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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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앞에 선 루치드는 심호흡을 했다. 자신이 아는 지식 내에서 계산은 했지만, 어떤 변수가 있을지 지금 상황에서는 알 수 없었다. 공부를 게을리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높은 수준의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이렇게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점점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고 있었다. 오후 늦게까지 더 기다릴 수도 없었다. 어두울수록 불리할 테니.
루치드는 다른 무엇보다 마법의 힘을 믿고 싶었다. 지금껏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놀라운 기적의 힘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시도해 볼 수는 없으니 우선은 실험이 선행되어야 했다. 주변에 커다란 바위밖에 없어 오히려 적당한 크기의 돌을 찾느라 시간을 보냈다. 우선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돌을 몇 개 주워 다가 옆에 두고 실험을 시작했다.
‘첫 번째 실험.’
돌을 가볍게 집어 절벽 바깥으로 가져갔다. 이른바 자유낙하실험이었다. 절벽 밖으로 내민 손에 힘을 풀자 손아귀에서 떨어져나간 돌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돌은 바람 때문인지 곧바르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낙하를 하던 중에 궤도를 비스듬하게 틀더니 이내 절벽에 부딪혔다가 통, 하고 튀어 올랐다. 그리고 다시 공중을 부유하다 절벽에 부딪히기를 반복하더니 어느새 구름 아래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루치드는 조금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저 돌과 같은 궤도로 낙하한다면, 절벽에 머리를 찧거나 팔 다리가 부러진 채로 떨어지고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멀리 던져야 하나?’
그러나 우선은 같은 조건하에서 실험 진행 과정을 관측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힘을 주고 던지는 것은 뒤로 미뤘다. 두 번째 돌을 같은 방식으로 절벽 바깥에서 떨어뜨려 보았다. 대신 이번에는 돌 전체에 마찰 계수를 높이는 마법을 사용했다. 돌은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자유낙하를 시작하였다. 조금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것 같기도 한데, 잘 알아볼 수는 없었다. 대신 절벽에 부딪히는 횟수가 조금 줄어든 것처럼 보였달까? 그러더니 이내 구름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관측자의 시점이 잘못됐네.’
위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제대로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손을 놓는 순간부터 구름에 사라지기까지의 시간을 속으로나마 세고 있었던 탓에 두 번째 돌이 첫 번째보다 늦게 떨어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만 떨어지는 속도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 원인을 예상 해보자면 돌의 면적이 너무 작아서 마찰계수를 높여도 저항값이 크게 오르지 않아, 돌의 질량을 무시할 만큼의 공기저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세 번째 실험은 루치드의 몸무게만한 돌을 던지는 실험을 해야 했는데, 문제는 그 돌을 드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 던지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루치드의 몸무게가 거의 35㎏에 육박하는데 그 정도라면 쌀 한가마니에 맞먹는다. 루치드는 그냥 돌을 굴려서 떨어뜨리기로 했다.
“으윽!”
힘을 다해 돌을 밀어 떨어뜨렸다. 돌이 세차게 절벽을 들이 받고 튀어 올랐다가 다시 떨어졌다. 그러다가 다시 절벽에 부딪히는데 돌이 깨져서 두 동강이 났다. 두 개가 된 돌덩이들이 구름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루치드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후우.”
절벽에서 물러난 루치드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돌이 절벽에 부딪혀 두 동강이 날 때는 온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이번에는 마찰계수를 높여서 실험을 할 차례였다. 이번의 돌은 약간 넓적한 모양의 돌이었다. 돌을 밀기위해 엉거주춤한 상태로 몸을 숙인 루치드가 힘을 다해 밀었다. 돌이 공중에 뜨는 순간 가장 높은 마찰 계수를 설정했다. 돌이 아래로 떨어졌다. 절벽 가장자리까지 네 발로 다가가 고개를 내밀어 떨어지는 돌을 관찰했다.
그런데 확연히 느리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돌이 떨어지는 속도가 눈에 보였다. 깃털같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밑에서 들어 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느리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이 천천히 회전을 했다. 넓적한 부분이 세로로 서자, 돌은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름 아래로 사라졌다.
‘떨어지는 모양이 중요하구나. 최대한 넓은 쪽에서 공기의 저항을 받아야 돼. 그리고 마찰 계수를 더 높일 필요가 있어.’
이제는 실전을 벌일 차례. 루치드는 절벽 끝에 섰다. 조금 전 돌이 떨어지는 속도만 돼도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손을 높이 치켜 들었다. 두 팔을 감싸는 옷가지가 넓게 펼쳐졌다. 원래는 위에 또 하나의 옷을 입었다가, 떨어질 때는 넓게 퍼지면서 낙하산 같은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는데, 조금 전의 실험결과를 반영하여 그 역할을 바꾸기로 했다. 아예 넓게 펼친 상태에서 공기저항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치 날다람쥐가 익막(翼膜)을 펴듯이 두 팔 사이에 바람막이를 만든 셈이었다.
뛰기 전, 루치드는 잠시 명수를 떠올렸다. 명수가 침대위에서 뛰어내릴 때 이불을 둘러쓰고는
“날아라!”
라고 외치며 뛰어내리다가 무릎을 땅에 찧고 아파하던 모습이 생각나서였다. 명수는 무릎에 멍이 드는 정도였지만, 자신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 이를 것이 분명했다.
“풋.”
나중에 혹시라도 기회가 돼서 명수에게 지금의 이야기를 해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무리 명수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물론 루치드도 명수를 억지로 설득하려 들진 않겠지.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우선은 살고 봐야 할 일이리라.
“가자!”
루치드는 도움닫기를 한 후, 절벽 가장자리의 너럭바위 끝에서 몸을 던졌다. 피가 묻어 있던 바로 그 바위였다.
―후르륵.
루치드는 뛰자마자 마법을 썼다. 몸에 와닿는 공기의 느낌이 순간 달라졌다. 보이지 않는 스펀지 안으로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다. 루치드는 성공의 가능성에 들뜨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가지 고려하지 않은 것은 공중에서 자세를 교정하는 방법이었다. 분명 팔 다리를 활짝 펴고 배를 아래로 한 채로, 물에 붕 뜬 것처럼 가로로 자세를 취하고 뛰어내리려고 했는데, 머리 쪽이 비스듬하게 아래로 향했다. 머리 뒤편에 활짝 펼쳐진 옷가지들이 세차게 떨리는 소리를 냈다.
‘위험하다!’
루치드는 자신이 아래로 떨어지는 속도가 빠르다고 느꼈다. 더 천천히 내려가야 하는데 자세가 통제되지 않아 당황되기 시작했다. 두 팔을 버둥거렸는데, 그럴수록 더 빠르게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귓가로 바람소리와 옷이 펄럭이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눈을 따갑게 찔러대는 통에 눈을 크게 뜰 수도 없었다. 입을 열어도 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목을 따갑게 만드는 것 같아 굳게 다문채로 낙하를 지속했다.
다행히 절벽으로 부딪히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기우뚱하고 기울어지면서 절벽 쪽으로 향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바람이 부는 쪽으로 기울여 몸의 중심을 잡으려고 하지만 허리 아래로는 자기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절벽이 루치드의 왼편으로 다가왔다. 물론 루치드가 바람에 밀려 절벽 쪽으로 향한 것이지만, 루치드에게는 거대한 절벽이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으으윽!”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다리가 아까보단 조금 더 벌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머리가 다리보다 아래쪽이지만, 그래도 다리를 움직였다는 사실에 루치드는 조금 희망을 가졌다. 계획은 다리를 아래로 해서 목을 들어 올리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움직임을 더하는 순간 몸의 중심이 흐트러져서인지 절벽 쪽으로 더욱 빠르게 다가갔다. 팔과 다리를 절벽쪽으로 내밀었다. 곧 충돌 직전이었다.
그 순간, 루치드는 간절히 희망했다.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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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적색의 모난 바위가 이불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다. 가만 보니 그 틈으로 작게 부서진 암석 조각들이 집 나간 어미 기다리는 아기새들처럼 숨어있었다.
절벽 끝에서부터 실금처럼 갈라지던 틈이 아래로 갈수록 벌어지더니 종국에는 또 다른 바위가 사이에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의 공간이 되었다. 그 공간에 바위 대신 바람이 잠시 들렀다가 빠져나갔다. 그러고 보니 그 틈 사이에 용케도 씨를 뿌렸는지 조금만 잡초 한 웅큼이 불쑥 나와 지나가는 바람마다 인사를 꾸벅 하고 있었다.
회갈색의 동돌이 바로 옆에 있는데, 중간에 흉터처럼 검게 물든 자국이 있었다. 위에서부터 떨어져 내린 물이 흐르고 흘러, 꺼칠꺼칠한 면을 깎아내고 깎아내, 맨들맨들하게 변한 형상이었다. 검은 속빛이 부끄러워 그 주변이 더욱 하얗게 보였다.
서쪽에서 부는 바람이 뺨을 쓸고 가듯 절벽을 스치며 온갖 자국들을 다 내고 지나갔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작은 상처들이 세월의 흐름에 점점 벌어지고 벌어져 마침내 이 절벽에 깊은 주름살을 만들어 냈다.
깊은 주름살을 바라보는 루치드의 눈에 묘한 빛이 서렸다. 루치드는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이 현상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 전에, 습지에서 같은 경험을 했었다. 그런데 그 때는 너무나 순간의 일이어서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불과 하루 전에 동굴에서 이 경험을 했었다. 그런데 그 때는 자신이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단지 머리가 아프다는 사실만 인지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 경험을 하는 동안 실제로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루치드는 본능적으로 이 현상을 오래 끌수록 자신에게 돌아오는 부작용이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되도록 빨리 이 현상에서 벗어나야했다.
모든 것이 멈춘 상태였다. 심지어는 자신까지도 멈추었고, 눈동자마저 멈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볼 수도 없었다. 귀에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뭔가 들리는 것도 같은데 알 수 없었다. 지금 가능한 것은 오직 자신의 머릿속, 생각뿐이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이 현상을 벗어나는 것이지만, 그에 앞서 이 순간을 이용해 자신의 위기를 돌파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의 몸을 통제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마찰 계수, 즉 저항의 문제였다. 자신의 몸 전체에 저항을 걸어놓긴 했는데, 자신이 인지할 수 있는 마찰 계수가 생각보다 작았던 것 같았다. 이 보다 더 높은 마찰 계수, 저항 상수가 설정되어야 했다.
다행히 루치드가 이 현상을 자각하면서 동시에 동굴에서의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자신이 인지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 그 한계를 깨뜨려야 했다. 동굴에서와 같은 상황이지만 그 때보다 훨씬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루치드는 수(數)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루치드의 눈에 광채(光彩)가 서렸다. 발을 뻗어 절벽 위로 가져갔다. 발이 바위에 닿기가 무섭게 루치드는 힘을 다해 발을 밀어냈다. 몸이 쭉 밀리며 허공으로 나아갔다. 힘껏 밀어냈건만 몸은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천천히 밀려났다.
그와 동시에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천천히. 떨어지는 동안 얼굴 앞으로 눈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눈은 루치드보다 더 빨리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루치드는 구름과 맞닥뜨렸다. 그리고 서서히 구름 속으로 몸이 잠기기 시작했다. 마치 늪에 빠지는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