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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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드가 땅에 도착한 것은 구름을 벗어나고도 한참을 떨어져 내린 후였다. 바닥에 닿기 전 힘겹게 몸을 움직여 발이 먼저 땅에 닿도록 하는데, 그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사용하여 바닥에 내려앉았다.
―우욱
루치드는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메스꺼워 토악질을 해댔다. 두통도 심할 뿐만 아니라 눈앞이 어질어질해서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후원자의 도움으로 놀이공원을 처음 갔을 때, 명수의 손에 이끌려 처음 타 본 롤러코스터도 이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당연히 엉덩이와 등을 붙일 수 있는 의자와 몸을 단단히 동여맬 수 있는 안전벨트의 존재가 없었던 자유낙하는 없던 고소공포증도 만들 뻔 했다.
토악질을 마치고도 몸에 기력이 빠진 탓에 쉽게 일어나지 못한 루치드는 몸을 억지로 굴려 바닥에 드러누웠다. 저 높은 곳에 구름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떨어질 때 숲이 보였었다. 절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작되던 숲은 돌산 위에서 바라보던 구름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멀리서 본 까닭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추측컨대 이 곳, 이 땅은 온통 숲으로 뒤덮여 있는 것 같았다. 채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온통 푸른색으로 뒤덮여 있어 반대편에서 보았던 늦가을의 풍취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돌산을 지나는 동안 거의 보지 못했던 풀과 나무들이 반가울 법도 하건만, 이 정도로 많으면 오히려 질리게 되리라.
루치드는 드러누운 상태에서 고개만 돌려 숲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숲은 벌써부터 시커먼 속내가 보였다. 울창한 잎과 가지로 둘러싸인 채, 단연코 외부자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서린 어둠이 숲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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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군.”
“신기한데?”
“신기한 일인가?”
동시다발적으로 한 방향을 향하던 목소리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몇 년 만이지?”
깊은 땅속에서부터 울려오는 것 같은 굵은 목소리가 물었다.
“모르지. 그걸 어떻게 알아?”
듣기만 해도 귀를 막고 싶을 만큼 거칠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되물었다.
“아마 100년은 더 되지 않았을까?”
비음이 섞여 답답함을 주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우선 가서 살펴보도록 하지.”
옥타비스트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크고 다부진 몸매의 그에게서 옆에 서 있는 까넬라 나무와도 같은 강직함이 엿보였다.
“아, 난 귀찮아. 안 갈래. 오다가다 만날 텐데 뭐 하러 발품 팔아서 만나러 가냐? 마중 나가는 성격도 아니고, 난 안가.”
허스키한 목소리의 남자가 두 팔을 베게삼아 머리 뒤에 걸치고, 나무줄기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팔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비스듬한 자세를 취하고 있음에도 몸이 길어보였다.
“이 넓은 숲에서 어떻게 만난단 말이지? 그리고 혹시 모르잖아? 어떤 위험분자인지는 멀리서라도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비음 섞인 목소리가 답답하다는 듯 허스키 목소리의 남자를 책망했다. 셋 중 가장 키가 작아 보이는 이 남자는 얼굴이 둥글둥글했다. 다만 살이 쪄서라기보다는 얼굴형 자체가 모난 데 없이 둥근 형태였다.
“아 짜증나게.”
허스키는 도리짓을 하며 힘겹게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우리 중에 체력도 제일 좋은 놈이 제일 게으르다는 건 정말 아이러니야.”
콧소리가 하품하며 기지개를 폈다.
“서두르자. 곧 밤이 온다.”
옥타비스트가 두 사람을 흘깃 쳐다보며 재촉했다.
****
그 시간, 루치드는 여전히 풀밭에 누워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두 팔과 다리가 지면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바닥에 내려온 지도 한참이 됐지만, 여전히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온 몸이 후들거리고 얼굴을 비롯해 온 몸에 갖가지 생채기가 나 있었다.
초반에 설정한 저항값이 잘못 되어서인지 생각보다 빠르게 떨어졌다. 그 순간에는 정말 죽음을 떠올릴 정도였다. 게다가 떨어지는 와중에 불균형하게 흐르는 공기의 흐름이 마치 맹수의 발톱처럼 날을 세우고 온 몸을 할퀴며 지나갔다. 또, 팔이나 다리를 움직여 자세를 교정하려 할 때마다 이곳저곳을 망치로 두드리는 충격을 느껴야 했다. 예를 들어, 오른팔을 들었더니 오른쪽 어깨를 타고 올라온 공기가 루치드의 뺨을 퉁 치고 지나간다거나, 왼다리를 곧게 폈더니 오른쪽 옆구리를 꾹 압박하는 공기의 힘에 헉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경우가 계속되었다. 절벽에 부딪히기 직전에는 정말 죽는구나, 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다행히 절벽에 부딪히기 전 각성을 한 루치드가 저항값을 재설정하여 마법을 재시전한 뒤, 눈보다 천천히 바닥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조금 나아졌다. 그럼에도 온 몸을 누르는 압력과 권투선수의 잽을 맞는 느낌은 위력이 약해졌다 뿐이지, 바닥에 닿을 때까지는 계속 온 몸을 괴롭혔다.
따지고 보면 루치드가 무사히 땅에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의 신이 돌봐주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루치드가 지금껏 쌓은 지식이 가볍지는 않으나, 또 깊이가 있던 것은 아니었기에 자유낙하는 그를 거의 반죽음 상태로 내몬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간에 각성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몸의 일부는 부서지거나 혹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루치드가 재차 토악질을 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퉤.”
먹은 게 없다보니, 멀건 신물만 올라와 속이 따가웠다. 물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자유 낙하시의 공기의 예측하지 못했던 흐름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압력. 그리고 옷 때문에 저항력에 문제가 있었어.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변수가 되었던 거야.’
루치드는 그밖에도 자신이 알지 못했던 많은 변수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론은 자신이 무모한 자살행위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저항력이 높다고 해서 몸에 가해지는 중력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었을지도 몰라.’
결국 자신은 여전히 약하고 무지한 존재라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뿐이었다. 다만 각성이라는 형태로 체험한 그 기적은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였다.
‘다시 시도할 수 있을까?’
갑자기, 의도치 않게 발생한 그 현상은 아직 자신의 의지로 재발현되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은 너무 기력이 떨어져서 그런지도 몰랐다. 우선 이런 저런 일들은 몸을 추스르고 난 뒤에나 생각해 볼 문제였다.
호흡도 어느 정도 되돌아오고 팔다리도 잔 떨림이 멈춘 것 같았다. 서서히 힘을 주고 일어서 보니 그제야 땅 위에 설 수 있게 된 루치드였다. 고개를 돌려 자신이 뛰어내렸던 절벽을 바라보았다. 내려오는 동안 방향이 여러 번 바뀌면서 점점 절벽에서 멀어졌었다. 덕분에 바닥에 도착한 지금, 돌아보니 자신이 절벽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올려다 본 절벽은 중간이 구름에 가려져 그 위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보이는 부분의 높이가 반대편에서 올려다 본 돌산의 높이에 맞먹었다. 바꿔 말하면, 지금 루치드가 서 있는 곳은 돌산 반대편보다 낮은 지대라는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반대편에서는 돌산이었지만 여기서 바라보니 저곳은 그냥 거대한 하나의 절벽의 모습일 뿐, 산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구름 위로 솟은 절벽. 아니 성벽이라 불러야 하겠다. 어디 한군데 오를 데 없이, 수직으로만 세워져 동에서 서로 쭉 늘어선 거대한 장벽이었다.
‘만리장성?’
문득 백과사전에서 보았던 만리장성이 떠올랐다. 직접 가보지 않아 그 모습을 사진으로만 봤을 뿐이지만 거대함과 그 끝을 모를 길이는 만리장성도 저러하지 않을까 싶었다. 차이점이라면, 그것과 다르게 눈앞의 절벽은 자연의 힘으로 세워진 장벽이라는 점일 것이다.
‘어떻게 돌아가지?’
이제 진짜 돌아갈 길이 막막해보였다. 저곳만큼은 자신이 어떤 수를 써도 오르기 힘들어보였다. 절로 의지가 꺾일 만큼 웅장하며, 압도적이었다.
고개를 내젓던 루치드는 등을 돌렸다.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우선 이 앞에 펼쳐진 숲을 먼저 고민할 때였다.
우선 옷을 갈아입었다. 입고 있던 옷이 군데군데 찢어져 계속 입고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배낭에서 헌 옷을 하나 꺼내 입었더니 소매가 길어 손을 덮고도 남았다. 소매라도 걷어 입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손을 들었더니, 수전증 걸린 것 마냥 덜덜 떨고 있었다. 그 꼴이 기가 막혀 루치드는 피식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팔 다리에 힘이 좀 붙었지만 여전히 원래 상태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러나 루치드는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이곳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간은 루치드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잡초가 우거진 풀밭을 지나니 몇 걸음 가지 않아 숲의 가장자리에 들어섰다. 곧게 우뚝 선 나무들이 루치드를 맞이했다. 두께만 보면 루치드가 두 팔로 감싸고도 부족하리만큼 두꺼웠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덩굴식물이 그 줄기를 타고 올라가 가지 끝을 향했다.
숲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퀴퀴한 냄새가 주변을 메우고 있었는데, 축축한 대지에서부터 올라온 냄새가 잎과 가지에 틀어 막혀서 어디 가지도 못하고 숲 속에 붙잡혀 있는 것 같았다.
인질은 냄새뿐만 아니었다. 간간히 잎과 가지를 뚫고 들어온 희미한 빛줄기가 해방의 깃대를 땅에 꽂으려하지만, 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온 숲 안개가 이를 막아섰다. 때문에 숲에 갇힌 어둠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숲에 묶인 채, 도사견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오는 이들을 한입에 집어삼킬 기회를.
당연히 루치드는 그 어둠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대신 깃대를 꽂아 주리라.
루치드가 마법을 부리려는 찰나, 숲 속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루치드는 마법을 시전 하려던 것을 멈추고 기척이 느껴졌던 곳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루치드는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킬 여유가 없었다. 지금 자신의 몸 상태로는 어떤 위험이 닥쳤을 때, 순발력 있게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루치드가 만일에 대비하면서 한참을 가만히 숲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 좀 가만 기다리지.”
비음이 섞여 맹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너야말로 좀 더 기다리지 그랬냐. 쟤가 방금 뭐 하려고 했는데.”
쇳가루가 보일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거친 목소리가 따라 나왔다.
“나가자.”
한숨이 섞인 것 같은 굵은 저음의 목소리가 같은 자리에서 나왔다. 루치드가 당황을 감추며 제자리를 지키는데, 숲 속에서 세 사람이 걸어 나왔다.
아니,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한 사람은 온 몸이 새까만 데 오직 눈동자만 하얗다. 딱 벌어진 어깨와 굵은 팔 다리는 ‘전사’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특이점이라면 가죽 반바지를 입고 있는데, 그것만 입었다는 것 정도?
뒤이어 나온 사람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팔을 흐느적거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유난히 팔다리가 길고, 앞선 사람보다 머리하나는 더 커보였다. 전체적으로 마른 느낌의 남자는 붉은 머리와 붉은 눈을 가졌고, 피부는 앞선 사람보다 연하기 하지만 검은 색이었다.
나란히 서서 나오는 또 다른 한 남자는 옆 사람 덕분에 유난히 키가 작아보였다. 그래도 앞 사람보다 약간 작은 정도였지만,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몸도 다른 두 사람에 비해 특별히 근육이 발달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소 느긋해 보이는 팔자걸음이 무척 잘 어울렸다. 이 남자 역시 다른 두 사람과 비슷하게 온 몸이 검은 색이었다. 단 머리카락과 손바닥이 갈색이었다. 그 남자가 루치드에게 질문을 던졌다. 예의 코맹맹이 소리였다.
“야, 너. 방금 뭐 하려고 했어?”
“······.”
루치드는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코맹맹이가 길쭉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쟤, 말 못하는 거 아냐?”
“그런가?”
“할 줄 안다.”
마지막은 가장 앞서 나온 사람이었다.
“어떻게 알아?”
코맹맹이가 물었다.
“눈이 반응을 한다.”
저음의 남자가 단정짓듯 말했다. 세 사람의 시선이 루치드에게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