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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71화 (71/956)

모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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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굴의 제일 깊은 곳, 빛도 스며들지 않는 이 공간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림은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재빼기에서 서쪽을 바라봤을 때 보이는 산, 즉 ‘대산맥’의 가장 높은 산을 묘사하는 그림이었다. 신기한 것은 대산맥에 대한 묘사가 아이들 낙서 수준이 아니라 그림을 제법 배운 사람이 새겨 넣은 판화 같은 느낌이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단순히 외형선을 새겨 넣은 것에 그치지 않고 색까지 입혀 놓았다!

푸른색이 칠해진 부분은 상록수들을 묘사하고 있었다. 색이 입혀지지 않은 부분은 울긋불긋한 동굴 본래의 색인 화다색(樺茶色)이 그대로 노출되어 낙엽이 진 나무들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산의 중턱에 걸린 허리안개는 바위를 갈아 나온 가루를 이용했는지 굵은 알갱이가 토돌토돌하게 솟아나 있는데 그 색이 흰색이라 마치 진짜 안개라도 낀 것 같은 절묘한 표현법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제일 신기한 것은 산 위의 하늘이었다. 그것은 분명 하늘빛이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푸르고 붉은 저녁 하늘을 사실감 있게, 생동감 넘치도록 표현하고 있었다.

전체 그림은 루치드가 양 손을 벌렸을 때의 크기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도의 그림에서 장대한 역사(役事)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니 절로 공손해지는 마음이었다. 광대한 자연을 한 폭의 그림으로 묘사해낸 솜씨가 예사롭지 않을뿐더러 동굴벽에 그린 기술도 놀랍기 그지없었다.

“누가 이런 일을 했을까?”

그리고

“왜 이런 일을 했을까?”

분명 사람의 손길이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이 험한 돌산을 올라, 이 깊은 동굴을 찾아 들어와서 그림을 남겼을까? 그리고 이 그림은 왜 그려졌을까? 왜 남겼을까?

보다 보니 이 그림에서 보이는 산이 대충 언제쯤의 산인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군데군데 멍든 것 마냥 푸른 숲이 보이지만 대부분은 낙엽의 색이 산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늘은 마냥 푸르지도 않고 산마루 위로 붉은 놀이 조금씩 새어나오는 그림이었다.

‘가을 저녁의 대산맥’

정도의 제목이라면 어울리겠다.

루치드는 찡하는 기분을 느꼈다. 뭔가 전기 한 줄기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관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고대의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다양했을 것이다. 그 중에도 초상화나 풍경화를 그리는 사람들의 가슴에는 아마도 그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간직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도 바로 저 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 마치 저 순간을 박제하듯 벽에 박아 넣고 그 시간을 멈추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루치드는 지난 습지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상하게 생긴 거인 새와의 만남. 그 새와 눈을 마주치고 대치를 벌이고 있을 때 한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느낌이 들었었다. 그 순간에는 습지에서 올라오는 냄새마저 멈췄는지 역한 기분도 느끼지 못했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멈춰, 마치 사진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생동감 넘치는 색깔과 사실적인 사물,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한 장의 사진 속에 담긴 풍경과도 같았다.

또 다른 기억이 지나갔다. 처음 돌산에 올라 대산맥을 바라보았을 때, 산머리 위로 보랏빛 노을이 일렁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오묘한 빛깔의 향연에 루치드는 그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했다. 해는 완전히 서산 너머로 사라지고 그 잔향이 남아 하늘을 물들이고 있던 그 시간. 반대편으로부터 몰려들어오는 어둠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듯 출렁거리듯 흐느적대던 태양의 자취.

지금 보고 있는 이 그림.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가을 저녁의 산을 흐르는 시간 속에서 도려내 이곳에 박제시켰다. 그 사람의 의도, 갈망, 꿈이 모두 느껴졌다.

그 사람은 저 순간을 갖고 싶어했다. 저 순간, 저 시간을 영원히 지속하고 싶어했다. 즉.

‘시간을 멈추게 하고 싶다.’

루치드는 눈을 감았다.

어느새 밤이 되고 낮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밤이 왔다.

루치드는 아직 눈을 뜨지 않았다.

****

루치드는 어느 순간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 서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니 서 있다는 사실도 확신할 수 없는 곳에 서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지, 바닥에 발을 붙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위, 아래, 오른쪽, 왼쪽, 앞, 뒤 모두 암흑인 공간이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을 뜨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오감이 모두 마비된 것 같았다.

지금까지 동굴을 탐험하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곳으로 오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저기요?”

루치드는 입을 열고 말을 했다. 이 사실을 통해 말을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다 대니, 팔이 제대로 보였다. 볼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번엔 앞으로 걸어봤다. 걷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제자리걸음인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도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우선 앞으로 계속 걸었다.

루치드는 그만 걸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도 없을 만큼 걸었지만 똑같은 암흑의 공간뿐이었다. 암흑인데도 자신의 팔이 보인다는 사실은 또 이상했다. 이상한 게 한두 가지겠느냐, 만은 아무튼 그랬다.

‘아!’

루치드는 빛을 구현하는 마법을 써보았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불도, 마찰도 그 어떤 마법도 구현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루치드는 계속 걸었다가, 한참을 주저앉았다가, 또 다시 걸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었다. 마법도 안 되고, 이동도 되지 않는 공간에 루치드는 혼자였다.

루치드는 달렸다. 숨이 찰 때까지 달려보았다. 하지만 루치드는 끝도 없이 달렸다. 달리는 게 지겨워 멈출 때까지 달릴 수 있었다. 숨이 차지도 않았고, 다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배도 고프지 않았다. 모든 게 비정상인 공간이었다.

또 많은 시간이 흘렀다. 루치드는 여전히 혼자였고, 그래서 외로워졌다. 돌이켜보니 빈촌에서 마을 사람들이 사라진 이후, 늘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근원이 사라진 마당에 그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던 소년이 의지할 사람이 없어 결국 책에 의지했었다.

새로운 지식과 맞닥뜨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외로움이나 공포, 절망의 감정들을 모두 잊을 수 있을 만큼 놀랍고 신비롭고 재미있었던 순간이었다. 소년이 배우고 익힌 지식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수학이었다.

논리적인 연산과 정확한 계산식이면 딱 떨어지는 정답이 나왔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모든 것이 불확실하던 순간에 오직 수학만이 루치드의 뜻대로, 루치드의 통제 범위 안에서 답을 주었다. 수학은 루치드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분야였다.

‘1 더하기 1은 2. 2 더하기 2는 4. 4 더하기 4는 8 ··· 16384 더하기 16384는 32768 ···.’

루치드는 문득 떠오른 숫자를 계속 더했다. 그러다 암산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디 적을 만한 것이 없나 둘러봤지만 역시나 이곳에서 적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고집이 생긴 루치드는 암산만으로 어디까지 수를 더할 수 있을지 시도해보았다.

이것은 게임이었다. 숫자를 입으로 부르며 암산을 계속해나가는 게임. 숫자를 제대로 말하지 못해 머뭇거리거나 암산이 되지 않는 수가 나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룰이었다.

처음에는 5자리나 6자리 숫자에서 헤맸다. 하지만 점점 반복하다보니 숫자가 외워지기도 하고, 암산에 요령이 생기기도 했다.

‘1,073,741,824 더하기 1,073, 741,824는 ···2,147,483,648.’

10억 단위가 넘어가는 숫자까지도 줄줄이 외워지고 있었지만 루치드는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배도 고프지 않고 잠도 오지 않았다. 이 공간을 탈출할 방법도 없었고, 이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오로지 머리로 생각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직 숫자를 되뇌는 것만이 허락된 것처럼 루치드는 연산에 몰입했다.

숫자가 20자리를 넘어설 때까지 더하기가 가능해졌다. 그러다보니 지겨워졌다. 어차피 더하기에 불과한 암산인데다,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비틀어보기로 했다.

‘1 곱하기 1은 2. 2곱하기 2는 4. 4곱하기 4는 16 ··· 65,536곱하기 65,536은 ···.’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직 루치드의 암산 실력이 모자라다는 증거였다. 루치드는 기뻤다. 적어도 자신이 약한 부분을 알았고, 채울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무엇보다 할 일이 생겼다. 지금까지는 그냥 시간 때우기 식으로 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할 일이 생겼다.

루치드는 조금 신이 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렀지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루치드가,

‘18446744073709551616 곱하기 18446744073709551616 은 ··· 340282366920938463463374607431768211456.’

2를 128번 제곱한 수까지 암산이 가능해질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수백, 수천, 아니 그 제곱의 수만큼 암송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저만큼의 숫자가 한 번에 입에서 튀어나올 만큼 오래 게임을 지속했다.

이쯤 되니 다른 것에도 관심이 갔다. 과연 자신이 얼마만큼 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루치드가 숫자를 가지고 놀기 시작한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사칙연산에 있어서는 어지간한 계산기보다 빠르게 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사실은 자신이 계산을 하는 건지, 그 숫자를 구구단마냥 외워버린 것인지도 분간을 못하게 될 정도로 시간이 지났고 게임을 즐겼다. 곱할 수 있는 숫자는 모두 곱해보고, 나눌 수 있는 숫자는 모두 나눠봤다. 소수점 아래로 30자리까지 가는 수도 있었고, 100자리 이하까지 가도 딱 떨어지지 않는 수도 있었다.

‘사칙연산 말고 다른 건 없나?’

수열이란 걸 떠올렸다. 규칙성을 지닌 수의 집합체를 만들어 보았다. 무한히 커지는 수열도 있었고, 한없이 작아지는 수열도 만들어졌다.

급수를 떠올렸다. 딱 떨어지는 수도 있고 무한히 더해지는 수도 있었다. 물론 루치드가 수열과 급수를 배운 적은 없었다. 다만 숫자를 가지고 놀다보니 우연히 '나타난' 개념이었다. 당연히 용어도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몰라도 숫자는 계속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고 루치드는 그걸 즐길 뿐이었다.

루치드는 숫자로 연상 가능한, 계산 가능한 모든 수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으윽!”

루치드는 신음을 뱉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절로 나왔다.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느껴야만 하는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참을 수 없었다. 머리를 움켜쥐고 굴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고통은 자신이 보내온 시간만큼, 아니 그 이상,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무서웠다.

그러던 루치드가 정신을 차렸다.

****

눈을 뜬 루치드가 처음 본 것은 역시나 어두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다른 점은 자신이 누워있다는 것이고,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땅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눈을 깜빡이다보니 정신도 말짱해져 조금 전까지 머리가 터질 것처럼 괴롭히던 고통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몸을 일으켜보았다. 어쩐지 익숙한 공간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법을 써 보았다. 머리 위로 광원이 생기며 주위를 밝혔다.

역시나, 이곳은 동굴, 그 제일 안쪽에 자리 잡은 그림 앞이었다. 루치드는 몸을 일으키려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그제야 엄청난 허기가 느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너무 배가 고파서 미칠 정도였다.

루치드는 배낭을 열어 가지고 있는 모든 음식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아끼고 자시고 할 판도 아니었다. 남은 물도 모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뭐라도 들어가니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잠시 자리에 누운 루치드는 가만히 생각했다.

‘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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