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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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외양의 세 남자와 맞닥뜨린 루치드는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보지는 못했지만, 말로만 듣던 흑인이 저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품었지만, 확신은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이 어떤 인종이든 지금 이 곳이 루치드에게 낯선 곳이고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를 곳이란 점에서 그들을 경계해야 할 이유는 많았다.
“너 우리말 알아들어?”
코맹맹이가 다시 물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루치드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별로 좋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말이 통한다면 어쨌든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게 앞으로 루치드의 행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루치드는 방금 이 곳에 도착한 사람이고, 저 사람들은 계속 이 곳에 있었던 사람이었으니, 이 곳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좋은 관계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물론 힘으로 저 세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예.”
“어? 정말이네? 그런데 왜 말은 안 해?”
길쭉이가 코맹맹이의 팔을 툭 쳤다. 눈매가 날카로운게 다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길쭉이였다.
“야, 저 놈도 우리 간보는 거잖아. 저 눈 좀 봐라. 뭔 일 저지르겠네.”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셋은 루치드의 동공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세 사람을 관찰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온 거지?”
왠지 쇠로 된 파이프를 연상시키는 남자였다. 긴 파이프의 한 쪽 끝에서 목소리를 내면 반대쪽에서 저런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산··· 넘어 왔는데요.”
“산?”
“산이라고?”
“······.”
세 사람의 눈이 커졌다. 가장 먼저 침착해진 것은 쇠파이프를 닮은 남자였지만 입을 먼저 연 것은 코맹맹이였다.
“설마, 저 뒤의 저 걸 보고 말하는 건 아니지?”
루치드는 선뜻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돌아보지 않아도 코맹맹이가 내민 손가락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고, 자칫 틈을 보였줬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에 시선을 돌리는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
“맞아요.”
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루치드는 그게 이상한 일인가 싶다가도 아마 저 높은 산을 혼자 넘어왔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그러나 보다, 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10살의 어린애가 기어 올라올 수 있는 높이는 아니지 않았나 싶었다. 곱씹을수록 자신의 무모함과 무지가 부끄러워지는 루치드였다.
“여기는 왜 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쇠파이프 남자가 눈만 하얗게 뜨고 바라보니 어쩐지 섬뜩했다. 아, 이도 하얗구나.
“···가족을 찾으려고 왔어요.”
“너희 가족이 여기 왔어? 여기? 왜?”
코맹맹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가만 보니 코가 유난히 큰 것도 같았다. 코끝이 뭉툭하고 납작한 게, 마치 공기 빠진 축구공을 연상시켰다.
“확실한 건 아니고요···.”
루치드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물론 저 세계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라. 꽤 흥미로운 일인걸? 그치? 아, 오해하지 마. 마을이 통째로 사라지는 일 자체가 흥미롭다는 것이지, 너희 가족이 사라진 게 안타깝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코맹맹이가 유쾌한 음성으로 변명을 덧붙였다. 그러자 여태 무뚝뚝한 얼굴로 루치드를 바라보던 남자가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먹을 거 가진 사람?”
“응? 왜?”
“이 판국에 먹을 게 생각나겠냐? 저 애 때문에 오지랖 떠는 거지.”
코맹맹이의 물음에 길쭉이가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둘 모두 먹을 만한 걸 들고 있지는 않았다.
“가자. 넌 우선 배를 채워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보기만 하고 알 수 있나? 라고 묻고 싶었지만 실제로 배가 고팠고, 이미 몸을 돌리고 앞장서는 남자를 세울 자신도 없어 그냥 뒤를 따라갔다.
세 흑인과 한 아이가 숲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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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밖에서 보는 것처럼 어두웠다. 하지만 앞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어서 불 꺼진 저녁 보육원 복도를 걷는 기분이었다. 다만 보육원 복도보다는 발에 걸리는 게 많았고, 훨씬 복잡한 길을 따라가야 했다.
걸을 때마다 질퍽한 질감의 땅에 들러붙는 느낌과 코를 간지럽히듯 들락날락 거리는 퀴퀴한 냄새가 참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보다 루치드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앞서 걸어가던 세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모습을 감춘 게 아니라 어둠에 묻혀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이지만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대신 길쭉이의 붉은 머리는 선명하게 보였는데, 그러다 보니 붉은 털뭉치가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발 밑 조심해라.”
앞서가던 남자가 말했다. 뿌연 숲안개 탓에 발밑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마침 굵기가 루치드의 팔뚝만한 덩굴이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주의를 듣지 않았다면 걸려 넘어졌을지도 몰랐다.
간간히 주의를 던져주는 남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붉은 털뭉치를 따라가다 보니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치드도 나름 숲에서 오랜 생활을 해본 아이였는데, 이 숲은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저기요.”
루치드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러나 앞에 걸어가던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대신 갈색머리의 코맹맹이가 돌아보며 대답을 했다.
“왜? 힘들어서?”
“아, 아니요. 궁금하게 있어서요.”
“뭔데? 어디 가냐고?”
“아, 그것도 궁금하긴 한데요. 원래 이 숲은 이렇게 조용한가요?”
루치드의 귀에는 숲 위로 부는 바람소리와 그에 잎이 잘게 흔들리며 내는 소리들만 들릴 뿐이었다. 으레 들을법한 여러 가지 숲의 소리들이 전혀 들리지 않아 이상했던 루치드였다.
“혹시 동물이나 곤충 같은 건 여기 살지 않는 건가요?”
“호오, 너 숲을 잘 아는 모양이네? 어떤 소리가 들렸으면 해?”
“네?”
엉뚱한 말로 되묻는 코맹맹이의 질문에 루치드는 바로 답을 주지 못했다.
“동물 비슷한 것 있다. 곤충도 잘 찾아보면 있을 거다.”
제일 앞에 서서 걷던 남자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뒤에서 보니 그냥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나오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잘 찾아보면 있어. 그리고 없으면 우린 뭐 먹고 살게?”
여전히 유쾌한 어투로 대답하는 코맹맹이의 태도가 그렇게 밉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나저나 잘 찾아보면 있다고? 하지만 어두워서 인지 루치드는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모습도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다는 동물이 습격이라도 했을 때 루치드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하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다행인지 세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은 어떤 동물도 발견하지 못했고, 어떤 곤충도 기습적으로 튀어나와 놀래는 일이 없었다.
“다 왔어. 여기야. 우리가 사는 곳.”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공터였다. 온갖 수목들과 이름 모를 식물들이 번잡하리만큼 빽빽이 들어선 정글 같은 숲에 이런 공터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 공터가운데 서 있는 집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집은 집인데, 마치 정글판 이글루 같은 모습이었다. 나무가 자연스럽게 저리 될 리가 있나 싶지만, 대지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곡면의 형태로 이어져 기둥이 되고, 줄곧 보이던 덩굴식물을 비롯한 각종 식물들이 얽히고 설켜 튼튼한 외벽이 되어 있었다. 따로 문 같은 건 없이 출입구 위에 넓은 잎 두 장이 겹쳐져, 마치 커튼처럼 젖히고 내부로 들어갈 수 있게 꾸며져 있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보기가 어려운 게, 기둥역할을 하는 나무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휘어져 있는데다가 여전히 땅에 뿌리를 박고 생장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 사람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루치드가 뒤따라 들어갔다. 내부는 생각보다 넓고 아늑했다. 벽이나 지붕은 나무와 식물들로 빈틈하나 없이 촘촘하게 메워져 있고, 바닥은 널빤지같은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빈촌의 루치드의 집보다 더 넓어 보이기까지 하니, 더욱 이 신비로운 집의 제작 비결이 궁금해졌다.
또 하나 놀라운 모습은 내부가 밝다는 점이었다. 언제 불을 켰는지 모르겠지만, 들어온 문 옆에는 등잔이 있고, 그 위에 양초로 추측이 되지만 외형은 동그란 돌멩이인 촛불이 놓여 있었다. 겉만 보면 돌멩이에 심지를 붙여 놓고 불을 붙여 놓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꽤나 밝아서 문 옆에 걸어놓았음에도 실내가 환하게 밝아져 마치 형광등이라도 켜놓은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주방과 거실이 붙은 실내와 내부에 또 다른 방들―문이 2개였다―이 붙은 형식이었다. 먼저 들어온 남자가 주방으로 가서 음식을 준비하고, 붉은 털뭉치의 길쭉이는 방으로 들어갔다가 이내 나무 막대기를 하나 들고 나왔다. 혹시 하는 마음에 긴장을 하는데, 길쭉이는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주방 반대편의 거실로 갔다. 거실에는 가죽이 깔려 있는데 그 위에 모로 드러누웠다.
“긴장하지 마라.”
길쭉이가 지나가듯 말했다. 침을 꿀꺽 삼킨 루치드가 시선을 피하려다, 궁금한 게 생겨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요, 그 가죽은 뭐예요?”
루치드가 가리킨 가죽은 길쭉이가 깔고 앉은 검은색 가죽이었다. 검은색인지 회색인지 섞였는데, 겉보기에도 매끄럽고 두터워보였다. 루치드는 두려움과 긴장보다 호기심이 앞서 저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
“이거? 고래가죽.”
별 거 아냐, 라는 태도로 말하는 남자와 다르게 루치드는 예상 외의 답변에 어리둥절했다.
“고래요?”
“응?”
뭐 불만이냐? 라는 눈빛인데, 루치드가 듣고 싶은 답은 아니었다. 길쭉이가 말한 고래가 자신이 아는 고래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의 고래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재차 물어보려 하는데,
“니가 아는 고래가 맞다.”
라고 음식을 준비하던 남자가 대답했다. 어떻게 자신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먼저 알고 대답해주는 건지 신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아니, 그것도 그거지만 숲에 고래가죽이 웬 말인가?
“이것부터 먹어라.”
남자가 접시를 식탁 위에 올렸다. 베이컨을 닮았지만 베이컨이 아니라는 사실을 코로 먼저 확인한 루치드는, 그럼에도 음식을 보는 순간 먹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도 교육을 잘 받은 루치드답게 어른들이 식사를 시작하기 전까지 주린 배와 흐르는 침을 참아냈다. 방에 들어갔다 나온 코맹맹이도 어깨에 숄더 담요 같은 천을 걸치고 나왔다. 얼룩덜룩한 게 무늬만 보면 짐승의 가죽 같기도 한데, 색깔이 요상했다. 연녹색과 주황색이 섞인 화려함이라니.
“먼저 먹고 이야기하자. 궁금한 건 그 뒤에 해결해도 된다.”
남자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접시를 나눠준 후 식탁에 자리했다. 길쭉이가 여전히 거실에 모로 누운 채인 것을 보고 물었다.
“난 이게 편해.”
“쟨 저게 편해. 쟤는 늘 누워 있어. 게으름의 표본이지.”
코맹맹이의 부연 설명에 길쭉이가 매운 눈매로 노려봤다. 한쪽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앞에 놓인 접시에서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고는 질겅질겅 씹어댔다. 코맹맹이는 애써 시선을 피하는 눈치였다.
루치드를 비롯해 식사를 마친 이들은 식기를 치운 후 식탁에 둘러앉았다. 길쭉이는 여전히 거실 가죽위에 모로 누워 있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궁금한 게 많은 줄 안다.”
남자가 서두를 뗐다.
“예.”
“우리도 너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코맹맹이가 여지없이 끼어들었다.
“난 별로.”
시큰둥하게 툭 내뱉더니 눈을 감고 돌아 눕는 길쭉이였다.
“우선 우리 소개부터 하도록 하지. 난 디아트리라고 한다.”
“난 신테. 이 집에서 가장 마음이 넓은 남자지. 딱 봐도 알겠지?”
코맹맹이의 소개에 이어 길쭉이가 드러누운 채로 소개를 끝맺었다.
“안트.”
안녕하세요, 라고 해야 하나 속으로 생각하는데 디아트리가 말했다.
“넌 이름이 뭐냐?”
“전, 루치드라고 해요.”
마주보고 있던 두 사람, 디아트리와 신테의 표정이 이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