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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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드는 있는 힘껏 장막을 걷어냈다. 벗겨지기를 거부하는 장막을 걷어내기 위해 전력을 다한 루치드. 저항하던 장막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루치드의 의지에 의해 연기처럼 흩어지듯 사라졌다.
루치드는 장막이 사라지고 드러난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지는 않았다. 다만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아니었다. 무엇인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루치드는 인지했지만,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물처럼 투명하지만, 공기처럼 존재감을 느끼기 힘든, 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그 자리에 있었다. 계속 궁리하면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루치드는 뚫어져라 그 공간을 바라보았다.
―꼬르륵
정신이 번쩍 든 루치드가 현실로 돌아왔다. 하늘에는 하얀 조각 달이 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깊은 시간을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었다. 굶주림을 참기에 루치드의 신체는 아직 여물지 못했고, 게다가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제 때 끼니를 챙기지 못했던 잘못이 있었다.
루치드는 미련과 아쉬움이 남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우선은 배부터 채우고 다시 생각을 하든 뭘 하든 해야 할 것 같았다.
배낭을 뒤적거려 말린 고기를 꺼냈다. 이른 아침, 배낭을 꾸릴 때 준비해 놨던 고기였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얻으려했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식량이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돌산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마당에 아무런 준비 없이 산을 오른다는 것은 이미 지난번에 겪어 본 실수였다. 그리고 두 번의 실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조리법을 아는 것도 아닌 루치드였지만, 대충 옆에서 보고 배운 게 있었다. 우선 수거한 고기들을 그대로 들고 가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물로 대충 씻어낸 후 불에 익혔다. 그리고 강한 열을 쏘아내 바짝 말리니, 즉석 육포 못지않은 음식이 탄생했다. 만약 조미(助味)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면, 더 맛있는 육포를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루치드였다.
고기 외에도 배낭에는 말린 무라던가 말린 배추 따위를 넣어두어 만일에 대비했다. 마법이 여러모로 유용했음을 다시 한 번 느꼈던 루치드였다.
배를 채우며 루치드는 다시 아까의 ‘실체’를 고민했다. 과연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그 ‘실체’는 무엇일까에 대해. 하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였는지, 그 느낌과 실체는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새 달이 높이 떠올라 하늘 가운데 자리 잡았다. 그 때까지도 머릿속을 간질거리게 만들었던 것의 정체에 대해 궁리해보았지만 역시 오리무중이었다. 이제는 포기해야 할 때였다. 시간을 지체하다간 내일의 산행에 어려움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체를 파악하는 일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후회할 수도 있지만, 시간은 여전히 루치드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다음 날부터 루치드는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나마 순탄했다. 자갈이나 작은 바위가 잔뜩 놓인 길이었지만 오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오가 지날 무렵, 깎아지른 절벽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옆으로 돌아갈 만한 길도 보이지 않아 천상 이 절벽을 타고 올라가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루치드는 이런 상황을 이미 산 아래에서부터 예상을 했었다. 그냥 보기에도 절벽위에 절벽이 놓인 산이었는데 이런 지형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저 세계에서 최초의 과학 실험을 했던 기억이 났다. 책을 비스듬히 세워 경사면을 만들고, 그 위에 연필을 굴리는 실험이었다. 빗변에 강한 마찰력을 주었을 대 연필이 어느 정도의 마찰력에 반응하는지, 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실험이었다.
이 앞에 놓인 절벽은 그 실험의 연장선이었다. 그리고 연필 대신 루치드가 직접 실험체가 될 뿐이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손을 들어올렸다. 수직절벽이었으면 조금 더 망설였을지도 모르지만, 다행인지 약간은 경사가 있는 절벽이었다. 손을 뻗어 적당히 잡을 만한 자리가 있는 지 더듬었다. 뒤이어 오른발로 절벽을 디뎠다.
루치드는 온 몸을 절벽에 붙인 채 손과 발을 번갈아 움직이며 절벽을 기어올랐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본다면 납작도마뱀을 연상했을 움직임이었다.
만약 루치드의 몸무게가 지금보다 더 나갔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몸무게와 경사면이라는 조건에서 루치드가 구현 가능한 마찰 계수―저항은 다행히도 이 정도 경사의 절벽을 오르는데 무리가 없었다. 물론 끈끈이처럼 접착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한 걸음이 조심스러웠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이제는 추위나 더위에 강해진 루치드였지만, 절벽을 오르기 위해 쓰는 힘 때문에 몸에 절로 땀이 났다. 바람은 두 손을 대신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루치드는 바람이 불 때면 절벽에 찰싹 붙어 움직임을 멈췄다.
호흡이 거칠었지만 별 수 없었다.
절벽을 다 올랐을 무렵, 두 손과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꽤 높은 절벽을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올랐더니 마지막에는 힘이 부쳤다. 마찰은 미끄러지지 않게 해준다 뿐이었지 결국 팔 힘과 다리 힘으로 밀고 올라온 셈이었다.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지 않았던 루치드는 체력이나 근력이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운동을 한다고 갑작스런 체력 상승이 될 리는 만무했다. 그나마 지금보다 어릴 때 쌓아두었던 체력과 운동신경이 보험이 되어 이 정도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루치드는 감사해야 했다.
간신히 절벽을 올라온 루치드는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가쁜 숨을 고르는데도 한참이 걸릴 정도였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르고 난 뒤, 배낭에서 말린 고기를 꺼내 질겅질겅 씹어댔다. 조미가 안 된 고기다보니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것이,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한 용도로서 억지로 씹어댈 뿐이었다.
문득 윤정이 생각났다. 작년에 윤정은 보육원을 졸업했다. 졸업하기 전까지 윤정은 다정한 누나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가끔 주말에 시립도서관을 함께 간다거나, 맛있는 음식들을 사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루치드를 돌봐주었다. 고3인데도 딱히 대학 생각이 없다던 윤정은, 틈만 나면 식당으로 루치드를 데리고 가, 음식을 직접 만들어 주었다.
“맛있니?”
윤정은 자신이 만든 음식을 평가받고 싶어 했고, 특히 루치드가 해주는 평가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봐야 루치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곤,
“맛있어요.”
가 다였지만, 그래도 늘 그 말을 듣고 싶어 했었다. 보육원을 졸업하는 날, 루치드의 어깨를 잡고 눈높이를 맞춘 윤정이 말했다.
“다음에 누나가 레스토랑을 차리면 그 때 와서 꼭 맛을 봐주고 평가해줘. 기다릴게.”
작고 귀여운 얼굴의 윤정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루치드에게 덧붙였다.
“그 때도 꼭 맛있다고 해줘야 돼. 알았지?”
어느새 씹고 있던 육포가 사라졌다. 배는 채워지지 않았지만 이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생각보다 산을 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음식이나 물도 아껴야만 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 산에서 다른 구호책을 발견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먹거리만 문제가 아니었다. 매일 밤이 되기 전에 새로운 돌짬이나, 혹은 하다못해 바위그늘이라도 찾아야 했다. 아무리 풍찬노숙이라도 지붕은 있어야 밤중에 갑자기 비라도 내릴 때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바위가 많다더라도 적당한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터무니없이 작은 바위틈으로 비집고 들어가기도 힘들었고, 적당한 바위그늘을 찾더라도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덩이가 아래 깔려있으면 잠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잠자리를 찾고 음식을 아껴가며 먹기를 반복하다보니 며칠의 시간이 지났다.
마침내 루치드는 산의 재빼기에 올랐다. 산을 넘기 위해 마루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적당한 고개를 찾아 넘으니 마침내 산 너머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재빼기에 오를 즈음 이미 주위가 어둑해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에 광원을 만든다 쳐도 산 아래를 환히 밝힐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내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대신 잠잘 곳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돌산의 장점이라면 야생동물이 없다는 점이었다. 예전처럼 산늑대의 습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반대로 단점이라면 산짐승이 없다는 점이었다. 산짐승이 없다보니 불로 구워 먹을 식량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차라리 이럴 때는 늑대라도 달려와 주었으면 했다. 너무 많으면 또 그것대로 곤란했겠지만.
“모조리 불로 구워 다가 구이 해먹으면 좋을 텐데.”
지난 번 늑대에게 당했던 게 어지간해서는 잊기 힘들었다. 복수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지금의 루치드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다만 지금은 아니었다.
배낭 속에는 식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말린 고기도 아끼고 아껴서 먹었지만, 체력 소비가 많은 지난 등산 과정에서 거의 대부분을 소비했다. 고기를 아끼느라 채소를 많이 먹었더니 전체적으로 식량이 많이 남지 않았다.
루치드는 밤을 지새울 만한 돌짬이나 바위그늘이라도 찾아볼 요량으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기이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
멀지 않은 곳에 동굴이 있었다. 높이가 2미터는 넘을 것 같은, 그리 크지만은 않은 입구였지만 그래도 동굴임은 분명해 보였다. 루치드는 이런 곳에서 동굴을 발견할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던 탓에 얼떨떨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우선은 바람이나 늦가을의 이슬 정도는 피할 수 있을 곳을 찾았다는 생각에 동굴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루치드는 우선 동굴 내부를 둘러보기로 했다.
어두운 동굴 내부가 스위치라도 켠 듯 밝아졌다. 머리 위에 광원을 만들어 둔 루치드는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기온의 차이 때문인지 내부의 벽은 다소 촉촉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흙보다 돌과 바위가 대부분이었다. 바위에 구멍이 난건지, 구멍이 난 동굴에 바위가 박혀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갑자기 무너지지는 않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서 맞물린 바위들이었다.
한참을 걸어도 동굴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루치드는 계속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야 하는지 고민했다. 마음 한 편으로는 내일의 산행을 위해서라도 그만 탐사하자고 경고를 했지만, 호기심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정도까지 들어오고 나니 계속 들어가 보아야 하지 않는가, 라는 고집이 생겼다.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임은 맞는데, 그래도 일정한 크기를 유지하면서 안으로 이어지는 동굴의 모양새가 신비로웠다. 동굴 내부, 습한 기운 가득한 어두운 공간에 으레 있을법한 곤충이나 벌레도 하나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신비로웠다.
루치드를 배려하기 위함은 아니겠지만 걷는 것도 지쳐 이제 그만 할까, 라는 생각이 머리에 들 때쯤 동굴은 끝이 보였다. 입구에서부터 대략 30분은 넘게 걸어온 셈이었다. 이 정도면 길다고 해야 할지 짧다고 해야 할지 루치드는 가늠하기 힘들었다.
끝까지 다다른 동굴에서 루치드는 어떤 위험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막힌 돌벽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찰나에 언뜻 무언가를 보았다.
고개를 돌려 지나치듯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했다. 동굴의 오른편 벽에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벽에 다가가니 광원으로부터 쏟아져 내린 빛이 벽을 밝히며 그 정체를 환하게 드러냈다.
그것은 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