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사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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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깨어났다. 연락을 받은 보육교사가 병원으로 달려왔고, 소년은 몇 가지 검사 끝에 무사히 보육원으로 돌아갈 수 있게 조치되었다. 퇴원을 앞두고 수속을 밟던 보육교사는 가기 전에 의사 선생님을 뵙고 가기 위해 간호사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응급실 콜 받고 잠시 내려가셨거든요? 간호사 데스크에서 기다리시면 의사선생님 뵐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의사와 마주친 보육교사는 사정을 설명했다. 의사는 머리를 긁적대며 말을 꺼냈다.
“사실 이게 맞나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시간으로만 따지면 거의 3일을 코마상태에 빠져 있던 아입니다. 당장 검사결과에 문제가 없고, 아이의 의식도 또렷하지만 다시 어떤 일이 발생할 지는 저로서도 장담을 못해요. 마음 같아서는 일주일정도 경과를 지켜보면서 아이의 건강이 완전히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는 퇴원을 불허해야 되요.”
의사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욕을 뱉었다. 딱히 누구를 향해 한다기보다는 그냥 이 지랄 맞은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일 테다. 하지만 힘이 없기는 보육교사 역시 마찬가지인데 누굴 탓할까. 들어도 못 들은 척 하는 게 다였다.
“아무튼 윗분들이야 한 푼이라도 아끼고, 한 푼이라도 더 벌려는 생각이시라고 짐작은 하지만, 솔직히 그 쪽은 이해가 잘 안되네요. 보육원이면 특히 더 애들 신경을 써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그 한 마디도 꺼내기가 힘든 보육교사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사정이 있다고 하시니, 뭐 제가 경찰도 아닌데 그 쪽에게 뭐라고 할 일은 아닙니다만, 혹시라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시면 바로 병원으로 와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보육교사는 고맙다는 짤막한 인사와 함께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소년에게 돌아갔다.
“가자.”
“예. 선생님.”
소년은 보육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쓰러진지 삼일이 지난 평일 오후였다.
보육원에 돌아온 소년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역시 명수였다.
“석고야, 괜찮아?”
펑펑 울면서 마중 나와 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턱을 따라 떨어지는 시커먼 땀방울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안녕, 명수야.”
“어, 그래. 이제 다 안 아파?”
그래도 걱정은 해주는구나.
“다 나았으면, 너 우리 팀 해라. 우리 팀에 사람이 모자라.”
“······.”
“명수야, 지금 병원에서 돌아오는 애한테 무슨 말이니.”
보다 못한 보육교사가 어이없어 하는 웃음을 지으며 명수를 타일렀다.
“석고가 평소에 운동을 안 해서 그래요. 저처럼 운동 열심히 하면 몸도 좋아지고 안 아픈 거예요. 전 병원 간 적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팀하면 병원 안가도 될 거예요.”
보육교사와 소년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명수가 강제로 손목을 잡고 끌자, 소년은 못 이기겠다는 듯 억지로 끌려갔다. 끌려가는 중에 힐끔 뒤를 돌아보며 보육교사의 눈치를 살피니,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보육교사와 눈이 마주쳤다. 보육교사가 손짓으로 허락을 하자, 그제야 명수와 나란히 달려 운동장으로 뛰어가는 소년이었다.
그 뒷모습을 보던 보육교사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다가 보고를 위해 원장실로 향했다.
꽤 차가운 늦가을 바람에도 아이들의 지치지 않는 열정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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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갔던 아이가 무사히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만.”
마치 감기약 처방받고 왔다는 듯 서두를 떼는 행정 과장이었다. 원장이 피식 웃으며 과장 앞에 커피 한 잔을 내려놓고는, 자신도 소파 위로 무거운 엉덩이를 묻으며 커피 향을 음미했다.
“예, 별일 없다더군요.”
여유로운 대답에 뿔이 난건지, 커피가 너무 입에 안 맞아서 그런지 과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일전에도 한 번 쓰러진 적이 있다면서요?”
행정과장은 뭐라도 꼬투리를 잡고 싶었다. 잠시라도 원장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자신이 느끼는 쓴 맛을 함께, 아니 혼자 느끼게 하고 싶었다. 원장이 쓴 맛을 느낄 때, 자신은 뭘 먹어도 달게 먹을 수 있으리라.
“허허, 저도 그게 걱정이 됐었는데 검사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다더군요.”
최근에 보도된 뉴스로 인해, 강해준 후보는 당선 가능성이 20%대로 떨어졌다. 반면 주정호 후보는 50%를 넘긴 상황. 보궐선거의 명암이 복지재단 이사회에 그대로 이어졌고, 이사회의 명암이 그대로 이어져 원장과 행정과장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2년 전,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원장 라인이 심대한 타격을 받으며 그대로 무너지지 않을까 했었는데, 끈질기게 버티더니 결국 갑작스런 보궐선거와 함께 이사회 라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후보의 당선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원장의 위세가 살아나는 중이었다. 만약 그 후보가 당선이라도 된다면 후일 중앙관계에 이사회 사람 중 한 사람이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는 소문이 있었다. 당연히 그 사람은 원장 라인의 사람이었다.
“그래도 조용히 무마되어서 다행입니다.”
속마음과 전혀 반대이지만, 어쩌겠는가. 판을 뒤집을 수 없다면 일단은 자중하는 수밖에. 행정과장은 요사이 보육원을 주시하고 있다는 양기자에게 언질이라도 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윗선에서 말렸다. 재단법인 내의 회계문제도 있었던 데다가, 이사회 내부의 알력 다툼이 수면 위로 드러날까 전전긍긍했던 것은 양쪽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다 뒤집고 새 판을 짜는 것도 방법인데 말이야.’
행정과장은 윗선에서 너무 몸을 사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빨리 위로 올라가야 했다. 너무 오래 여기 있다간 그대로 말라붙은 껌처럼 되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새 판이 짜 지겠죠.”
원장이 던진 한 마디에 화들짝 놀란 행정과장. 속내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던 원장이 머리를 까닥이며 말을 이었다.
“주정호 후보가 당선이 되면, 인평시의 여러 가지 현안들이 일사천리로 해결될 겁니다.”
“아무래도 그쪽 당이 힘이 있죠···.”
원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주정호 후보가 워낙 힘이 좋으니까요. 뭐 잘하면 내년에는 정관개정도 잘 진행될 거라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
커피가 쓴 것이 분명했다. 좀생이 같은 원장 같으니라고. 설탕 한 스푼이라도 넣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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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럽게도(?) 소년이 쓰러진 날은 금요일 오후였다. 월요일 오전에 병원에서 깨어난 탓에 학교는 하루만 병결로 처리되었고, 화요일부터는 정상적으로 등교를 할 수 있었다.
“너 어제 학교 왜 안 왔어?”
반 아이들은 소년이 쓰러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선생님도 단순 몸살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아파서.”
소년 역시 굳이 자신이 쓰러졌다는 사실을―비록 보육교사의 당부가 있긴 했지만―떠벌릴 이유가 없었다.
“좋았겠다.”
몇 몇 아이들은 소년이 결석한 사실에 대해 주목했다. 결석을 함으로서 학교를 하루 빠질 수 있었고, 덕분에 하루 마음껏 놀 수 있었겠다는 낙관적인 추측을 한 것이다.
만약 수업종이 울리지 않았다면, 아이들은 병결을 이유로 하루를 놀 수 있는 신선한(?) 아이디어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진행한 후, 집행결의를 시도했을지도 몰랐다. 선생님은 불온한 사전모의를 적절하게 차단함으로써 3학년 2반의 면학분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업적을 알지 못했다.
“자, 수업해야지. 다들 자리로 가세요.”
선생님은 몸은 괜찮냐는 말로 이틀간 코마상태에 빠졌다가 돌아온 아이의 안부를 퉁쳤고, 소년은 웃음으로 수업을 열심히 듣겠다는 각오를 보임으로서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수업 환경이 형성되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 선생님은 주요 공지사항을 우선 이야기했다.
“조금 갑작스러울 수 있겠지만, 어제 장혜진 친구가 전학을 갔어요. 너무 갑자기 진행된 일이라서 혜진이가 우리 친구들한테 인사도 못하고 떠나서 많이 슬퍼했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대신 인사를 전해주려해요. 여러분들도 혜진이가 다른 학교에 가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꼭 잘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길 바랄게요. 알겠죠?”
“예!”
아이들은 의례적인 대답을 힘차게 내뱉었다.
소년은 잠시 ‘장혜진’이란 이름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았다. 너무 오래전에 들은 이름이어서 한참을 생각했고, 마침내 그 이름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마침 아득히 먼 어딘가의 유세 현장으로부터 단말마의 비명 같은 함성소리와 확성기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어와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였다.
고개를 돌려 교실 뒷문 쪽을 바라보니 빈자리가 보였다. 왠지 날선 눈매의 여자아이가 바라보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은 분명 기억에서 불러온 친구의 그림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만큼이나 색이 바랜 기억과 감정은 소년의 시선을 오래 붙잡을 수 없었다. 다시 시선을 되돌리려는데,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눈동자를 살짝 돌리니 한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시선을 아래로 피했다.
소년은 다시 몸을 돌려 책을 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방금 전의 여자 아이를 생각했다.
‘누구였더라.’
확실히 5년이라는 시간은 긴 시간이었다. 게다가 보는 법과 듣는 법을 익히기 위해 지난 과거의 기억들을 너무 깊은 곳에 묻어둔 나머지, 다시 기억을 되살리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곤란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계속 학교생활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를 이름들이었고 기억들이었다. 무리하게 떠올리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고, 만약 급하게 떠올려야 할 이름이었다면 진작 떠올랐을 것이다. 명수처럼 지워지지도 않았을 테고.
반면 유림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월요일에 소년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많이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오늘,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은 얼굴로 나타난 소년을 보고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혜진이 전학을 갔다는 이야기는 나름 충격적이었고 속이 복잡해질 이야기였다. 하지만 진짜 충격은 소년이 혜진의 빈자리를 쳐다보는 모습이었다.
소년이 혜진의 소재에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었고 마음이 아팠다.
‘왜 걜 찾는 거야? 날 봐! 날 보라고!’
심히 평소의 독서습관이나 드라마 시청양태를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었지만 소녀의 감성은 남들이 쉬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속으로 외치고만 있을 뿐이었기에 남들이 알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소녀의 외침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소년이 눈을 돌려 소녀를 쳐다보았다. 유림은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후에는 도저히 시선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계속 자기를 쳐다보는 것 같았고, 혹시라도 눈이 다시 마주치면,
“왜 쳐다봐?”
라고 말을 건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림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가 혹시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던 걸까? 다 들은 건가? 뭐라고 하지?’
소녀의 복잡한 마음을 알 길 없는 소년은 이내 수업에 집중했다. 가을바람과 유세 현장의 소음이 다가왔다가 닫힌 교실 창문에 부딪히고 사그라들었다.
그 시간, 유세현장에서는 주정호의 유세기간 마지막 연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인평시 여러분, 부도덕하고 기만적인 강후보의 최후를 보셨습니까? 지금 내연녀와 그 딸을 미국으로 보내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이런 후보가 우리 시의 의원이 되었을 때, 우리 인평시의 희망과 미래를 내팽개치고 자신의 사익을 뒤로 챙기며 배를 불리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이 우리 인평시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인평시가 원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원하십니까? 제가 인평시 의원이 된다면 인평시 여러분의 희망, 미래, 경제, 안정과 발전 모두 책임질 수 있습니다. 거짓말 하지 않는 주정호, 깨끗하고 정정당당한 주정호, 가장 밑에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주정호를 뽑아주십시오, 여러분!”
그의 공약에 사람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