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1)
-------------- 67/952 --------------
바닥에서 싸늘한 냉기가 올라왔다. 냉기를 피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척이던 루치드가 불현듯이 정신을 차렸다. 감겨 있던 눈을 떠 보니 주변이 어두웠다.
“명수야.”
옆자리에 누워있을 명수를 찾았다. 주위가 이 정도로 어둡다면, 새벽인가? 하는 생각이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흐릿한 시야가 어둠의 방해를 뚫고 초점이 서서히 잡힐 때쯤, 옆에 명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두 팔로 바닥을 짚으니, 거친 나뭇결이 느껴졌다. 한 쪽 무릎을 세우고 허리에 힘을 줘 몸을 일으키니, 어렴풋한 기억 속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둘러보니 익숙한 식탁과 의자, 문과 지붕과 마루가 보였다.
“돌아왔구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불과 몇 분전, 자신이 무기력하게 당해야만 했던 이적(異蹟)의 폭력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었는데, 마치 복수라도 하듯 이렇게 또 당하고 말았다. 여전히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누가 장난이라도 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을 잡아다 불에 태워버리고 말리라, 속으로 다짐하는 루치드였다.
우선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자 밖으로 나왔다. 역시나 자신이 살던 기억 속 빈촌의 모습 그대로가 눈앞에 나타났다.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달빛에 빈촌의 빈 집들 지붕에 놓인 기와들이 번들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릴 적엔 그저 돌덩어리를 얹은 지붕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저것들이 오랜 시간 불에 구워낸 건축재라는 것을 알게 될 정도의 지식이 쌓였다. 어릴 적엔 마을의 집들이 모두 아무렇게나 지어져 있는 건줄 알았는데, 이제는 나름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고, 남쪽의 햇빛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지어진 집이라는 것을 알만큼 머리가 깨였다.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그만큼 루치드는 성장했다. 하지만, 이곳은 기억의 마지막에 남아있던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이곳만 시간의 흐름을 피한 것처럼 느껴졌다.
서쪽 ‘대산맥’에서 불어온 바람이 루치드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소리 없이 다가와 얼굴을 치고 간 까닭에 정신이 번쩍 든 루치드가 고개를 돌려 ‘대산맥’을 바라봤다. 어둠과 구름에 싸여 달빛으로는 그 진체(眞體)를 살피기 힘든 ‘대산맥’이 마치 루치드를 비웃는 것 같았다.
겹겹이 쌓인 산등성이 위로 우뚝 솟아 있던 왼쪽 산이 말했다.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겠냐?”
달빛을 받아 은은히 존재감을 뽐내던 오른쪽 산이 바람을 집어 던졌다.
“건방지게, 어디서 까부는 것이냐?”
가운데서 어깨를 활짝 펴고 큰 형님처럼 서 있던 산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어디서 함부로 설치려 드느냐?”
루치드는 차가운 바람과 맞섰다. 두 다리를 곧게 펴 땅 위에 세우고 두 주먹을 힘껏 쥐었다. 어깨를 펴고 두 눈에 힘을 줬다. 이를 악물고 강하게 의지를 다졌다.
“난 결코 포기하지 않겠어.”
내 힘이 약하더라도, 내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
내 힘이 부족하더라도, 내 의지를 꺾지 않겠다.
내 몸과 정신은 나만의 것이다.
끝까지 싸우고, 버티고, 이겨내겠다.
굴복하지 않을 것이고, 순종하지 않을 것이며,
지배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하는 약속, 끝까지 지킬거다.”
루치드는 각오를 단단히 했다.
****
돋을볕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검은 기운을 물리칠 즈음, 집을 나온 루치드는 지난밤의 고민과 갈등을 깨끗이 지워버렸다. 이제는 예전처럼 누군가를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고, 그저 당하고만 있지도 않을 것이다.
때문에 소년은 지난 밤 동안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가 앞으로 찾아 가야 할 길에 대한 문제였다.
루치드에게는 몇 가지 선택권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녹스’로 가는 방법이었고, 또 하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서 실종자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방법이었다.
녹스로 가야 할지를 고민한 이유는 단순했다. 지난번에 그 곳에서 오랜 시간을 지냈고, 얼굴을 익힌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슬라의 흔적도 찾아보고 싶었다. 비록 무슬라가 스크로파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더라도, 그의 집과 그의 흔적이 그 곳에 있을 터였다. 그것을 다시 한 번 찾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다만 그곳을 가길 망설인 이유는, 지금 루치드가 세운 목적에 맞지 않은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세계에서야 방법을 모르니 그저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얌전하게 공부만 했었다면, 이제는 달랐다. 어떤 흔적이라도, 실마리라도 찾아서 가족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루치드의 과제였고 목표였다.
‘그것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공부 했던 건데.’
혹시나 다시 이곳으로 오게 되었을 때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와서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지난번의 일을 겪으며 깊이 생각했던 바였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니 당황하게 되고 타인에게 의지하게 되면서 자신의 길을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 핀체노에게 의지했고, 무슬라에게 민폐를 끼쳤었다. 이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했다.
‘지난 번 녹스를 갔을 때에는 가족들이나 빈촌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 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 곳에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지난번에도 서쪽 산맥은 가봤지만, 사실 그 곳이 얼마나 넓은가. 그가 간 방향에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가 빈촌 사람들이 ‘대산맥’을 가지 않았다는 증거는 될 수 없었다. 자신이 발견을 하지 못했거나, 혹은 사람들이 다른 길을 통해 ‘대산맥’을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루치드가 다시 한 번 가봐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또 다른 방향은 남쪽이었다.
분명 이 곳이 대륙의 최남단이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하지만 그 부분에 있어 의문이 드는 점은, 루치드가 저 세계에서 쌓아온 지식과 상식에 맞지 않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심지어는 똑똑하다는 핀체노마저도 이곳이 최남단이기 때문에 남쪽으로는 갈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반응했었다. 그런데 지금도 눈에 보이듯이 남쪽에는 분명 ‘대산맥’만큼은 아니지만 산들이 있고, 산이 있다면 그 너머로 넘어가 볼 수도 있다는 뜻인데 왜 사람들은 이곳을 최남단이라고 표현한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도 하나같이 남쪽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건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설명해주지 않은 부분이 있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저 산을 지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루치드가 가진 정보로는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남쪽의 얕은 습지대를 지나 보이는 산은 분명 ‘대산맥’과 다른 유형의 산이긴 했다. 나무가 거의 보이지 않고 기암절벽과도 같은 지형에, 날카로운 돌들이 짐승의 아가리 속 이빨처럼 쭈뼛 솟아나있는 돌산이 바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섣불리 남쪽으로 갈 이유가 없었다. 캐낼 것도 없었고, 주워올 것도 없었으며, 괜히 갔다가 다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될 지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최남단’이라는 호칭을 붙이며 지나갈 엄두도 못 낼 정도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게 루치드의 생각이었다.
여러모로 의심이 많이 가는 정황이라 여겼다. 때문에 남쪽으로 가봐야 하지 않을까를 지난 밤 고민을 했던 것이다.
“그래. 일단 의심스러운 변수는 제거해야지.”
그래야 식은 깔끔해지고, 계산은 단순해지니까.
남쪽으로 향하기 전, 루치드가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하는 점이었다. 이건 의외로 중요한 변수일 수 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녹스로 가야한다는 점인데, 여기서 녹스까지 가는 길이 녹녹하지도 않을뿐더러, 시간도 많이 걸린다는 점이었다.
루치드가 조바심을 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언제 다시 이곳에서 다시 저 세계로 가게 될지 모르니까.
때문에 생각해 낸 것이, 빈촌에서 대략적이나마 그 시간의 흐름을 추측해보자는 것이었다.
① 지난 번, 저 세계로 가기 전에 이곳은 초가을이었다.
② 이곳에서의 6개월이 저곳의 시간으로는 6시간 정도였다.
하지만 저곳에서 2년 4개월의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돌아왔다.
③ 현재 이곳의 바람의 방향이나 기온으로 볼 때, 역시 가을로 추측되는 계절이다.
따라서 이곳은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던지, 혹은 1년이나 2년 혹은 몇 십 년이 지난 가을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날이 밝은 후 빈촌의 집들이나 그 실내를 보고 판단해보면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루치드의 생각이었다.
'아, 그럴 필요가 없으려나?'
생각해보니, 자신이 준비한 게 단순히 지식만은 아니었다. 그 곳에서는 그다지 필요한 일이 없어 쓰지 않다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다시 집으로 들어온 루치드는 천장에 빛의 구체를 만들었다. 구체라기보다는 발원점(發源點)이라고 해야 옳겠다. 그 지점으로부터 쏘아져 내린 형광등 보다 밝은 하얀 빛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루치드는 집안 곳곳을 환하게 밝히기 위해 여러 곳에 광원(光源)을 만들어 어두운 부분이 없도록 만들었다.
이후 집 안을 샅샅이 살폈다. 부엌 수납장에 담긴 음식들부터 해서 바닥에 쌓인 먼지의 흔적. 천장 모서리에 생긴 거미줄과 방치된 의자의 상태까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고 훑었다.
‘이상해.’
음식―먹다 남은 빵, 야채들, 말린 버섯 등―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다. 그래도 차마 뜯어 먹어보지는 않았다. 얕은 수준이지만 먼지가 쌓여있는 게 보이는데 먹을 수가 없었다.
아마 예전의 루치드라면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위생에 대한 개념이 잡힌 루치드는 차마 손을 뻗기가 꺼려졌다.
‘그대로야.’
식탁이나 바닥에 쌓인 먼지의 양도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전에도 살핀 바가 있었지만 정확히 어느 정도로 차이나는 지를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지난번에도 지금과 같이 밝은 빛의 보조를 받아 조사했었다면 비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들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의지했던 것과 지금을 비교하자면, 해와 달의 차이만큼 확연한 차이가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지가 많지 않다는 점은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지금 녹스로 가봐야 하는 게 아닐까?’
루치드의 마음속에 갈등이 생겼다. 단순히 시간만 알자고 드는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간 김에 샤피로도 보고, 무슬라의 집도 보고 싶어질 것이고, 그러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만 같았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시간과 남쪽 돌산을 넘어가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여유가 없다. 따라서 녹스는 가슴 속에서 지워야 했다. 지워야 하는데······.
자꾸 무슬라만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 속에 아련한 느낌, 아릿한 아픔이 느껴져 힘들었다.
“이러지 말자.”
루치드는 소리 내어 각오를 다졌다. 이곳에서 다시 멍청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이미 충분히 많은 실수와 멍청한 행동을 해 왔었다. 이제는 그래선 안 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 하는 소년이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건물의 상태나 실내의 모습으로 보건대,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그렇다면 빨리 움직여야 할 때였다. 지금도 늦긴 했지만, 서둘러서, 조금이라도 흔적을 발견해 낼 가능성을 높여야만 했으니까.
****
빈촌에서부터 남쪽 돌산 사이에는 짧지만 얕은 슾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여름이면 이곳에서 날아오른 각종 곤충들이 빈촌을 습격해서 밤잠을 못 이루게 하곤 했었다. 또 가끔 징그럽게 생긴 쥐들이 떼를 이루어 지나가는 모습들이 종종 눈에 띄곤 했다고 했다. 그래서 이 습지대로는 사람들이 잘 오지 않았었다.
반면 처음 이 곳을 방문(?)한 루치드는 의외의 주인(?)으로부터 환영인사를 받았다.
“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