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81화 (81/956)

수업(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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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루치드는 집 앞에 놓인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광원을 띄우지 않으면 숲속은 어둠 그 자체여서 눈을 뜨나 감으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어렴풋하게 보이는 것도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눈을 감았다. 오로지 귀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처음에는 그 자세를 1시간 이상 유지하기 힘들었다. 눈을 감고 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뜨리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한 번은 너무 깊게 잠들었는지, 눈을 떠보니 집 안이 밝혀져 있고 세 사람 모두 집에 돌아와 있었다. 아무도 잠든 루치드를 깨우지 않았다.

“피곤하면 자야지.”

안트는 시큰둥하게 말했고,

“괜찮아. 그럴 때도 있지. 원래 니 나이 때는 잠이 많기 마련이야.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라고 신테가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녁 먹자.”

디아트리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루치드는 귀를 기울이는 연습을 했고, 아무런 성과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다.

눈을 감고 있던 루치드가 잡생각을 지워나가며 집중을 하던 무렵, 세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서 루치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가는군.”

“그렇지? 근데 오늘은 좀 될 거 같아 보이는데? 어때, 안트?”

“도대체 이렇게 보고 있는게 무슨 소용이 있단 거야?”

투덜대는 안트의 등을 두드려주던 신테가 다시 루치드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놀라운 일을 겪은 아이야. 다른 세계라니. 솔직히 상상이 안가. 자동차니, 텔레비전이니 하는 건.”

“난 백과사전이란 걸 보고 싶군.”

디아트리가 이토록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은 드물었던 지라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오랜 세월에 걸친 지식을 다양한 책을 통해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전달한다는 것은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긴 하지. 하지만 전달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누적된 양이 놀랍다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 아마도 그 세계의 과학이라는 문명은 누적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발전된 것일 거야. 음, 그 반대인가?”

신테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안트가 입술을 삐죽이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과학이라는 수단이 아니고는 진실에 다가갈 수 없었던 거라고 봐야 옳지. 이쪽이나 저쪽이나 생각하는 바가 비슷하다면, 그곳에도 지톤이 있을 수 있으니까.”

안트는 공중에서 손을 한 번 휘젓더니 아래로 내렸다. 그의 손에는 붉은 사과가 하나 잡혀 있었다.

“쉿.”

디아트리가 둘을 조용히 시켰다. 세 사람은 다시 루치드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숲 위로 부는 바람소리라도 들으라는 걸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니 고작 그걸 들으라고 이렇게 숙제를 준 건 아닌 것 같았다. 사실 바람소리는 비록 수많은 나무의 잎사귀로 뒤덮였더라도 그 소리를 듣는 것이 어렵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만약 바람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바람소리를 들으려 애쓰지 않는 이상에는 바람소리를 듣지 못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루치드는 가정을 세웠다.

‘신테는 소리를 들으라고 했어. 즉 소리를 내는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겠지. 그렇다면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걸 우선 인식하고 소리를 들으려 한다면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루치드는 생각을 조금 고치고, 더욱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을 했다.

잠시 후, 루치드는 눈을 번쩍 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눈을 떴음에도 미약하나마 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었다. 천천히 일어난 루치드가 그 소리를 따라 갔다. 점점 소리의 진원지에 다가갈수록 귓가에 들리는 휘파람 같은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마침내 루치드는 소리가 나는 나무에 도달했다. 소리는 정확히 나무 위에서 들리고 있었다. 눈을 좁히고 어둠 속에 있는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소리를 내는 그 무엇을 보기 위해 집중을 하자, 드디어 그 정체가 드러났다.

하얀 깃털을 가진 조그만 새였다.

자각을 하는 순간, 루치드는 귓가에서 아련하게 메아리치듯 소리가 들리기 시작함을 깨달았다. 그것은 비단 눈앞의 새에게서만 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숲 전체에서 온갖 새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 종류가 아니었다. 너무나도 많은 종류의 새가 이 숲속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을 여태 모르고 살았던 루치드였다.

“들리니?”

신테가 물었다. 루치드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예. 정말… 이렇게 많은 새가 있는 줄 몰랐어요.”

머뭇거리던 루치드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동물들도 살고 있었는데도 보질 못했어요.”

두 볼에 먹을 것을 가득히 집어넣고 가지를 넘어가는 다람쥐와 윤기 나는 꼬리를 흔들며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청설모. 긴 다리로 여유롭게 숲안개 위를 산책하듯 거닐던 고라니와 점박이 사슴들. 노근 위를 뛰어넘는 하얀 토끼와 바위 뒤로 숨는 갈색 줄무늬 너구리.

이 모든 것들을 지금껏 보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다.”

디아트리가 루치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치드는 오른 손 소매로 눈 밑을 쓱쓱 문질렀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안트, 고마워요. 지금까지 전 모든 걸 의심하려고 노력은 했는데 단 하나 저를 의심하지 않았어요. 사실은 자신도 의심했어야 하는 거죠?”

“편견이란 건 진실을 가리는 안대와도 같다.”

“저 물은 마셔도 되는 거죠?”

루치드가 가리킨 방향에는 시냇물이 희미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안트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트리, 고마워요. 이 숲은 사실 별로 넓지가 않았나 봐요. 대신 제가 모르는 게 많았던 거겠죠.”

“끝을 상상하지 않으면 끝을 볼 수 없다.”

디아트리가 묵직하게 한 마디 했다.

“신테. 이제 경계를 넘을 수 있나요?”

신테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갈 때가 됐구나.”

루치드와 세 남자는 경계선 근처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동안, 루치드는 자신이 이 숲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수많은 동물과 새들이 곳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동안 보았던 발밑을 가리던 진한 숲안개는 희미한 자취만 남기고 있었고, 갈색 토지에는 다양한 식생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안트의 키와 비슷한 크기의 두릅나무에 연녹색 잎이 이슬을 머금고 있거나, 고동색 떡갈나무의 줄기 아래에 하얀 버섯들이 점점이 돋아나있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자연히 죽어간 나무의 옆을 어슬렁거리는 늑대무리도 있었는데 전혀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들은 숲에 매우 조화롭게 어울려 있었다.

숲을 나왔더니 경계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희미한 빛의 장막을 두른 경계는 북극의 오로라가 이러할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숲에 가려져 있던 하늘도 보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보였다. 해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맑은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이었다.

“저길 지나면 뭐가 있나요?”

“그건 우리에게 할 질문은 아닌 거 같구나.”

“아, 그렇군요.”

루치드가 보려고 마음먹는다면, 제대로 보기를 원한다면 보일 것이다.

“아, 궁금한 게 있어요. 낚시는 어떻게 한 거예요?”

“그건 숲의 비밀 정도로 남겨둬야 할 것 같은데?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다시 올 마음이 생기도록 말이야.”

“다시 와도 되나요?”

세 사람은 빙긋 웃었다. 평소 무뚝뚝한 표정의 디아트리마저도 웃었다.

“친구가 있느냐?”

“예. 있어요.”

“친구를 소중히 생각해라. 우정은 인간관계의 최고봉이다.”

“또 말도 안 되는 소리하네.”

안트가 팔짱을 끼며 핀잔 섞인 혼잣말을 뱉었다. 신테가 루치드의 어깨를 짚으며 이야기했다.

“여기서 배운 것들이 너의 앞날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루치드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경계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

발을 떼어 걸음을 옮겼다. 푸른 잔디와 하얀 들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가운데, 루치드는 경계선을 넘었다.

5년 만에 다시 돌아가게 된 루치드였다.

****

루치드가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예의 그 습지가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되레 반가운 느낌마저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 산으로 막혀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돌산을 물어본다는 걸 깜박했네.”

하지만 지금은 돌산에 대한 호기심보다 다시 돌아왔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더 컸다. 주위를 둘러보니 거대한 새는 보이지 않았다. 뭐, 이제는 크게 상관이 없을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루치드는 습지를 뛰어서 건넜다. 바짓단에 눅진한 진흙이 묻어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꾸에엑

습지를 다 건널 무렵 뒤에서 소리가 났다. 어느새 그 새가 나타났다. 돌아본 루치드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반갑다.”

―꾸에엑

새가 화답하듯 울음을 냈다. 뒤돌아선 루치드가 새에게 다가갔다. 루치드는 그 새 역시 자신을 반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손으로 새의 날개를 툭툭 쳐졌다.

“혼자 여기 살아?”

주먹만 한 눈으로 묵묵히 루치드를 바라보는 새였다. 루치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한 냄새에, 오물과 배설물과 곤충과 벌레가 뒤섞인 습지에 오롯이 서 있는 새였다.

“외로웠겠구나.”

―꾸우우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가볍게 부리를 위아래로 흔드는 새였다. 루치드는 새의 부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아. 하지만 다음에 올 일이 있으면 또 보러올게.”

다시 새는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루치드는 웃음을 지어주고 돌아섰다. 습지를 건너 돌아보니 여전히 그 자리에 있던 새가 날개를 활짝 펴 루치드를 배웅했다. 루치드도 손을 흔들어주고 빈촌으로 돌아갔다.

빈촌으로 돌아간 루치드는 매번 이곳으로 돌아올 때는 빈손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피식 웃음을 지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몸을 씻은 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집 앞의 너럭바위에 누워서 앞으로의 일을 그려보았다.

더 이상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찾을 길도 없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작정 막막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쩐지 그곳에서 5년을 보내는 동안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천천히. 천천히 살아가보자. 살다보면 찾을 수도 있겠지. 제대로 듣고 볼 수 있다면 세월이 지나도 잊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도 있겠죠. 그렇죠?”

너럭바위 위에서 잠시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았다. 겨울엔 해가 짧기 마련이다. 노을은 금세 어둠으로 변했다. 별들이 하나 둘 떠오르며 밤하늘에 수를 놓기 시작했다. 하얀 휘장을 드리운 검은 하늘에 보름달이 떠올랐다. 문득 생각이 나서 빛을 쏘아 올리는 루치드.

겨울바람을 뚫고 하늘로 올라간 빛이 어느 순간, 팟 하고 터지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잔영을 남기며 사그라드는 불꽃을 보며 루치드는 미소를 지었다.

“친구는 인간관계의 최고봉이다.”

디아트리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명수는 루치드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아니 명수를 대할 때 자신은 ‘루치드’가 아니었다.

“루치드는 이 곳 세계에서의 나.”

그 곳에서나 이 곳에서나 다 같은 ‘자신’이지만 이름으로 규정되는 정체성은 서로 달랐다. 자신은 그곳에서 늘 다른 이름으로 불렸고, 그 이름이 곧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그 세계의 일원으로서 본 모습을 규정하는 것은 그 곳에서의 이름이었다. 그 곳에서는 루치드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 곳에서는…….

“나는…….”

****

“정신이 들어요?”

귀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삐이

“선생님, 302호 환자 깨어났습니다.”

소년의 귀로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귀로는 뭔가 분주하게 사람들이 오가고 자신의 몸을 건드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이 쉽게 떠지지 않았다. 좀 더 힘을 줘 보는데 손가락 두 개가 눈꺼풀을 붙잡더니 강제로 개방을 실시했다. 놀랄 틈도 없이 웬 불빛이 눈동자 앞을 왔다 갔다 했다.

“동공반응도 완전히 돌아왔네요.”

불빛을 쥐고 있던 남자가 무감각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목소리에 피로와 잠이 섞여 있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남자는 소년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정신이 들어? 눈 뜰 수 있겠어?”

그렇게 흔들면 죽은 사람을 빼고는 다 일어나지 않을까요? 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술도 풀로 붙인 듯 떨어지지 않았다. 일단 한 번 열렸던 탓인지 눈을 뜨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여기 보여? 여기 봐봐. 이거 보여?”

눈앞에서 뭘 그리 흔들어대는지. 일단 보이긴 하니깐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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