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3)
-------------- 69/952 --------------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이 순간 루치드는 그렇게 바랐다. 하지만 마음을 읽지 못하는 루치드는 대신 진흙탕에 처박혀 날개를 퍼덕이는, 꼴사나운 모양의 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루치드는 넘어진 와중에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로부터 형언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진흙탕 위에서 버둥대면서도 자신을 향한 시선만큼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 눈이 어쩐지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안타까워보였다.
루치드는 달리던 동작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진흙 속에 박힌 무거운 머리와 부리는 아무런 힘도 받지 못하는지 꿈틀거릴 뿐이고, 다리로는 세차게 바닥을 긁어내는 것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거대한 날개는 연신 진흙탕 위를 퍼덕이며 바닥을 세차게 내리치고는 있었지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도와달라는 걸까?’
물론 아직도 조심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무거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비틀대면서도 일어나기 위해 열심히 몸부림치는 모습이 안타깝고, 자신만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서 엿본 묘한 감정도 무시하기 힘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새의 발 앞에 놓인 땅에 마찰계수를 0으로 만드는 마법을 걸어놓았던 상태였다. 혹시 그것 때문인가 싶어 마법을 취소했다. 그랬더니 두꺼운 날개를 팔처럼 사용하여 땅을 짚고, 다리를 땅에 박고 안간힘을 써서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차례 버둥대더니만 끝끝내 몸을 일으켰다. 새는 고개를 한차례 털어낸 뒤, 나름 처음의 고고함을 유지하려고 그러는지―물론 그럴 의도가 있을 리 없지만은―몸을 꼿꼿이 세우지만, 이미 새는 역한 진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진흙 위를 한참 구른 탓에 가지런했던 깃털도 듬성듬성 서 있었고, 갈회색 빛 진흙은 본래의 푸른 빛 감돌던 몸뚱이를 지저분하게 뒤덮고 있었다.
오로지 새의 눈동자만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모습으로 루치드를 직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안.”
어쩐지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차피 거리도 많이 떨어져 있고, 위협도 덜 될 것 같아 거뜬히 사과할 수 있었다.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 루치드를 바라보던 새가 날개를 한 차례 퍼덕였다. 아마도 날개와 몸에 붙은 진흙을 털어내기 위한 몸부림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리 쉬이 떨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주변에 흐르는 물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정말 미안해. 내가 바빠서 그래. 이해해줘.”
물론 알아들을 가능성은 없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자신이 새에게 저지른(?) 만행에 사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래야만 자신의 마음도 홀가분해질 것 같았다.
새를 바라보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천천히 뒷걸음질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 새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저 아까처럼 루치드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뒷걸음질로만 움직여 습지를 완전히 건너게 되었다. 습지 가운데서 루치드를 바라보던 새는 그제야 천천히 몸을 돌려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돌아서는 새의 눈에서 여전히 묘한 감정이 느껴져, 루치드는 마치 새가 그러했듯이 자신도 새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봐 주었다.
“심심했던 걸까?”
이 넓은 습지에 왜 저 새 한 마리만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혼자였다면 심심해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종이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루치드가 같이 어울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그렇지만 여기서 시간을 허비해서는 될 일도 안 될 것이다. 루치드는 이내 몸을 돌려 돌산으로 향했다. 미련이든 뭐든, 찝찝한 감정은 발밑에 말라붙은 진흙과 함께 버무려 이곳에 버려두고, 루치드는 습지를 떠났다.
****
돌산을 올라가는 길은 바로 지척에 있었다. 다만 그 길을 길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산기슭부터 커다란 바위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딱 한 곳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틈이 보였다. 빈촌 실골목도 이 길보다는 넓을 정도였다. 그 외는 루치드가 팔을 뻗어도 잡을 구석하나 없을 만큼 날카롭거나 혹은 높이 솟은 바위덩어리여서 루치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신발에 붙은 진흙들을 마법으로 바싹 마르게 한 뒤, 바닥에 박힌 돌 위에 문질러 떼어냈다. 발이 가벼워진 뒤에야 주변을 살피며 혹시 모른 흔적들을 살폈다.
기이하게도 이곳은―산기슭과 바위틈으로 조그만 잔풀이 없지는 않았지만―작은 나무 하나 자라지 않는 순수한 돌산이었다. 어떻게 이런 지형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식물, 특히 꽃이라도 한 두 송이 피어있을 법한테 그 흔한 야생화도 보이지 않았다. 차후에 선생님께 질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첫 번째로 물어봐야겠다고 속다짐하는 루치드였다.
주변에는 특이하리만큼 특징적인 흔적들이 없었다. 사람들의 흔적은 물론, 짐승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새 발자국이라도 있을까 싶었지만 발견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검불하나 없는 산기슭은 처음이라 할 정도였다.
곳곳에 조막만한 돌의 파편들이 널려 있고, 두드러기 나듯이 수많은 바위들이 대지위로 솟아나 있어, 어느 곳도 편안하게 앉을만한 자리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고갤 들어 위를 바라보니 새삼 이 돌산의 위력이 느껴졌다. 그냥 절벽과 절벽이 겹겹이 쌓인 형태인데다 과연 길이라는 게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의 산이라 보는 게 옳겠다. 당장 보이는 자드락길을 따라 올라가더라도 중간에 어떤 곤란한 일이 생길지 예상할 수 없었다.
멀리서 보던 것과 다르게, 가까이서 보니 과연 이 산을 넘는다는 게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하게 거대한 석벽이고 무식하리만치 튼튼한 성문이었다.
“과연 사람들이 이곳으로 왔을까?”
절로 한숨이 나왔다. 굳은 의지를 다진 게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서 습지 앞에서, 그리고 돌산 앞에서 그 의지가 무너지려는 기색을 보였다. 자신의 각오라는 게 이렇게 나약하고 꺾이기 쉬운 것이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내가 이러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닌데.”
하지만 자책한다고 해서 방법이 나올 것도 아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미 정오도 지나, 대산맥을 향해 달려가는 태양이 보였다. 역시 가을이라 낮이 짧았다. 이미 습지를 건너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 터라, 섣불리 산을 올랐다가는 도리어 구조를 요청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몰랐다.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루치드가 배우고 익히 바가 많고, 마법까지 익히고 있다지만 그래도 아직 10살에 불과하다. 신체적으로도 불리한 면이 많았다.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성숙되지 못한 탓에 어지간한 각오만으로, 어설픈 준비만으로 이 산을 오르는 것은 어려웠다. 다행히도 본인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루치드는 가까운 돌짬을 찾아 그곳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아직 해가 지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적당한 자리를 찾고 노숙을 준비하기에는 빠듯한 시간이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습지에서처럼 느닷없이 나타나는 불청객을 혹 야밤에라도 만나게 되면 곤란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비탈길 옆으로 적당한 틈이 보였다. 조금 산을 오르는 수고는 하더라도 안전하게 하룻밤을 보내기 위한 수고비라 생각했다. 루치드는 바위들을 기어오르거나 뛰어넘으며 위로 올라갔다. 아직은 산의 초입이라 넘기 힘들 정도로 큰 바위는 없어 무사히 돌짬까지 올 수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마치 작은 절벽이라 해도 믿을 만큼 우뚝 솟은 바위가 아래쪽으로 갈수록 갈라지면서 그 틈에 적당한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비록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루치드라도 일부러 바람을 맞을 필요는 없으니, 그 바위 틈 사이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이럴 때는 루치드의 몸이 크지 않다는 게 다행이었다.
배낭을 풀어 안에 든 물통을 꺼냈다. 아침부터 소란스럽게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적당한 옷가지와 물통을 수배하느라 힘들었지만 다행히 필요하다 싶은 것들은 다 챙길 수 있었다. 이전에 한 번 깨끗이 털었던(?) 적이 있어서 본래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까지 찾아가야 했었지만, 어차피 주인도 없었고, 오히려 그 주인을 찾아야 할 판국이니 적당히 필요하다 싶으면 모두 배낭에 챙겨 넣었었다.
“흐으.”
시원한 물이 식도를 지나가니, 갈증과 긴장이 동시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루치드가 찾아들어간 곳이 북쪽을 향해 트여있어, 햇볕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때문에 어두운 공간에 드러누운 채 눈을 감고 있자니 금세 잠이 들었다. 이따금씩 마법이 풀리거나 찬바람이 기어들어오면 재차 마법을 시전해 찬 기운을 몰아냈다.
****
돌이 깨진 틈으로 바람이 지나가며 휘파람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깬 루치드가 주위를 둘러보니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휘이이
소리가 나는 곳이 어딘가 싶어 귀를 기울이니 막혀있는 돌 위쪽에서 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지금 루치드가 있는 곳 외에도 틈이 벌어져 있는 곳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충 시간이라도 가늠하기 위해 돌짬을 빠져 나왔다. 우선 약하게 광원을 만들어 주위를 밝힌 뒤, 조심스럽게 기어 나와 하늘을 보았다. 해거름도 한참이 지났었는지, 대산맥 위로 연보랏빛 놀이 펼쳐져있었다. 그 산맥에서 불어온 막새바람이 루치드의 뺨을 스쳤다가 바위 사이로 빠져나갔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놀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보랏빛이 검게 물들고, 가장 높게 솟은 산의 중턱에 늦저녁의 안개가 서서히 만들어 지고 있었다.
다시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낮에 습지에서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는데 또 다시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뭐지?’
아직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분명 자신의 가슴 속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자신이 모른다는 게 답답했다. 누군가에게 묻고 싶어도 물을 사람이 없고,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만약 이것이 어떤 병의 전조(前兆)라면 어떡하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으려니, 또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자세로 한참을 있었지만 별 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알듯말듯한데 뭔지 모르는 기분이 이렇게 답답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관둘래.’
차라리 이 시간에 다른 효율적인 것을 찾아 생각하는 것이 낫겠다. 이를테면 돌산을 쉽게 오르는 방법 같은.
객관적으로 루치드는 이제 겨우 140㎝정도인데 이 신체로 눈앞의 돌산을 넘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뿐인가? 자칫 잘못했다간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루치드로서는 효율적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리고 루치드에게는 마법이라는 도구가 있었다. 꽤 효율성을 보장해주는 도구라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어떤 마법을 써야 하는가, 에 대한 문제였다.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마법 중에서 효과적인 것은 마찰력을 이용하는 마법 정도 밖에는 없는데 이 마법이 과연 산을 넘는데 도움이 될까 의심스러웠다.
사실 이전부터 생각하던 거지만, 지금은 새로운 마법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음?”
간질거리는 기분. 알듯말듯한 기분. 머릿속에서 희미한 안개가 일렁이는 기분.
‘뭐지?’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미지에 집중했다. 그 이미지는 두터운 안개 같은 장막에 가려져 선명하지 않았다.
한겨울, 두꺼운 이불을 둘러쓰고 침대에 웅크리고 있는 명수를 깨울 때 루치드는 있는 힘을 다해 이불을 잡아당겼었다. 그 때 명수가 헤, 하는 웃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곤 했었다.
지금. 실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덮고 있는 희미한 장막을 걷어내야 했다.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밝혀야 했다. 그래야 이 답답함이 사라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