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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65화 (65/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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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습니다!”

선전팀장이 선거 캠프 사무실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사무실이 엘리베이터도 없는 3층 건물에 위치한 지라 계단을 뛰어 올라와야 했던 선전팀장이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의 마지막 전언과도 같이 한마디 말을 남기고 입구 옆 의자 위로 쓰러졌다.

“무슨 소리야?”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선전팀장에게 쏠렸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마음고생이 심해 점점 살이 빠지고 있던 지라 사람들의 동정만 더해가고 있던 처지였는데, 이제는 정신 나간 사람마냥 저러고 있으니 안타까움이 배가되었다.

마침 가까운 자리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정책팀장이 다가와 선전팀장의 안부를 물었다.

“괜찮아?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호들갑인가?”

한참을 의자 위에서 숨을 고르던 선전팀장이 이내 고개를 들고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그제야 사람들이 자신을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고들 있음을 알게 되어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선전팀장이 곁에 선 정책팀장을 잡아 끌어 눈높이를 맞추곤 조심스럽게 정보를 전했다. 정책팀장의 눈이 커졌다.

이윽고 정책팀장은 사무실 가장 안쪽에서 못마땅한 얼굴로 상황을 보던 주정호 후보에게 달려가듯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주정호의 눈이 커졌다.

주정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 입구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숨을 가누지 못해 헉헉거리던 선전팀장에게 다가간 주정호는 선전팀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어요. 거봐. 난 팀장님이 해낼 줄 알았다니까.”

주정호가 웃음을 터뜨리자 사무실 사람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 특히 회의를 함께 하며 어느 정도 오고 가던 이야기를 알던 사람들은 상황을 읽고 파악했다.

‘강해준 약점이 걸렸구나!’

****

그 후로 교실 안에 묘한 분위기가 계속 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큰 사건은 터지지 않았다. 혜진과 유림은 의도적으로 서로를 쳐다보지 않았고, 우연히 눈이 마주쳐도 동시에 시선을 피했다. 은진과 유경 사이에도 비슷했다. 아니, 두 여자아이를 중심으로 나뉜 패거리들 전체가 서로를 피했다.

조용하고 침착한 분위기에 수업 진행에 무리가 없으니 선생님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사실 은밀히 진행되는 여자 아이들 간의 계파싸움을 담임선생님이 눈치 채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눈치 채더라도 사실 말리는 선생님은 없었다. 딱히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이상, 여자들 간의 기싸움이란 남자 아이들 사이의 주먹질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아이들이 성장해 나가면서 겪는 과정 중의 하나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왕따나 지나친 폭력 문제로 발전하지 않는 이상은 선생님들도 눈감아주는 형편이라는 게 현실이었다.

두 집단은 싸우는 대신 자기 패를 불리는데 집중했다.

“야, 미경이 재수 없지 않냐? 지가 예쁜 줄 알고 잘난 척 하는 거 봐.”

미경이라는 아이를 뒷담화하면서 거기에 동조하는 아이들을 자기 패거리로 흡수하려는 영악함을 보이는 아이들.

“야, 재연이는 토요일에 부르지 말고 우리끼리 가자. 재연이한테 간다고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재연이라는 아이와 그 쪽 무리를 따돌리면서 동시에 친목과 결속을 다지는 아이들.

두 무리에도 끼지 않고 중립을 지키던 아이들도 더 이상은 중립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어느 한 쪽을 편 들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다.

한 편, 여자들의 계파싸움이 물밑에서 벌어지는 사이, 남학생들은 쉬는 시간마다, 점심시간마다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교실에서 교내 중앙계단까지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손쉽게 운동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거리적 이점은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내모는 중요한 요소였다.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이 눈치싸움을 벌이든 말든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책을 탐독하는 루치드였다. 소년은 최근의 일도 있고 해서 잠시 물리학과 수학에서 손을 떼고 인문학 관련 서적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런 소년을 멀지 않은 곳에서 바라보는 여학생이 있었으니, 바로 유림이었다. 그 날 이후, 유림은 루치드에게로 향하는 애틋하고 간절한 시선을 돌리기 힘들었다. 다시 한 번 루치드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하는 작고 소박한 희망사항을 품은 채 루치드의 뒤통수―루치드가 앉은 자리 줄의 제일 뒷자리가 유림의 자리였기 때문―만 바라보았다.

“유림아, 무슨 일 있어?”

라고 물으며 루치드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 모습 따위를 상상하며.

하지만 책에 빠진 루치드가 고개를 들고 소녀를 바라볼 일은 생기지 않았다. 먼저 다가가볼까 하는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혜진의 무리들이 주위에 도사리고 있음을 아는 유림은, 차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뒤통수만 바라보는 게 다였다.

그래도 보다보니 뒤통수도 멋져 보이는 것 같아 그냥저냥 만족하며 지내고 있는 유림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루치드는 보육원 승합차량을 타기 위해 교문을 나와 기다리는 중이었다. 명수가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어쩌면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의미를 알 수 없는 춤을 추고 있었다. 그것도 무반주로.

“좋은 일 있어?”

참지 못한 건 루치드 뿐만이 아니었다. 철용이 명수에게 질문하니, 명수가 말하기를,

“수업 끝났잖아요.”

라고 대답했다. 수업이 끝난 일이 무반주댄스를 출 만큼 좋은 일이구나,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는 루치드와 철용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교문 밖이 어수선했다. 낯선 어른들 몇몇이 교문 밖을 서성이고 있는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딱히 학부모로 보이는 것은 아니어서 의심스러운 눈빛을 하고 쳐다보는데, 사람들이,

“저기다!”

라고 소리치며 한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호기심이 생긴 루치드와 아이들이 그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마침 교문 밖을 나오는 한 여학생에게 달려드는 모습들이었다.

어지간하면 누군지 몰라 헤맬 법도 한데, 워낙 키가 큰 여학생이다 보니 눈에 안 띌 수가 없는 그 아이는 바로 혜진이었다. 낯선 어른들이 달려들어 가슴에 품고 있던 것을 꺼내 들어 보이는데, 카메라였다. 플래시가 터지고 사람들이 혜진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니가 혜진이야?”

“장혜진이야, 강혜진이야?”

“너희 아버지가 강해준 후보가 맞니?”

“강해준 후보를 자주 만나니? 얼마나 자주 만나니?”

“강해준 후보를 최근에 본 게 언제니?”

“너희 어머니가 강해준 후보에 대해 뭐라고 하시니?”

저 많은 말들이 한순간에 쏟아지니 제정신인 어른들이라도 정신이 없을 판국이다. 하물며 초등학교 3학년 혜진은 덩치 큰 어른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알아듣기도 힘든 말들을 바늘꽂이에 바늘 꽂듯 찔러대고 있으니 겁을 먹는 건 당연했다. 그러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주춤거리며 물러서다가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넘어진 여학생의 손을 붙잡아 주는 어른들은 없었다. 그들은 손을 건네는 대신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아버지가 강해준 후보라는 사실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니?”

“너희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난 게 대학 때 부터라는 소문이 있던데, 들은 적 있니?”

“너 말고 혹시 다른 동생은 없어?”

어른들은 어떻게든 대답을 듣고 말겠다는 모양새로 혜진을 다그쳤다. 혜진과 함께 교문을 빠져 나오던 아이들은 어느새 멀찍이 도망가 버리고 그 곳에는 혜진만 길 잃은 고양이마냥 바닥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그만하세요.”

어느새 어른들의 품을 파고들어와 혜진 앞에 우뚝 선 루치드였다.

“지금 쓰러져 있는 거 안보이세요? 비키세요.”

잠시 영문을 몰라 하던 기자들은 잠시 머뭇대다가, 다시 본능적으로 질문을 해댔다.

“너 누구니?”

“혜진이랑 잘 아는 사이니?”

“혜진이 아버지가 강해준 후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혜진이가 아버지랑 만나는 모습을 본 적 있니?”

“그만하세요!”

어른들은 화끈거리는 열기를 느끼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착각인가 싶지만 분명 자신들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열기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어디에도 그 열기의 근원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루치드가 몸을 돌려 혜진에게 물었다.

“일어설 수 있겠어?”

혜진은 대답도, 고갯짓도 하지 않았다. 정신이 반쯤 나간 얼굴로 멍하니 루치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을 보니 자기 앞에 누가 서 있는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루치드는 다시 몸을 돌려 어른들을 바라보았다. 비록 작은 체구지만, 몸으로라도 혜진의 얼굴을 가려주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기자님들 맞으시죠? 기자님들은 여자 아이가 넘어졌는데 어떻게 가만히 두고 보고만 계시는 거죠? 상식적으로 쓰러진 사람을 부축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 배웠는데,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그리고 여자아이가 지금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이 안보이세요? 지금 기자님들이 하는 건 겁박이라고 배웠는데 아닌가요? 여자애를 겁박해서 기사거리를 얻고 기사를 쓰는 게 기자님들의 일인가요? 그런 건 법적으로 옳은 일이고 도덕적으로 옳은 일인건가요?”

순간 얼이 나간 기자단은 루치드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냥 봐도 저학년 초등학생이고, 장혜진과 아는 사이인 듯 보이니 3학년일 테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 말하는 본새는 중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찌됐든 상대는 초등학생. 언론고시를 패스하고 언론사에 입사하여 글짓기를 밥 먹듯, 책읽기를 물마시듯 해온 어른들이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꼬마야, 비켜라.”

“아무것도 모르면서 끼어들지 말거라.”

당연하겠지만, 눈앞의 꼬마를 상대로 주저리주저리 떠들 이유가 그들에게는 없었다. 어른에게 순종하고 권위에 복종하게끔 만드는 것이 지난 세월 기자로서 익힌 노하우였다. 그들이 어른들에게 그러했듯이.

루치드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말들. 불과 며칠 전에 뒤에 앉아 있는 애한테 들은 말인데.

숨을 고르고 할 말을 정리했다.

“지금 기자 분들은 한 여학생을 둘러싸고 겁박을 하며, 동시에 행동에 제약을 가하고 있습니다. 민법상 강박으로 인한 손해행위에 대해 배상청구가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기자 분들은 이에 동의하십니까?”

어? 얘 뭐라는 거야?

“아이가 넘어진 상황에서도 물리적 구호행위를 취하지 않았으며, 아이를 겁박하는 행위를 지속하였습니다. 이는 고의적인 강박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미 주변에 많은 증인들이 있으니 이에 대해 기자 분들은 참고하세요.”

응?

“비록 증인들의 연령이 13세 미만 아동이 대부분이지만 이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합쳐질 경우 법정에서 분명한 증거의 효력을 다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따라서, 어떤 이유에서든 차후 이 상황에 대해 민사재판이 벌어질 때 기자 분들에게 불리한 상황이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더 이상 상황을 악화시키지 마시고 물러나주시기를 바랍니다.”

기자들은 정신이 없었다. 방금 자신들이 무엇을 들은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민법을 배우나? 대학교 3학년이 아니고? 이런 멍청한 생각을 하는 기자들도 있었다.

“석고야!”

루치드가 옆을 보니, 명수가 보육교사와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보육교사는 영문도 모른 채 명수에게 끌려오다 기자들 사이에 서 있는 루치드를 발견하고는 낯빛이 변했다.

“이게 무슨 일들이신가요?”

보육교사가 얼떨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기자들에게 물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하나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루치드는 이에 관여치 않고 몸을 돌려 혜진이를 부축했다.

“혜진아, 일어나.”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눈을 돌려 루치드를 올려다보았다. 지금껏 내려다보기만 했던 루치드가 갑자기 커 보였다.

루치드는 혜진을 부축하여 자리를 빠져나왔다. 우선 자리를 피할 생각으로 승합차로 데려가는데, 그것을 제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얼이 빠져 있던 기자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명수가 보육교사를 데리고 승합차에 올라탄 뒤였다.

정신을 차린 몇몇 기자들이 돌아보며 떠나는 승합차를 잡으려는 손짓을 보이다가 이내 기운 빠진 모양새로 돌아섰다.

“방금 뭐였지?”

“귀신한테 홀린 기분이네.”

기자들은 서로를 쳐다보다, 어느 누구도 명쾌하게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자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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