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3화 (83/956)

풋사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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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받는 수업은 낯설지만 신선한 고양감도 함께 주었다. 특히 예전에는 별 감흥이 없었던 과목 중의 하나였던 사회과목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고장의 특성과 지형, 지물에 대한 정보를 왜 알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들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그 당위성을 스스로 납득하는 소년이었다.

“오늘은 옛날 사람들의 의식주에 대해 알아볼 거예요.”

소년이 느끼기에 저 세상과 이곳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과거에 대한 인식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과거의 흔적 하나하나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했다. 먹고 살기 바빴던 빈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고, 녹스에서의 6개월 동안에도 사람들이 특별히 무언가를 기록하거나 남기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남겨진 기록들을 검토했다. 그리하여 과거의 문물, 환경, 사건들을 모두 배우고 익히면서 현재와 비교했다.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도모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역사’를 굉장히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년은 생각해보았다. 만약 저쪽 세상에서 사람들이 이 곳 사람들처럼 ‘역사’를 공부한다면 무엇이 바뀔까?

“옛날 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교과서를 보면서 이야기하도록 해요. 교과서 65쪽 펴세요.”

지금은 사진 속의 이런 집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런 집들을 통해 조상들이 살았던 방식과 현재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비교해가며 설명해 주었다.

많은 아이들이 초가집이나 기와집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도시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집임에도 아이들은 익숙한 듯이 알아보고 이야기하며 수업을 받아들였다. 아마도 TV의 영향이 큰 것 같기는 했다.

소년은 관심을 가지고 수업을 들었다. 다만 과거의 풍속과 생활환경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의문이 들면 물어봐야 하는 것이 학생으로서의 바른 태도다.

“선생님. 질문 있어요.”

오랜만에 소년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하려하자, 지레 놀란 선생님이 침을 꿀꺽 삼켰다.

“옛날 사람들의 생활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뭐예요?”

교실이 조용해졌다. 3학년이 된 후로, 거의 수업시간에 질문이란 걸 한 적이 없던 소년이 손을 들었다는 사실에 침묵을 지킨 학생들과, 소년이 던진 질문의 답을 스스로 궁리하느라 침묵을 지킨 학생들이 섞여 교실은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개중 몇몇의 주목을 받던 선생님은 우선 질문의 의도를 먼저 파악하려 했다.

‘얘가 선생님한테 반항하는 건가?’

사회과목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배우는 과거와 현재의 비교는 초등학교 학생들의 수준에 맞춘 역사학의 기초학습단계였다. 둘을 비교하여 현재의 모습이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지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하며 과거에서 현대로의 변화에 맞춰,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생각하게끔 만드는 것이 기초단계에서의 수업목표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생소하지만 익숙한 놀이문화부터, 과거 조상들의 생활상을 사진과 영상을 통해 흥미를 가지고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왜 배워야 하냐’고 묻는 아이들은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역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초등교육전반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연히’ 배워야 하는 것을 ‘왜 배워야 하냐’고 묻는 것은 선생님의 생각에 논리적이지 않았다. 반항이라면 모를까.

그러나 누구나 다 알 듯이, 저 소년은 평범한 초등 3년생이 아니었다. 1학년 때부터 줄곧 1등을 도맡았었고, 특히 몇몇 학문분야에서는 영재수준의 영특함을 보이기도 하는 학생이었다.

‘선생님이 맘에 안 드니?’

라고 다그치기보다는 이 수업이 진행되어야 하는 교육학적 목표와 역사학을 배워야만 하는 역사적 사명감에 대해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후속 질문―소년이 질문 하나로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선생님은 단정했다―들에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가 1학기 때 배운 내용 중에 ‘우리 지역 자랑하기’를 다들 기억하죠? 우리가 사는 지역에 대해 자랑할 수 있는 것을 직접 조사해서 알아봤었죠? 그 수업을 통해 여러분들은 우리 지역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나요?”

지역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뗀 선생님은 과거에 대한 배움이 주는 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단원의 목표인 ‘주체적 변화’에 대해 강조했다.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의 변화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이 발전되었는지, 혹은 무엇이 고쳐졌는지를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이러한 차이점들을 하나씩 발견해 나가면서 여러분들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고쳐나가져야 좋을지, 혹은 어떤 걸 아끼고 지켜나가야 할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선생님의 입을 바라보았다. 자기들이 왜 이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 새삼 깨달은 아이들, 왜 이 지루한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가진 아이들 모두가 선생님을 주시했다.

선생님도 자신이 이 수업을 왜 진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는 동안, 스스로도 복잡했던 생각이 점점 정리되어가는 게 묘하게 가슴을 울려, 더욱 열과 성을 다해 답변을 이어나갔다.

“여러분들이 과거로부터 잘못된 것을 배우지 못하고, 과거의 생활, 관습, 문화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오늘날의 것들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해요. ‘과거가 없는 오늘은 없다. 오늘이 없으면 미래가 없다.’”

소년은 어느새 자기 설명에 도취되어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열변을 토하는 선생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수업 시간이 반쯤 지나가고 있었지만, 누구하나 이 분위기를 깨뜨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

돼지껍데기 몇 점이 석쇠 위에서 꿈틀대며 검은 연기를 토해낼 때, 둥근 양철 테이블 한 편에 앉은 50대 남자가 소주잔을 집어 들었다.

“자, 짠 하자고.”

맞은편에 앉은 비슷한 연배의 반쯤 눈이 감긴 남자가 두 손가락으로 소주잔을 집어 내밀어진 잔에 톡 하고 건배를 했다.

“아줌마, 여기 소주 2병이요.”

옆 테이블에서 말랑말랑한 목소리의 여자가 술을 주문했다.

“우리도 한 병 더 시킬까?”

50대 남자는 풀어놓았던 넥타이를 주섬주섬 챙겨 넣다가 졸린 눈의 남자의 제안에 무의식적으로 메뉴판을 바라봤다. 이 집은 돼지껍데기도 괜찮지만 계란탕도 맛있지.

“그라믄 계란탕 하나 더 묵자.”

나이가 들면 엉덩이가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비어진 소주병이 이제 겨우 2병이니 한 병 쯤 더 한다고 해서 무리가 되진 않겠지.

졸린 눈의 남자가 이모를 불렀다. 그 사이 하얀 와이셔츠의 50대 남자는 마른 뺨을 쓸어내렸다. 까칠까칠하게 자란 수염이 느껴졌다.

가게 밖 대로에서 확성기를 설치한 차량이 지나가고 있었다. 기호1번 주정호를 외치는 유세차량이었다.

“애저녁에 끝난 게임이구만 뭘 저렇게 시끄럽게 떠들어 대누?”

와이셔츠의 투덜거림에 졸린 눈의 남자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저거? 에이 아직 모르지.”

“모르긴 뭘 몰라? 강해준인가 그 양반 완전히 게임 끝났드만.”

“얼래? 허, 이 친구 보게. 저기 주정혼가 뭔가 하는 양반도 더럽긴 마찬가지 아냐? 돈 먹었다매?”

와이셔츠는 아르바이트 점원이 가져다 준 소주병을 받아들고 뚜껑을 돌렸다. 끈끈한 손바닥 탓에 뚜껑은 손쉽게 열렸다.

“그게 언제쩍 일인데 그걸 갖고 이러쿵 저러쿵 해쌌누? 공소시횬가 그것도 다 끝난 일이라매?”

“그거 말고도 더 있다더만.”

졸린 눈이 빈 잔을 들어 소주를 받았다.

“에이, 아이다. 고거는 강해준이가 꼬투리 잡을라고 억지부린거더만. 그거 다 신문에서 흑색선전한기다. 죄가 있다 캐도, 제일 처음 꺼 조금 챙겨 묵은 거 밖에 없다드라.”

“아니 그래도 공무원이 부정을 저질렀으면 처벌을 받아야지, 시효 지나서 처벌 못하면 단가? 그리고 신문에서 다 조사해서 드러난 사실인데, 증인도 있고. 그걸 흑색선전이라 하면 안 되지.”

“어허, 이 사람이. 그게 언론플레이 라는 기다. 언론이 젊은 아들 선동하는 기라고. 저그들이 강해준이 밀어 줄라고 날조한 거라니까 그카네.”

“누가 그러는데?”

“누구기는. …알 사람은 다 안다. 강해준이는, 그거는 안 돼. 입만 열고 씨부리면 죄다 거짓말이고, 지 아랫도리도 함부로 놀리대는 그런 놈은 안 되는 기라. 그놈은 아예 인성이 못돼 처먹고, 이게 안 되는 놈이야.”

와이셔츠가 손가락을 들어 자기 머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막말로, 옛날에, 공무원 중에 안 그런 사람은 또 어데 있나? 걸린 사람만 바보라 카면서 죄다 뒷구멍 챙기기 바빴제. 그 때는, 응? 학교선생도 촌지 내달라고 응? 당당하게 외치던 시대였다 아이가. 주정호도 그때 조금 챙겨먹긴 했긋제. 근데 그거 갖고 사람을 뭐, 응? 뭐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매도하고 마녀 사냥하듯이 말이야. …그러면 안 돼. 안 돼.”

술이 취하기 시작하면 요상한 어투가 섞여 나오기 시작하는 친구였다. 경상도 말투 같기도 하고 강원도 억양 같기도 하고, 경기도 사람 같기도 한, 요상한 말투의 와이셔츠는 사실 젊었을 적의 거친 파도를, 전국팔도를 헤치며 이겨낸 친구였다.

말하는 중간 중간에도 소주를 물마시듯 들이킨 탓에 졸린 눈이 조용히 소주 한 병을 더 시켜놓은 상태였다.

“보래이, 지금 주정호가 말이데이. 휴…. 주정호가 응? 당선이 되제? 되믄 점마 돈이고 빽이고 다 인평시를 위해 쓸거라 안카나? 그리고 저그 당 얼매나 좋노? 그체? 금마가 의원이 되제? 그라믄 인평시가 발전하긋나 안하긋나?”

점점 혀가 꼬여가는지 발음이 조금씩 뭉개지는 와이셔츠에게 몇 안 남은 껍데기 한 점을 물렸다.

“옛날에도 부정부패를 저지른 놈인데, 당선되면 더 심하게 안하겠나? 제 버릇 개 못준다고 하잖아.”

질겅질겅 씹어대면서도 와이셔츠는 자기 할 말은 하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안하지. 안하지. 금마가 하믄 짐승이지. 근데 안한데이. 나중에 함 봐봐라.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 아이가. 근데 내가 보믄 있제. 금마는 안해. 딱 보니까 이제 정신차린 기라. 정신 똑-바로 챙기가 할기다. 근데 강해준이가 되면 있제. 인평시 망한다. 완전-히 망해뿐다.”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와이셔츠를 달래기 위해 졸린 눈은 건배를 제의했다. 그리고 화제를 돌리려고 머리를 굴렸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는 ‘학교 선생도 촌지 내달라고’라는 부분에서부터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은 직장 동료 역시도 침묵을 지키며 껍데기만 집게로 뒤적거리며 타지 않도록 했다.

“판 갈아 드릴께요.”

아르바이트 점원이 덜 씻은 듯 군데군데 검은 그을음이 묻은 석쇠를 들고 다가왔다. 대답도 안했는데 능숙하게 석쇠를 교체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러는 사이 옆 자리 아저씨의 목소리가 커지더니 맞은 편 아저씨가 진정을 시키려 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해준 후보를 규탄했다.

“야, 나갈까?”

동료가 나지막하게 물어왔다. 이런 시끄러운 분위기에서는 이야기도 제대로 못하겠다 싶어 꺼낸 이야기인데, 두 사람 사이에 수북이 쌓인 돼지 껍데기가 아까웠다.

“이것만 먹고 가지 뭐.”

교사윤리에 따르면 교사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교사도 이 사회에 속해서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생각이 있고 발언의 자유가 있지 않은가. 부당한 일에 부당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아이들에게도 떳떳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잔을 채워줬다.

“오늘 우리 반에 애가 질문을 하더라. 역사를 왜 배워야 하냐고.”

“누가 그런 질문을 해? 아, 걔?”

“응. 그런데 처음엔 지도서에 있는 대로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하다보니까 막 대학 때 배웠던 것도 생각나고 선배들한테 들은 이야기들도 생각나고 그러는 거야. 사실 내가 처음에는 온고지신을 설명하려고 그랬다? 근데 말을 할수록 신채호 선생의 말이 생각나면서 막 흥분이 되는 거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어. 근데 또 그걸 그대로 이야기하면 애들이 못 알아 듣지 않겠어? 그래서 또 풀어서 설명하고, 하다보니까 시간이 그냥 지나갔네? 그래서 진도를 못 나가고 수업이 끝났네? 종치니까 어, 내가 뭐한 거지? 이런 생각이 막 드는 거야? 그런데 또 조금 뿌듯한 생각도 들더라고? 이 아이들이 나중에 더 자라서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게 될 때 내가 한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공부를 한다면 바른 역사관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거.”

“많은 선생님들이 그런 착각 속에 빠지긴 하죠.”

동료가 거짓으로 놀리듯 말했다.

“근데 수업이 딱 끝나는데 걔가 다시 질문을 하더라?”

“뭐라고?”

“과거의 실수나 잘못도 모두 기억해야 하는거냐고.”

“그래서?”

“더 좋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현재의 잘못이나 실수를 고쳐나가야 할 필요가 있듯이, 과거의 잘못한 점이나 반성해야 될 부분들도 모두 기억하고 고쳐나가야 한다고 대답했지.”

“잘했네.”

동료가 잔을 들었다. 선생님도 잔을 마주 들고 부딪쳤다.

“근데 지금은 맞게 대답을 한 건지 모르겠어. 모든 사람들이 과거의 잘못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는 게 사실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치부를 덮거나 잊으려고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과거를 잊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사람도 있고…….”

선생님은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힐끔 옆 테이블을 훔쳐봤다.

“···나쁘거나 잘못된 걸 덮어서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 도 좋은 방법이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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