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8화 (68/956)

모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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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어려 이 곳으로 올 이유도, 기회도 없었던 루치드는, 처음 방문한 습지대로부터 풍겨 나오는 습한 기운과 냄새의 습격에 콧등을 찡그렸다. 어디서부터 나는지 알 수 없는 썩은 내와 눅눅한 공기가 습지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벌써 온 몸을 휘감으며 불쾌감을 느끼게 하였다. 소나기에 젖은 옷으로 산을 뛰어다닐 때도 느낀 적 없는 눅진한 불쾌감은 앞으로의 길이 편치 않으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임시방편으로 주위에 열을 발산하도록 마법을 구현하니, 그나마 조금 괜찮아졌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보이는 회색빛의 암울한 습지대는 그 모습만으로도 테러였다. 가능하다면 빨리 지나가고 싶어졌다.

‘옛날 녹스로 향하던 사람들도 이런 습지대를 지났을까?’

무슬라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사람들은 천혜의 험지라 불리는 ‘리아빈’이라는 이름의 늪을 지나느라 고생했다고 했다. 과연 그 곳도 이곳만큼 냄새나고 더러운 곳이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만약 그곳도 이곳만큼 더럽고 냄새나고 위험했다면, 그 사람들은 정말 죽음과 절망이 가득한 상황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의지가 남달랐으리라.

물론 루치드도 지금 남다른 의지를 품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자신감과 다르게 선뜻 발을 내밀어 습지를 건너는 게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루치드가 습지 앞에서 우물쭈물 대던 사이, 멀리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그 시선은 점점 루치드에게 다가왔다. 소리 없이.

****

‘그래, 별 수 없어.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겠어.’

발을 내밀었다. 찐득한 회색 진흙이 발모양에 맞춰 밀려나며 숨겨진 향을 내뿜었다.

“윽!”

진흙 속에 뭐가 감추어져 있기에 밟는 순간 이토록 역한 냄새가 나는 걸까? 하지만 차마 ‘확대’ 마법을 써서 진흙 속을 자세히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보기에도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불편한데 그 안을 살핀다면 보통 사람의 비위로는 참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냄새만 맡아도 이렇게 속이 올라오는 것 같은데.

루치드는 자신이 땅을 밟은 건지, 똥을 밟은 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발목이 묻힐 만큼 깊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신발을 거쳐 발에 느껴지는 물컹한 느낌 때문에 불쾌감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루치드는 다시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밟은 진흙이 서서히 옅은 색으로 말라갔다. 임기응변이었지만 높은 열을 뿜어내 축축한 느낌이나마 줄이고 싶었다. 그런데 진흙이 마르면서 향도 진해지는 것 같았다.

“미치겠네.”

이건 루치드가 지금까지 겪었던 고난이나 위기와는 또 다른 성질의 위기였다. 제 정신인 사람이라면 이곳을 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리라 생각되었다. 고작 100걸음 정도의 넓이로 펼쳐진 습지를 건너지 못해 이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지도 않았다.

최남단이 땅의 끝이라서가 아니라 갈 수 없는 땅이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문득 아래를 바라보니 마른 땅에 방금 자신이 남겨놓은 진흙의 흔적이 보였다.

‘만약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갔다면, 건너편에서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

계속 시간을 끌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무너지려던 의지를 다지게 만들었다. 루치드는 매고 있던 배낭에서 헌옷가지―자신의 옷은 아니고, 옆집에서 ‘빌린’ 헌옷들이었다―를 꺼내 눈 아래를 모두 틀어막고, 한 걸음씩 걸어 나갔다. 후각을 희생하기보다는 촉각을 희생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법은 쓰지 않았다.

발밑만 바라보며 한 걸음 조심스럽게 걸어가던 루치드가 문득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처음 보는 생명체였다. 어지간한 어른보다 더 큰 몸뚱이에, 소년의 다리보다 더 긴 푸른색 깃털을 두르고 있었고, 양 옆에는 방패로 써도 될 법한 길고 두꺼운 날개를 찰싹 붙이고 있었다. 축구공 크기의 2배는 될 것 같은 머리와 잿빛의 넓적한 부리는 끝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어 매우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그 부리 끝에는 회색빛 진흙이 묻어있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루치드를 바라보는 눈이었다. 소년의 주먹보다 더 큰 눈동자와 검은 동공이 소년을 호기심 깃든 눈으로 바라보고 있어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였다. 소년의 키보다 더 길고 얇은 다리를 습지에 박아 넣은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것은 ‘새’였다.

“타조?”

하지만 루치드가 알기로 타조는 저렇게 짧고 굵은 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타조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지만, 아는 새가 많지 않았던 그는 큰 키와 긴 다리를 가진 새의 외형을 보고 그렇게 추측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언제 이렇게까지 다가왔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비록 루치드가 땅만 보며 걸음에만 신경을 몰두하고 있었던 점은 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가깝게 다가올 때까지 몰랐다는 것은 앞으로의 루치드의 행보에 있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조심성이 없구나. 나는.’

대략 10걸음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던 새는, 만약 몰랐다면 원래 그 자리에 서 있던 동상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움직임이 없었다. 새의 눈깔도 그저 색칠한 구슬을 박아놓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루치드에게로 향한 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저 새가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몰라 루치드는 한참동안 움직임을 멈추고 새를 관찰했다. 루치드도 멈추고, 새도 멈추고, 딛는 발마다 밀려나던 진흙도 멈췄다. 어쩐지 바람도 불지 않았다. 어느새 높게 솟은 태양이 발밑에 만들어 둔 그림자마저도 멈춘 것 같았다.

루치드는 묘한 환상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시간마저 멈춘 것 같았다. 아니 이 공간 자체가 현실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어쩐지··· 가슴 속에서,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떠오를 듯 말 듯한 기분도 들고, 간질거리는 느낌도 들었다.

‘뭐지?’

움직이지 못하는 마법에라도 걸린 걸까, 싶은 마음에 신발 속에 감쳐진 발가락을 꼼지락 거려보았다. 당연히 움직였다. 그리고 움직임을 인지한 그 순간 간질거리던 느낌도 사라졌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기분인데, 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대로 저 새와 눈싸움을 하면서 대치상태를 오래하는 것이 좋지 않다, 라는 판단을 내릴 뿐이었다.

누차 말하지만, 루치드는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딱 정해진 시간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게 시간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런 냄새나는 곳에서 이상한 얼굴로 노려보는 새 따위와 눈싸움을 하고 있을 시간은 없는 것이다.

딱히 위기감이 느껴지진 않아서 마법으로 저 새를 공격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눈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같은 막돼먹은 명제를 루치드는 신용하지 않았다.

“비켜라, 이 하찮은 것들!”

따위의 유치한 대사를 내뱉으며 질주하던 형근이라면 또 모를까. 그래도 중학교에 가고 나서 정신 차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우선, 루치드는 평화적이고 안전한 방법을 도모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왼 발을 들었다. 혹시 모를 위협이 있을지 모르니, 시선은 계속 새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새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진흙에서 발이 떨어졌다. 조심스럽게 왼쪽으로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곳으로 발을 내렸다. 엉거주춤한 자세가 됐지만 경계태세는 계속 유지했다.

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번엔 오른발을 들었다. 자세가 좋지 않아 중심을 왼쪽으로 기울인 채 오른발을 들었다. 들러붙어 있던 발바닥을 진흙이 쉽게 놔주지 않아 루치드는 속으로 끙끙거렸다. 다시 쩍 하고 바닥에서 떨어진 발을 왼발 옆으로 슬며시 옮겼다. 중간에 잠깐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새가 움직였다.

새가 오른다리를 들었다. 루치드보다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들어 올린 오른다리―세 개의 발가락이 보였는데 루치드의 머리를 완전히 감싸 쥐고도 남을 정도로 커보였다―가 옆으로 벌어졌다가 다시 진흙 속으로 날카로운 발톱을 숨겼다.

왼다리를 들었다. 루치드가 휘청거렸던 자세였지만 새는 신기하게도 그 큰 몸뚱이를 오른다리 하나로 잘 지탱하고 있었다. 왼다리는 매우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오른 다리 옆으로 옮겨졌다.

새는 여전히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눈 속에서 비웃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루치드는 괜히 발끈하는 심정이 들었다.

‘저게 누굴 놀리나?’

루치드는 다시 옆으로 한 걸음을 힘겹게 옮겼다. 새도 같은 간격을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이대로 계속 옆으로 가는 것은 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루치드가 과감하게 한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새는 똑같이 한 걸음을 다가왔다.

한 사람과 한 마리 새 사이의 거리가 8걸음 정도로 가까워졌다.

진짜 여차하면 불을 질러버리겠다는 각오를 하고 한 걸음을 더 다가간 루치드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새의 날카로운 부리에 저도 모르게 침을 꿀떡 삼켰다.

지금까지의 움직임만 보자면, 저 새는 루치드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습지 위를 오갈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저 새가 어떤 감쳐둔 무기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루치드 역시 숨겨놓은 한 수―마법―가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돼 주었다. 하지만 용기와 별개로 상황은 루치드에게 별로 좋지 않았다.

“아 정말··· 미치겠네.”

결코 물러섬이 없는 새 때문에 루치드는 저도 모르게 짜증 섞인 말을 뱉었다.

―꾸에엑

무거운 부리 때문인지 턱을 내린 모양새로 있던 새가 기성(奇聲)을 토했다. 흠칫 놀란 루치드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새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혹시 날 따라하나?”

루치드가 슬쩍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반응이 없었다. 더 높이 들어 올려 귀 옆에 대었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왼손도 위로 들어올렸다.

―꾸에엑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대신 다시 굵은 파이프 속을 긁어대는 울음을 터뜨렸다. 왠지 너 뭐하냐, 라고 핀잔을 주는 것 같았다.

루치드는 더 이상 바보짓은 하지 않겠노라고 생각했다. 맹렬하게 뇌를 가동하여 계산을 한 뒤, 루치드는 돌산을 향해, 새를 피하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방향으로 마찰계수를 적당히 낮추고 달렸다. 처음에는 너무 미끄러워져 휘청였지만 이내 조건을 수정하여 마법을 시전한 결과, 어느 정도 진흙의 저항을 덜 받으면서 달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때를 맞춰 새가 옆에 나란히 서서 달렸다. 머리를 똑바로 세우고, 시선은 여전히 루치드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처럼 루치드에게 고정된 채였다. 고고한 발레리나의 그것처럼 발을 번갈아 움직이며 진득한 습지 위를 뛰듯이 걸었다. 그럼에도 워낙 키가 커서인지 루치드의 스피드를 잘 따라왔다.

그 모습을 흘깃 쳐다본 루치드가 마법을 사용했다. 새의 진로방향으로 아예 마찰 계수를 0으로 만들어버렸다. 순간 중심을 잃은 새가 비틀댔다.

넘어지나, 싶은 순간에 새가 홰치듯이 날갯짓을 했다. 몸통 옆에 붙어 있을 때는 설마 했는데, 펼치니 자기 키보다 더 크고 넓은 날개였다. 순간적으로 몸이 떠오를 것처럼 위로 떴다가 이내 내려앉았지만, 대신 몸의 중심을 잘 잡았는지 습지 위를 뒹구는 참상은 일어나지 않아 루치드는 속으로 아쉬움을 삼켰다. 그러나 덕분에 루치드와 새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 멀어졌다.

헌 옷가지를 들고 있던 오른손은 여전히 코를 막고 입을 막았다. 인간과 새가 동시에 습지 위를 뛰어다니자, 구역질나고 비위 상하는 역한 냄새가 천지사방에 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꾸에엑

등 뒤에서 다시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루치드는 돌아보지 않았다. 뛰면 금방 건널 수 있는 습지를 괜히 냄새를 탓하며 건너지 못하고 우물쭈물 했던 자신이 한심했고, 혹시라도 돌아보았다가 발을 잘못 디디면 습지 탈출이 실패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후드득

‘어? 이 소리는 날갯짓 소리 같은데?’

루치드는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앞으로 20걸음 정도를 더 뛰면 될 것 같은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리고 설마 하는 마음에 루치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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