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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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지났다. 루치드는 여전히 번갈아가며 배움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세 사람이 말해주는 것을 제대로 소화하고 있다는 느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아주 의미 없는 시간만은 아니었다. 나름 골몰히 생각하기도 하고, 새벽에 일어나 말똥말똥한 눈으로 숲 속을 응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학문을 쌓던 지난날에 비하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때로는 지루했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생각에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했었다.
세 사람은 그런 루치드를 보면서도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공부하라고 하지도 않았고, 숙제를 빨리 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든, 저렇게 보내든 모두 너의 몫인걸?”
신테는 루치드의 하소연에 이렇게 답했다. 루치드는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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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달이 지났을 무렵, 루치드는 숲 속을 돌아다니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 동안 공부만 하느라 약해진 체력이 강해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무를 오르는 것도 익숙해져, 예전에는 마법의 도움을 받아 올랐다면 지금은 순수한 자신의 힘만으로 나무를 오를 수 있을 만큼 팔이나 다리에 힘이 붙었다.
사실 여기에는 안트의 도움이 있었다.
“머리가 안 움직일 땐, 몸이라도 움직여봐. 몸이 게으르면 머리도 게을러지는 거야.”
세 사람 중 가장 게으른 사람에게 들은 조언은 아이러니하게도 루치드가 다시 생기를 찾을 수 있게 도왔다. 세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 조금 줄어들어도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게 좋기도 했다. 무엇보다 몸에 힘이 붙고 달리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눈에 보일수록 더욱 체력 단련에 힘을 썼다.
역시 성과가 눈에 보여야 동기부여가 되는 법이었다.
하루는 디아트리가 달리던 루치드를 불렀다. 그 때 루치드는 나름 꽤 먼 거리를 뛰어다닐 수 있을 만큼 체력이 붙기 시작하면서, 달리기에 흥을 올리던 시기였다. 특히 광원을 꺼놓고 달려도 될 만큼 가까운 숲의 지리에도 익숙해진데다가, 장애물피하기라는 형태의 놀이―숲안개에 가려진 바위나 노근(露根)을 피하거나, 나무와 나무사이를 가로지르는 덩굴을 피하는 등―에 흥미를 더해가던 루치드였다. 그 날도 신테와 과일을 따러 갔다 온 후, 저녁 러닝을 하러 나가려는 참이었다.
“달리는 방법을 알려주마.”
6달 만에 새로운 가르침(?)을 주는 디아트리였다. 디아트리는 두 가지 근육의 사용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빨리 달릴 때 사용하는 근육과 오래 달릴 때 사용하는 근육이 다르다는 사실에서 시작된 그의 운동법은 호흡을 통해 근육의 긴장을 늦추고 힘을 오래, 그리고 강하게 사용하는 법이었다.
“속근(速筋)은 격렬한 달리기나 운동을 할 때, 또는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발휘할 때 유용하다. 이 근육은 호흡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이 근육을 쓰기 전에 호흡을 잘 다스려야 더 효율적으로 근육을 사용할 수 있게 되고 힘을 쓸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지근(遲筋)은 오래 달릴 때나 장시간 지구력을 요할 때 사용하는 근육이다. 이 근육을 사용하는 동안 많은 호흡을 요구한다. 이 호흡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효율이 달라진다.”
그리고 어떻게 호흡을 하면서 운동을 해야 효율적으로 근육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균형 잡힌 운동법으로 몸을 고르게 성장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동시에 호흡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하였다.
“우리 몸은 평소에도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지만, 특히 격렬한 운동을 할 때 몸속의 에너지를 신속하게 공급해야 효과적이고 부상의 위험도 적다. 속근은 에너지를 한 번에 다량으로 주입하여야 하며, 지근은 오랜 시간 분산하여 주입하여야 한다. 그 에너지를 다루는 방법이 호흡이다.”
루치드는 디아트리의 가르침에 따라 운동을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운동을 하니 처음에는 힘들었다. 하지만 이 방식대로 했을 때의 보상―디아트리의 단단한 몸―을 상상하며 꾸준히 해나갔다. 안트는 얼굴 가득히 땀을 뻘뻘 흘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루치드를 보았다.
“그래도 숙제는 꼭 해라.”
운동할 때는 거의 머릿속을 비우고 하는 편이었지만, 숙제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포기해서도 안 될 문제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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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지났다. 그 동안 세 사람을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경험한 루치드였지만, 여전히 그들이 내준 숙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대신 몸은 점점 튼튼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위로했다. 하나라도 성과를 보인다는 사실이 쉽게 포기하지 않게 도와주었던 것이다.
네 사람이 다 함께 모여 숲낚시를 했다. 숲 위로는 여전히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이 마치 그려넣은 듯이 머물러 있었다. 나무줄기의 맨 위에 안전하게 자리를 잡은 루치드는 낚싯줄을 숲 아래로 드리웠다. 그 동안 자주는 아니지만 간간히 낚시를 하며 감을 익힌 루치드는 그 동안의 체력 훈련의 성과가 있었는지 1m짜리 물고기를 낚기도 했다. 신테가 그런 루치드를 칭찬했다.
“실력이 많이 좋아졌는걸? 다음에는 저것도 잡을 수 있을 거야.”
신테가 가리킨 것은 5m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농어를 든 디아트리의 모습이었다.
“저건 10년이 지나도 못 따라할 것 같은데요?”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키가 크지 않는 루치드였다. 체질량에 대해 근육이 발휘할 수 있는 근력은 체구가 작을수록 증가한다. 즉, 루치드가 계속 힘을 기른다면―이론적으로는―어른 이상의 근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상, 몸이 성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근육이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았다. 다시 말해서, 루치드는 현재의 체구에서 낼 수 있는 거의 한계치의 근력을 훈련을 통해 가질 수는 있지만, 더 큰 근력을 갖기 위해서는 몸이 성장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왜 키가 안자랄까요?”
“그건, 너의 몸이 성장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디아트리가 농어를 옆의 나무 가지에 걸쳐놓으며 말했다.
“예?”
이번에도 신테가 친절하게 보충을 해주었다.
“지금 니 몸은 사실 불균형적인 상태야. 괴리감이라고 표현하면 알려나? 예를 들어 거울을 본다고 가정해봐. 거울 속의 넌 거울 밖의 너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지. 그런데 니가 오른손을 들었을 때 거울이 반대쪽 손을 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니? 니가 고개를 움직이면 거울 속의 너도 고개를 움직여야 정상인 건데, 지금 니 모습은 한 쪽만 움직이고 한 쪽은 움직이지 않는 거지.”
신테의 이야기에 루치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히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전 거울속의 사람이라는 말인가요?”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신테가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그건 그냥 비유일 뿐 인거지.”
가만히 듣고 있던 안트가 툭 내뱉었다.
“그냥 니 이야기를 해봐라. 이제 들려줄 때도 된 거 같은데.”
직설적인 안트의 추궁에 루치드는 입술을 달싹였다. 어쩌면 이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하고 도움을 얻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그 경험이 이 사람들한테 어떤 반응을 불러올지 몰라 두렵기도 했다. 감히 상상도 되지 않지만,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이 입을 쉽게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걱정하지마라.”
디아트리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눈치를 보니 다들 표정은 하든지 말든지였다.
고심 끝에 루치드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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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이 지났다. 여전히 루치드는 키가 자라지 않았다. 대신 처음과 달리 어마어마하게 힘이 붙었다. 디아트리는 그게 루치드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루치드는 자신의 경험을 모두 털어놓았다. 저 세계로 넘어간 기적 같은 일과 그 곳에서 본 것, 들은 것, 배운 것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특별히 변한 것은 없었다. 세 사람 모두 신기한 현상이라며 놀라워했지만 그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나 과정 등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 곳의 지식만큼은 놀라워했고, 특히 물리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신테와 디아트리 모두 관심을 보였다. 다만 안트는 몇 번 듣더니 지겹다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니가 구현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알겠어.”
신테가 이야기했다.
“왜 그런가요?”
“우선 이 이야기부터 해야겠는데, 이 세상은 이 세상만의 규칙이 있어. 그리고 내가 다른 세상을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너의 이야기를 통해 유추해보자면 그 세상 역시 규칙이 있을 거라는 건 알겠어. 다만 그 세상과 여긴 서로 다른 규칙이 통용되는 거지.”
오랜만에 알아듣지 못할 말을 들었더니 오히려 신선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쉽게 말하면 여기는 마법을 쓸 수 있지만, 그곳은 마법을 쓸 수 없어.”
“예? 전 썼는데요?”
“그래, 근데 그건 너니까 할 수 있었던 거겠지. 넌 두 세계 모두에 발을 걸치고 있으니까. 반면에 그 세계는 마법이라는 규칙이 없는 세계야. 그래서 세상의 진리를 과학으로 규명하는 세계인거지. 추측컨대 그 세계는 진리에 대한 탐구의 방향이 우리와는 다를 거야.”
그런가 싶기도 한데, 아직 그 쪽 세계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방향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던 루치드로서는 대답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넌 그 쪽 세계에서 공부를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이 변화된 거야. 인식이 바뀌면 사상이 바뀌고 행동이 변화돼. 처음 이 곳에서 마법을 배울 때는 많은 변화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마법사의 가르침에 쉽게 순응했고 마법을 배울 수 있었던 거지. 그런데 그 쪽 세계에서 배움이 늘면서 부터는 마법적 인식이 점점 어려워진 거야. 그럼 마법을 배우는 게 불가능하냐고? 아니지. 넌 빛의 마법을 익혔다며? 앞으로도 다른 마법을 익힐 가능성은 충분해. 다만 이곳에서만큼은 아니라는 거지. 그 곳의 배움이 깊어지면 또 다른 변화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마법을 구현하는 게 쉬워지진 않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야.”
이후 루치드는 저녁 시간이면 자신이 배운 것들을 하나씩 공유하면서 거기에 대한 첨언을 들었다.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알려주기만 했지만 이곳과 저곳이 크게 다르지 않은 물리적 법칙이 적용된다는 사실에 기반해서 세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토론을 나눴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에도 루치드는 자신의 인식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했다.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숙제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역시 같은 이유다.”
디아트리가 접시를 식탁 위에 올리며 말을 했다. 인식이 변화되지 않으면 숙제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누가 도와줄 수 없는 문제였다.
안트는 여전히 거실의 고래 가죽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예전에는 접시를 가지러 왔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대신 루치드가 접시를 가져다주었다. 배움에 대한 대가라고 했다.
신테가 나이프로 빵을 썰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내일부터는 내 숙제부터 해결하도록 노력해 봐. 듣는 게 된다면 보는 것도 되니까.”
루치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시키는 대로 해볼 요량이었다. 만약 자신이 이대로 멈춘다면, 몇 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자신은 10살로 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 뒤로 누가 얼음을 떨어뜨린 느낌에 고개를 움츠리는 루치드였다.
다음날부터 루치드는 모든 일에서 제외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로지 자신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단, 그 시간에 루치드가 해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 듣는 일이었다.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우선 듣기 위해 노력했다. 신테가 알려준 방식대로 앉아서 눈을 감고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