로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선거 때 상식 지키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이번 선거도 말이죠, 나 참. 애들 보기 부끄러운 일들이나 벌이는데, 그나마 애들이 어려서 그렇지, 조금 나이 찬 애들이라고 생각해봐요. 흑색선전에 선동에 추문까지···. 그러고도 뽑혔으니.”
“이 동네도 참 인재가 없어요. 그쵸?”
마침 운동장에서 교내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는 아이가 보였다.
“인재라면 저런 애가 인재겠죠?”
“누구? 아, 그렇죠.”
바깥 날씨가 여간 쌀쌀한 게 아닌데, 저 소년은 하얀 맨투맨 티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운동장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많았기에 얇은 옷차림이 그리 눈에 뛸 일만은 아니었다. 다만 평소에도 선생님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던 아이라는 사실이 주목할 만한 이유였다.
요즘은 조금 잠잠하지만 작년까지 저 소년이 교내 선생님들의 주의를 한 몸에 끌었던 아이였음을 떠올리면 인재는 인재였다. 다만 ―방송을 통해서였지만―아이큐 검사결과도 평범한 축에 속한데다가, 2학년 때부터는 조금 얌전하게 생활한 탓에 선생님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 유별난 아이 정도로 지위가 격하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저 소년은 몇몇 선생님들의 관심대상으로 종종 거론되었다.
특히 지금 담배를 즐기는 선생님은 한 때 ‘아몽통’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을 만큼 저 아이가 벌인 기행(?)의 피해자였기에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흥미롭게 바라본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았다.
“요즘은 얌전하다지만, 그래도 계속 전 학년 1등을 놓치지 않는다잖아요. 떡잎부터 남다르다는 게 딱 저 아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요즘 느낀다니까. 나중에 어떻게 자랄지 정말 기대되는 녀석이예요.”
곁에서 함께 소년을 관찰하던 선생님도 한 마디 거들었다.
“하긴 방송에서 제대로 못 보여준 면도 있어요. 2년 전에 쟤가 교무실을 순회할 때 모습을 생각하면··· 아이구.”
실소를 터뜨리면서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아몽통 선생님은 마지막 한 모금을 정성 들여 빨아들인 후, 위를 향해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열린 창문 틈으로 스르륵 사라지는 연기를 보며 아몽통 선생님이 말했다.
“솔직히 요즘 쟤를 보면요, 벌써 철이 든 거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도 들어요. 우리 반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2년 전에는 궁금한 거 있으면 뭐든지 물어보려고 하고 책을 찾아보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안 그런다네? 생각해보니까 애가 눈치를 보는 거 같아요. 선생들 눈치보고, 지 친구들 눈치 보면서 안 튀려고 하는 거죠.”
맞은 편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도 그런 것 같네요. 쟤 담임이 지금 이선생이잖아요? 가끔 이야기 나누다보면 이선생도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구요. 애가 튀는 짓을 안 하려고 일부러 입 다물고 수업을 듣는 것 같다고.”
“그런걸 보면 우리 교육이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단 생각이 들어요. 평준화, 평준화 하는데 저런 애들까지 평준화가 돼 버리면 어쩌겠다는 건지······.”
“영재원에 신청하면 안 되려나?”
“······.”
말을 꺼낸 선생님이나 아몽통 선생님이나 그게 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괜히 한 번 입에 올려 보는 이유는 뭘까.
저 아이가 영재원에 가지 못하는 이유는 사실 별 거 없었다. 첫 번째는 저 아이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사실이었다. 보육원의 자랑이 될 법도 한 일이니까 적극적으로 나설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보육원에서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실은 동인의 일이 터지면서 내부 사정이 복잡하게 돌아가던 중이라 여유가 없었던 것이지만, 자세한 사정이야 선생님들이 알 턱이 없으니 그저 의아하다는 생각만 했었다.
또 1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이 의욕이 넘치는 선생님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방송출연―그것도 다른 선생님의 제안으로 진행된 일―까지는 어떻게 진행을 했는데, 영재원은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기 앞가림하기 바빴던 김희연 선생님은 이미 전근을 가고 없었다.
마지막으로 2년 전 방송을 통해 나타난 결과가 영재원에 보낼 만큼은 아니라는 선입견을 심었던 게 주효했다. 천재 아니면 영재라고 설레발을 쳤던 선생님―아몽통 선생님을 비롯해서 여러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자기 반 애도 아닌데 나서서 영재원 신청 서류를 작성하며 오지랖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소년이 2학년이 됐을 때는 1학년 때의 영특함이나 재기발랄한 모습을 거의 감추다시피 해서 영재원 신청을 떠올릴 이유가 없었다.
그런 상황이니 괜히 공교육 시스템이나 탓하면서 은근히 책임회피를 하는 두 선생님이었다.
반면 두 선생님의 대화 소재로 입에 오르내리던 소년은 느린 걸음으로 운동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최근 쉬는 시간 등을 이용해서 운동으로 체력을 키우는 소년이었다.
5년간 배운 체력 단련법을 꾸준히 익혀 나갈 생각으로 시간을 할애하는 면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균형’을 위해서였다. 지난 5년간 그토록 몸을 단련해 왔음에도 크지 못한 이유는 저 곳 세상과 이 곳에 걸쳐있는 자신의 ‘불균형’ 때문이라는 신테의 이야기를 잊지 않은 소년이었다.
이 곳에서도 디아트리가 알려준 호흡법에 따라 운동을 시작하니 그 효과가 눈에 보일 정도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턱걸이를 했더니, 첫 날의 경우 6개를 겨우 했는데 바로 다음날이 되자 9개를 하는 식이었다. 50%의 효율을 보이는 운동법에 매료된 소년이 더욱 운동에 매진했음은 물론이다.
“우와, 대단하다!”
옆에서 구경하던 명수가 감탄할 정도였다. 따라 해보려던 명수는 3개를 한 후 힘이 부족해 철봉을 놓아야 했다.
물론 지난 5년간의 단련이 있었기 때문에 균형을 찾아가는 동안 몸이 빠르게 적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마 몸이 균형을 찾는 순간부터는 이 정도 효율을 보이지 못할 것이다.
뒤따라 들어온 명수가 소년을 붙잡고 이야기를 했다.
“너 운동 잘하니까, 오늘 저녁에 우리 팀 해야 한다.”
언제는 같은 팀을 안한 적이 있었나 싶었지만, 소년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명수를 웃게 해주었다. 그리고 매번 소년이 골키퍼를 했고 오늘도 골키퍼를 할 예정이지만, 명수는 그저 소년이 같이 한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다.
명수가 소년을 붙잡고 오늘 있을 보육원배 동서 더비(Derby)―최근 보육원에서 축구를 즐기는 중학생과 초등학생의 팀이 본관 중앙 계단을 중심으로 동쪽 방을 쓰는 팀과 서쪽 방을 쓰는 팀으로 나누어서 경기를 하곤 했다―에서 사용할 전략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명수가 달리고 철용이 받아서 때리는 단순 전략을 강조하는 정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 둘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음을 둘은 알지 못했다.
유림은 벼르고 벼렸다. 이제 한 달이면 겨울방학이 올 테고, 이후에는 소년을 볼 날이 거의 없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4학년이 되면서 다른 반이라도 되면 더욱 보기 힘들 지도 몰랐다. 그리고 잘생긴 소년을 다른 여자애들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지도 몰랐다.
잘생긴 남자는 항상(?)―드라마에서 보았듯이―예쁜 여자들을 만났다. 유림이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당장 교실을 둘러보아도 꽤 예쁜 여자애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애들은 소년과 키도 비슷해서,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자기보다는 나아 보였다.
여러 여자들이 한 남자를 다투는 모습은―드라마든 영화든 소설이든 만화든―쉽게 예상할 수 있는 그림이다. 자신이 누군가와 싸워서 질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소년이 보는 앞에서 거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일이 커지기 전에 소년을 찜해야 했다. 요 며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유림은, 마침 소년이 혼자 교실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을 포착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정성스레 준비해놓은 편지와 선물을 전달할 준비를 하는 찰나에 명수라는 놈이 소년의 옆에 늘 그랬듯이 껌딱지처럼 달라붙어버렸다.
평소에도 소년 곁에서 똥파리처럼 엉겨 붙는 녀석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오늘은 유독 미움이 더 커지는 기분이었다.
‘왜 하필이면 지금이야!’
생각해낼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퍼 붓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만약 니가 지금 당장 자리를 비켜준다면 앞으로 평생 동안 널 미워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비켜줘. 제발.’
들리지도 않는 부탁을 들어줄 리 없는 명수였다.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교실을 향하는 두 사람을 뒤에서 눈물 섞인 눈으로 바라보던 유림이 포기하려는데, 명수가 소년을 떠났다.
“나 오줌마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복도가 울리도록 떠들며 사라지는 명수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유림은 빠른 걸음으로 소년에게 다가갔다.
“저, 저기.”
소년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유림이 얼굴을 붉힌 채 서 있었다. 그녀가 소년보다 10㎝는 더 큰 탓에 올려다보아야 했던 소년은 소녀가 등 뒤로 무언가를 감추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무슨 일인데?”
소녀가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데,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교내에 울렸다. 이제 곧 운동장에 있던 아이들이 몰려들 것이다. 소년 역시 교실로 돌아가야 하는 건 마찬가지니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있잖아, 이거.”
유림은 눈을 질끈 감고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