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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66화 (66/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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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고야, 아까 니가 뭐라고 한 거야?”

루치드와 가까이 서 있었던 철용이 물었다. 뭔가 월드컵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넣은 사람을 보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예? 아, 별 말 아니었어요.”

“되게 어려운 말 한 것 같던데?”

“아뇨, 그냥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한 거예요. 책에서 본 거 같긴 한데 저도 무슨 말인지 제대로 몰라요.”

루치드는 1, 2학년 때 교무실을 오가며 선생님들을 도망가게(?) 만드는 스킬(?)을 익혔다. 뭔가 어려운 말을 써서 혼을 빼놓는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행동이나 말로 정신없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한 루치드가 응용 버전을 선보인 셈이었다.

“선생님, 우선 혜진이 집에 데려다 줘야 할 거 같아요.”

보육교사가 룸미러로 뒤를 보며 말했다.

“그래야겠구나. 저기, 집이 어디니?”

승합차는 유세 현장의 소란을 뚫으며 거리를 질주했다.

****

혜진은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다. 평소라면 ‘다녀왔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칠 텐데, 오늘은 기운이 없었다. 기분도 아니었고.

신발을 벗으려는데, 남자 구두가 보였다. 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왔니?”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안방에서 나와 혜진을 반겼다. 현관 앞에 서서 말뚝이라도 된 듯 가만히 서 있는 혜진을 보며 어서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뭐하니, 들어와. 아빠 왔는데 빨리 들어와서 인사해야지.”

“······.”

혜진은 입고 있던 검은색 벨벳 트레이닝 바지를 움켜잡았다.

“혜진이 왔어?”

안방에서 하마의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비대한 몸을 물속에 감추고 눈만 빼꼼히 내밀어 주위를 살피는 하마 같은 아버지였다.

혜진은 느릿하게 움직여 집 안으로 들어섰다. 때를 맞춰 아버지가 안방에서 나왔다. 한 달에 한 번, 아니 일 년에 10번도 볼까 말까 하는 아버지였다. 재작년까지는 그래도 자주 찾아 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거의 찾아오지 않는 아버지였다. 대신 요즘은 포스터로 얼굴을 마주했다.

혜진은 아버지를 본체만체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서려 했다. 아버지가 부르지만 않았다면.

“혜진아, 이리로 와봐라.”

거실에 놓인 검은색 가죽 소파 위에 앉은 아버지가 혜진을 불렀다. 혜진은 어떻게 할까 하다가 억지로 발을 돌려 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거기 앉아.”

아버지가 1인용 소파를 가리켰다. 혜진은 내키진 않지만 지시에 따라 소파 끝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가죽이 비틀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기자들이 왔었더냐?”

역시 혜진의 반응이 심상치 않아 보이니 그 핵심을 파악해낸 아버지, 강해준이었다. 해준은 혜진의 침묵에서 답을 읽었다.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있다. 우선 미안하다. 되도록이면 이런 일이 없도록 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많이 놀랐겠구나.”

“······.”

해준은 마른 뺨을 쓸어내리며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심했다. 들키지 말았어야 할 일이 들켰고, 기자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딸아이를 찾아갔었나보다. 앞으로의 선거도 문제였고, 입을 싸게 놀린 내부의 적도 찾아야 했고, 얄미운 얼굴을 하고 있을 주정호를 물 먹일 방법도 찾아야 했다.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어 초조한 해준이었다.

“일단 너희 엄마랑 이야기를 했다. 조만간 넌 엄마랑 함께 미국으로 가게 될 거다. 거기서 공부하는 게 너한테도 좋을 거야.”

이 얼마나 흔해빠진 전략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 흔해빠진 방법이 지금까지의 무수한 사례들을 통해 검증된 방법이라는 사실 때문에 선택하게 되었다.

“여기 있으면 눈치도 보이고 학교 다니기도 힘들겠지만, 거기서는 새로운 친구들도 다시 사귈 수 있고 니 미래에도 도움이 될 게다. 이런 상황에서 가게 된 것이 좋지만은 않지만 언제고 널 미국에 보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니 인생의 기회가 될 수 있겠다는 판단을 너희 엄마랑 함께 했다. 그러니 내일부터는 학교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모레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엄마랑 같이 가거라.”

혜진은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오늘 겁박 당했어요.”

“응?”

생뚱맞게 무슨 소리야? 겁박이라니? 순간 당황스러운 마음에 이상한 상상까지 스쳐지나갔다.

“무슨 소리니?”

“···강박으로··· 고의적인 강박이라고 했어요.”

“강박이 무슨 뜻인지 아니?”

혜진은 도리질을 쳤다.

“기자 아저씨들이 겁박했다고 친구가 알려줬어요.”

“이 새끼들이······.”

기자 놈들이 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는 정도로 이해되었다. 아니 그보다 초등학생이 겁박이나 강박이란 표현을 쓸 수 있나?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걔는 그랬는데, 내 앞에 서서 그랬는데··· 아빠는 제 걱정이 안 돼요?”

혜진은 도저히 눈물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힘을 주고 눈을 꼭 감아도 감긴 눈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비집고 흘러내렸다. 그 아이는 자기 앞에서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당당하게 섰었는데, 아버지라는 사람은 자신을 먼 곳으로 보내 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해준은 가만히 바라보다 한 마디 했다.

“걱정 한다. 걱정하니까, 널 미국에 보내기로 결정한 거다. 널 위해서 한 엄마 아빠의 선택이야.”

“친구랑 헤어지기 싫어요. 친구들이랑 함께 학교 다니고 싶어요.”

“안 된다.”

지금쯤 미국에 살 집이 구해졌을 것이다. 미국행 비행기는 오전에 구해 놓았다.

“왜요?”

울먹이는 혜진의 목소리도 아버지의 결정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여기 있으면 니가 힘들 거다. 널 위해서 엄마, 아빠가 선택한 거니까 잘 따라주길 바란다. 넌 착하고 똑똑한 아이니까 잘 알아들을 거다.”

상황이 좋다면 훨씬 부드럽게 좋은 아버지 역할에 충실할 수 있을 텐데, 여건이 이렇다보니, 여유가 없다보니 조금 강압적인 어투가 나왔다.

‘어쩔 수 없다, 지금은.’

해준의 생각이야 어떻든, 혜진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게 억울하고 슬프기만 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부모의 선택에 따라야만 하는 입장.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도 없는 현실. 모든 게 혜진에게 불합리하게 여겨졌다.

“나 미국가기 싫어. 가면 죽어버릴 거야.”

눈을 부릅뜨고 해준을 쳐다보는 혜진.

“혜진아! 어디서 그런 말버릇이니!”

곁에서 조마조마하게 서 있던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 혜진을 다그쳤다. 해준은 얼굴이 붉어졌다. 순간 속에서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손이 저절로 위로 올라갔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 판인데, 안 그래도 속이 상하는데, 안 그래도 지를 위해서 쓰지 않아도 될 돈까지 써가며 준비했는데,

‘감히··· 감히 뭐?’

혜진은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그것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대신 나지막한,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만 들렸다.

“지금은 니가 날 원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몇 년 만 지나면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고마워하게 될 거야. 그러니 지금은 아빠 말대로 해라.”

가죽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눈을 뜨니, 짓눌렸던 가죽 소파가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여보······.”

“내일 전화하지.”

잠시 후,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신호라도 된 듯 혜진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

보육원으로 돌아온 루치드는 우선 씻기 위해 세면장을 찾아갔다. 차갑게 쏟아졌던 물이 금세 따뜻한 물로 바뀌었다. 금속핸들을 돌려 차가운 물이 나오게 바꾼 뒤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았다.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으니 정신이 확 깨는 느낌이 들었다.

덕분에 한참을 멍텅구리마냥 멈춰있던 뇌가 움직이기 시작한 느낌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 사람들 앞에 서서 일장연설을 했는지 모르겠다.

철용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 당시에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들을 아무렇게나 주워 삼켜 뱉어내기 바빴다. 그간 쌓아온 지식이 많다는 것을 뻐기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고, 논리적인 사고과정을 거쳐 토해낸 문장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저 정신없이 허점투성이인 임기응변을 펼친 만용에 불과했다. 다행히도 좋게 상황을 모면했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지, 자칫했다간 자신이나 혜진이나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유림과 혜진이 맞붙었을 때도, 혜진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도, 자신은 별 생각 없이 우선 달려들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어떤 이성적인 판단 하에 달려들었다고 보기엔 자신의 대처가 너무 무모해보였다. 그렇다면 충동적으로 달려들었다는 이야기인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 라는 건 어쩐지 자신의 감정을 속이는 기분이 들었다. 루치드는 솔직히 명수를 제외하고는, 조금 더 인심을 써서, 보육원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사실 제대로 마음을 준 친구가 없었다.

불쌍해보여서? 누가 누굴 동정한다는 것일까?

‘화가 나서?’

그러고 보니, 화가 난 것 같기도 하다. 어른들 사이에 놓인 혜진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그 자리에 자신이 쪼그리고 앉아서 숨죽이고 있는 모습이 겹쳐졌다. 정신적 폭력이라고 했었나? 기웅은 물리적 폭력이 아닌 정신적 폭력도 폭력이라고 했다. 상대를 윽박지르고 행동을 제약하는 강압적 태도와 말 역시 폭력이라고 했다. 혜진이 당하는 것은 폭력이었고, 자신은 폭력의 피해자를 구하고자 했다. 왜?

“나도 피해자니까.”

루치드 역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력의 희생자였다. 말이나 행동은 없었지만, 자신에게 벌어졌던 그 모든 상황들이 모두 폭력이었다. 이유 없이 가족을 빼앗고, 이유 없이 낯선 곳에 떨어뜨려놓고, 이유 없이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는 현실이 모두 폭력이었다.

루치드는 그 폭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를 품었다. 그리고 그 의지가 투영되어 싸움을 말리려고 했고, 혜진을 구하고자 했다.

자신의 감정을 깨닫자 루치드는 새삼 자신 안에 뭔가 단단한 것이 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기준이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굳이 말로 하자면, ‘저항정신’이라고 해야 하겠다.

세면대 위에 붙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물기가 가득한 얼굴이 보였다. 생뚱맞게도 루치드는 자신의 얼굴이 낯설어보였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자신의 얼굴을 정면으로, 뚫어져라 바라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지금껏 세수를 할 때도 스쳐가듯 보았지, 이렇게 관찰하듯 바라본 적은 없었다.

루치드의 눈이 루치드의 눈을 마주보았다. 단단하고 투명한 눈이었다. 검은색도 아니고 푸른색도 아니고 갈색도 아닌 묘한 어둠이 깃든 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나라는 사람은 저렇게 생겼구나.’

순간, 머릿속에서인지 아니면 세면장 바깥에서인지 환청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넌 누구니?”

나? 누가 날 부르지? 루치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찾아보았다. 그 때, 위에서 부르는 건지, 아래에서 들려오는 건지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이 들렸다.

“넌 이름이 뭐니?”

루치드는 다시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봤다.

“내 이름···.”

내 이름? 내가 누구냐고? 당연히.

“난··· 루치드. 루치드다.”

루치드는 정신을 잃었다.

****

“선생님, 선생님. 큰일 났어요!”

명수가 계단을 오르던 보육교사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어찌나 거칠게 잡았는지, 하마터면 옷이 벗겨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화들짝 놀란 보육교사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명수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난리니?”

“석고가, 석고가···.”

숨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뛰어왔는지 허덕대는 명수였다.

“왜?”

“석고가 쓰러졌어요!”

명수가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보육교사의 치마를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서 보육교사는 그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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