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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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먹은 후 두통이 많이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머리가 조금 멍한 듯 한 느낌이 드는 게 아직 후유증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까처럼 머리가 터져 나갈 듯이 아픈 것은 아니었다.
루치드는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던 고통의 원인을 살펴보려 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두통의 원인을 찾기엔 실마리가 부족했다. 자신이 가장 최근에 했던 행동이라곤 벽 앞에 서서 그림을 감상했던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그림에서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싶어 두려움을 무릅쓰고 다시 그림을 감상해보았지만 머리가 아프다거나 혹은 다른 이상이 생기는 일은 없었다.
다시 한 번 그림을 살펴보던 루치드는, 이내 고개를 젓고 벽에서 물러났다. 오랜 시간 산에서 올라오느라 체력이 많이 부족했고, 거기다 쉬지도 않고 동굴 탐사까지 감행했던 탓에 몸에 무리가 간 것이라 단정했다. 그리고 더 이상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그 그림의 존재로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에 집중했다.
“나 말고도 이 산을 올라온 사람이 있었던 거야.”
그것만으로도 루치드는 이 산을 오른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산 너머에 정확한 해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마을사람들이나 가족의 생사까지 알 수 있게 된다면 더 좋겠지만.
우선 동굴을 나왔다. 동굴 입구에서부터 루치드를 마중하듯 어슴푸레한 빛이 쏟아지더니,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하늘 중앙에 태양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만 흐린 구름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어 조만간 비라도 내리려나 하는 추측을 해보게 만들었다.
“하룻밤을 보낸 건가?”
루치드는 잠을 잔건지, 정신을 잃었던 건지는 구분할 수 없었으나 잠이 온다거나 하지는 않으니 이대로 모험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동굴을 지나 산의 반대편으로 가서 내려갈만한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반대편으로 가던 도중 루치드는 산 너머의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다. 지난밤에는 어두워서 관찰이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날도 환해졌으니 제대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루치드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아니 아예 생각도 못했던 장면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온통 구름이었다. 새하얀 구름이 끝을 모르게 퍼져 시선이 닿는 곳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확대 마법을 써서 둘러보아도, 하얀 구름이 쌓여 그 아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올라올 때는 전혀 보지 못했던 구름이 반대편에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당장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아까보다 더욱 흐려진 구름들이 보이고 있는데, 고개를 내리면 또 다른 구름들이 보인다는 게 루치드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재빼기의 가장자리로 다가가니 더 난감한 상황이었다. 산 중턱에서부터 시작된 구름 탓에 산 아래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얼마나 더 아래로 내려가야 지면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게다가.
“이게 뭐야?”
반대편은 그야말로 절벽이었다. 어느 곳 하나 평탄하게 내려갈 만한 길이 보이지 않았다. 깎아 세운 듯 가파른 경사를 보이는 절벽들은 올라온 것처럼 쉽게(?) 내려갈 수 없어보였다. 어디 하나 손 짚을 데가 없고, 아래가 보이지도 않는데다, 거의 수직으로 뻗은 절벽이니 루치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하니 절벽만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을 들여 주변을 조사한 결과, 그냥 내려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결국 절벽을 붙잡고 내려가야 한다는 이야기였는데, 사실 오르는 것과 내려가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2학년 초쯤. 학교 뒤편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모든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공만 차는 것은 아니었고, 게다가 1,2학년 아이들은 고학년 아이들의 위세에 밀려 운동장에 발도 들이밀지 못할 때가 많았다. 개중에 용감하고 씩씩하고 겁 없는 하룻강아지 같은, 예를 들어 명수 같은 아이들이 운동장 구석에서 먼지를 들이키며 공을 찼지만, 또 많은 아이들이 학교 뒤에서 술래잡기나 다방구 같은 놀이를 즐겼다.
하루는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다가 지금은 전학을 가고 없는 지훈이 술래를 피한답시고 한편에 심어진 나무 위를 기어 올라간 적이 있었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다들 신기해했고, 지훈도 꽤 의기양양해 있었다. 다만 문제는 높이가 적잖이 높아, 올라간 지훈이 내려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수업시간이 되도록 내려오지 못해 울고 있는 것을 학교 직원이 발견, 사다리를 동원하여 겨우 구출했던 일이 있었다.
그 일로 지훈은 선생님께 혼나고 다시는 올라가지 않겠노라고 교실 앞에서 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선서를 하기도 했다.
딱 그런 심정이었다. 어떻게든 올라는 왔는데, 올라오고 나니 어느 쪽으로도 쉽게 내려갈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루치드가 올라온 쪽의 산면도 다시 내려가자니 덜컥 겁이 날 정도로 가파르게 보여, 도대체 어떻게 올라올 생각을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루치드는 건너편 산면으로 내려가야 했고, 그 방도를 찾아야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루치드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해가 지기 전까지 주위를 살펴보기로 했다.
“어? 저게 뭐지?”
주위를 살피던 와중에 루치드는 걸음을 멈췄다. 절벽 끝자락에 놓인 너럭바위 위에 희미하지만 수상한 흔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흔적을 살피니 색이 바래져 있었지만 검붉은 색의 액체가 흘러 만들어진 것 같았다. 물감이라 보기에는 주변 상황과 너무나 동떨어진 추측이니 사람이나 동물의 피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혹시나 싶어 주변을 살폈지만, 여전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흔적 외에 다른 것이 있는지도 살폈으나 아쉽게도 찾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루치드는 다시 피가 묻은 바위로 갔다.
오래된 흔적이라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바래진 색과 말라붙은 흔적에서 시간의 흐름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이것이 꼭 사람의 피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이 산을 오르는 동안 동물의 그림자 한 번 볼 수 없었고, 게다가 동굴 안에서 발견한 그림과도 연계해서 보자면 이 피는 사람의 피일 확률이 높았다.
이곳에 정답은 없지만 산 아래에 답이 있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만 재확인할 뿐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울퉁불퉁한 바위틈 사이로 숨었다가 바위 아래로 기어들어가기도 했다. 동굴이 있는 산면의 그림자가 루치드를 집어삼킬 때 쯤, 루치드는 광원을 만들고 동굴 입구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루치드는 자기가 지금껏 배웠던 모든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서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오를 때와 같은 방식인 납작도마뱀 방식이었다. 한 차례 경험도 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마찰력을 최대로 높여 천천히 내려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하나는 올라올 때도 가끔씩 그러했지만, 자칫 산면을 타고 흐르는 바람에 중심을 잃거나, 혹은 잘못된 자세로 무게 중심이 흔들리면 그대로 벽에서 떨어지고 말거라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반대편 산면의 경사가 너무 가파르다는 점이었다. 확신은 못하지만 거의 수직으로 서 있던 것 같은데, 수직에서 마찰계수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오를 때는 비교적 경사가 있는 면만 고르고, 수직으로 세워진 바위벽은 피했었다. 그럼에도 체력이 많이 떨어지다 보니, 재빼기에 오르기 직전쯤에는 위험한 순간을 한 두 번 맞이한 게 아니었다.
이 작전은 지나치게 위험해보였다.
두 번째 방식은 열기구에서 착안했다. 기웅이 빌려준 책에서 보았는데, 뜨거운 공기가 찬 공기보다 가벼워 대기 중에서 상승작용을 한다는 내용을 보았었다. 이 원리를 이용한 열기구처럼 루치드는 자신이 가진 배낭에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방법이 어떨까를 고민했다. 풍선처럼 뜨지는 못해도 천천히 떨어져 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 방식은 당장 머릿속으로만 결과를 도출해내기 어려웠다. 때문에 루치드는 동굴을 빠져나왔다. 적당한 높이에 있는 바위 위로 배낭을 들고 올라간 루치드. 배낭을 머리 위로 들고 그 안에 열을 쏘아 공기가 달궈지게끔 해보았다. 적당한 시간을 보냈지만 배낭은 풍선처럼 부풀지도 않았고 여전히 비 맞은 빨래마냥 축 처진 채였다. 아무리 배낭 안을 데운다 해도, 배낭의 재질 자체가 공기를 담고 있기에 무리가 있었다. 데운 공기는 즉시 천을 통과하여 배낭 밖으로 배출되었다. 배낭안의 부피만으로는 배낭을 띄우기 힘들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세 번째 방식은 행글라이더였다. 남은 헌옷가지들을 모두 엮어낸 후 들고 뛰어내리는 방식을 구상했는데, 이것은 그냥 자살하는 모양새였다. 배낭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날개의 모양을 만들기도 힘들 뿐더러, 자칫 뛰어내리는 와중에 옷들이 서로 꼬이거나 뒤집혀버리면 바람의 저항이고 뭐고 간에 그냥 추락하는 것이었다.
“이 곳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내려갔을까?”
실험과 고민을 반복하는 사이,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머리 위에 LED조명 부럽지 않은 광원 덕택에 어둠을 꺼려할 필요는 없었지만, 당장 루치드가 처한 상황을 낫게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루치드는 지금 배가 고팠다. 이미 배낭 속에 먹을 것이라곤 마른 풀잎 한 장 정도였다. 오전에 미친 듯이 뱃속에 집어넣을 때는 차후를 생각할 겨를이 없어 그랬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후회막급인 상황이었다.
굶주림을 버틸 수는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오래 굶주리게 되면 체력도 떨어질 테고 그러면 오히려 더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별 수 없이 루치드는 어떤 방법이든 신속하게 이행해야 했다. 여전히 시간은 루치드의 편이 아니었다.
내일은 무조건 이 자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내일 오전까지 방법을 떠올리던지, 아니면 아래로 내려갈 길을 찾던지 해야 할 것 같았다. 루치드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배는 고팠지만 피로가 심했었는지 이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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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추위를 느낄 때마다 마법을 써서 추위를 막았다. 그러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루치드는 바깥이 하얗게 빛난다고 생각했다. 햇빛이 밝아서 그런가 생각했다가 이내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산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제까지도 하늘이 흐려지는 것 같아,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비가 아니라 눈이었다.
자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걸어간 루치드는 절벽 끝에서 참담한 심정이 들었다. 간 밤에 내린 눈이 어지간히 많았는지 바닥이 많이 미끄러웠다.
‘절벽은 더 심하겠지.’
물론 열을 내서 눈을 녹이며 내려갈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어제보다 더 위험해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눈 때문에 시야가 많이 좁아진 상태였다.
눈송이 하나가 나풀거리며 눈앞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문든 공식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무거운 물체보다 가벼운 물체가 더 늦게 떨어지는 원리에 대해 과학책 한 귀퉁이에 ‘참고하세요’라는 글귀 아래 써져 있던 공식이 눈꽃송이를 보고 떠올랐다.
“F=ma라고 했던가?”
질량 곱하기 중력가속도가 중력에 의해 떨어져 내리는 힘이었다. 그리고 ma=mg-kv, 즉 중력(mg)에서 저항력(kv)을 뺀 것이 바로 물체에 작용하는 힘이었다. 여기서 저항력은 저항상수 곱하기 속력이다.
루치드는 머릿속으로 이 공식에 맞춰 분석을 시작했다.
‘F=ma, 즉 중력이 끌어당기는 힘은 질량에 비례한다는 의미랬어. 그런데 이 힘은 저항력의 영향을 받지. ma=mg-kv. 이 공식에서 ma를 작게 만들려면 반대항의 값이 작아져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질량은 바꿀 수 없으니 저항력을 높이면 ma값을 낮출 수 있어. 이 공식에서 내가 임의로 조작이 가능한 것은 k, 즉 저항상수. 저항상수를 높여도 ma값을 낮출 수 있다.’
생각대로라면 저항상수를 무한대로 올려 힘을 무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제는 루치드가 무한대의 수를 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한대란 인간의 인지를 넘어선 수이기 때문에 마법이 불가능했다. 마법은 루치드가 인지해낼 수 있는 범위에서만 적용 가능했다.
따라서 루치드는 저항값을 최대한 올릴 수 있는 숫자를 만들어내야 했다. 자신이 인지 가능한 최대의 수로. 문제는 그 값이 mg의 값보다 모자란 수라면 의미가 없다.
‘35㎏ × 9.8㎧ = 343㎏㎧······.’
루치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바닥에 수식을 써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