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63화 (6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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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위원장님. 지금 우리 쪽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눈 밑이 유달리 검게 변색된 조직위원장이 황급히 답변을 했다.

“예, 일단 지지자들의 확보가 시급한 상황에서 터진 유언비어가 꽤 혼란을 주고 있나봅니다. 지지율이 조금 내려간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조직위원장이 애를 쓰고 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 운동본부에서 가장 자기 일 잘하는 사람은 저 사람, 이라고 주정호는 생각했다. 반대로 가장 일 못하는 사람은,

“선전팀장님?”

마른 얼굴에 핏기가 쫙 빠져서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게다가 정리되지 못한 턱수염과 퀭한 광대뼈 옆으로 흐르는 땀국물을 보고 있자니 주정호의 마음도 오염되는 것 같았다.

“예. 저희도 열심히 알아보고는 있는데, 확실한 제보가 따르지 않으면 조금 어려울…….”

선전팀장은 상대의 흑색선전에 맞불을 놓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라는 지시를 이행중에 있었다. 자고로 블랙 앤 블랙이다. 그런데 저 허수아비 같은 작자가 그 일 하나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깨끗한 사람? 그런 사람이 이 선거판에 끼어들었을 리가 없다고 주정호는 확신했다.

“팀장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마치 칼날처럼 느껴졌다. 선전팀장은 자신의 목에 겨눠진 칼이 섬뜩해서 침도 제대로 못 삼킬 정도였다.

“예.”

“팀장님이 얼마나 유능하신 분인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저희가 보기에 못 미더운 모습을 보이시니 조금 실망스러운 마음도 듭니다.”

칼날이 목을 톡톡 두드리며 죽을래 살래, 라고 묻는 것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

팀장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짜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대, 대신 현재 유언비어 확산 방지에 총력을 다하고 있으니 조만간… 효과가 있을 겁니다.”

빈말이나 다름없음을 모르지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보신(保身)의 본능이 입을 열게 했다. 물론 주정호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대책 없는 낙관 따위 선거에서 지고나면 무용지물이니까.

“우선은 지켜보겠습니다. 앞으로 유세 종료까지 일주일이죠? 이틀 안에 방안이 보이지 않으면 저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아니 모든 걸 잃을 수 있습니다. 다들 각오를 단단히 하시고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후보님.”

침착함이 사라진 선거운동본부의 모습에 주정호 후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처음 유세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어려워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호 1번 주정호는 벽에 붙은 자신의 홍보 포스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정도에 쓰러질 내가 아니다!’

지난 30년간 공직에서 구른 경험을 되살려, 직면한 위기를 해소할 대책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

루치드는 원 안으로 들어가 서로의 머리채를 틀어잡고 있는 손목을 붙잡았다. 혜진과 유림은 루치드가 하는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아 뭔가 싶었다.

순간 두 사람 다 화들짝 놀라 잡고 있던 손을 놓는 동시에, 루치드의 손으로부터 다급하게 손목을 빼냈다. 갑자기 손목이 화끈거려서 놀란 것이다. 손목을 보니 별다른 상처나 이상증세는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똑같은 반응을 보인 것으로 보아 루치드가 뭔가를 한 것 같았지만 그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야, 너 뭐 한 거야?”

“뭐한 거니?”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루치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같은 반에서, 자기가 보는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기 싫다는 단순한 이유로 일단 손을 쓰긴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자신이 이 두 사람을 어떻게 화해시켜야 할지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긴 왜 싸우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

임기응변으로 루치드는 기웅의 흉내를 내보기로 했다.

“너희들 왜 싸우는 건데?”

“뭐?”

혜진이 생전 이렇게 황당한 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얼굴로 루치드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140㎝이 안 되는 루치드가 ‘감히’, ‘겁도 없이’ 자신의 일에 훼방을 놓았다.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일단 밀치거나 겁을 줬을 테지만, 이 아이는 그 유명한 ‘석고’였다. 반에서, 아니 학교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애. 혹은 천재. 혹은 제일 잘 생긴 애. 하지만 자기 취향의 얼굴은 아니어서 다른 아이들처럼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의 부모님도 종종 ‘석고’에 대해 언급을 하면서 친하게 지내라는 둥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또 루치드도 자신의 눈에 띄는 행동을 하거나 자신의 거사(巨事)를 방해하는 일을 한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었기에 별 충돌 없이 지금껏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시점에서 겁도 없이 등장하니 어이가 없었다.

반면 유림은 조금 달랐다. 유림은 사실 루치드에게 호감이 있었다. 다만 자신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라이벌의 눈치가 보여 섣불리 루치드에게 다가가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소년의 별명처럼, ‘석고상’ 보듯이 매일 루치드를 훔쳐보며 연심을 키우고 있던 소녀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갑자기 루치드가 끼어드는 행동을 취하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고, 때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속으로 갈팡질팡하며 머뭇거리는 중이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루치드에 대한 감정과 라이벌에 대한 적개심 중 어느 쪽이 더 크게 마음속에 자리잡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해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비켜.”

유림이 먼저 말을 꺼냈다. 루치드가 다치지를 않길 바랐다.

“미안, 유림아. 그런데 난 너희들이 싸우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해.”

유림의 얼굴이 붉어졌다. 비키라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서?

‘내 이름을 불러줬어!’

유림이 알기로 루치드가 누군가의 이름을 저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거의 대부분은 아이들이 루치드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지, 루치드가 먼저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알 턱이 없는 루치드는 이내 혜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도 일단 침착하게 이야기를 해 봐. 왜 싸우려고 했는지. 굳이 주먹을 쓰지 않아도 대화로 풀 수 있다면 대화로 해결하는 게 옳다고 보는데, 난.”

혜진을 바라보며 루치드가 제안을 했다. 혜진은 키도 작은 게―또래 남자아이들과 비교해도 작은 편은 아니었는데 자신이 보기엔 거기서 거기―건방지게 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까불지 마.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정작 그 말에 욱한 것은 유림이었다.

“이게,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감히 석고에게 까불지마라고?’

유림이 다시 혜진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루치드가 가로막고 섰다. 루치드는 두 팔을 뻗어 유림의 팔꿈치 윗부분을 잡고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보기와 다르게 루치드는 힘이 좋아서 유림은 루치드를 밀치고 나아갈 수 없었다. 유림은 그 순간 엉뚱한 생각을 했다.

‘안으려고 했던 게 아닐까?’

팔을 붙잡아 말릴 것이 아니라, 남자답게 끌어안고 자신을 말렸다면. 마치 드라마처럼.

갑자기 자신의 키가 크다는 사실이 싫어졌다. 그리고 루치드가 아직 키가 작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졌다.

키만큼이나 조숙한 정신세계를 가진 유림이 첫 스킨십(?)에 당황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이, 루치드는 고개를 돌려 혜진을 바라봤다.

“물론 내가 모르는 게 있겠지. 니 자존심을 건드리려고 했던 건 아냐. 그래도 같은 반 친구들끼리 싸우는 건 좋지 않다고 봐. 만약 니가 유림이랑 싸우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 뒷일은 어떻게 감당할 거야?”

유림이었다면 내가 다칠까봐 걱정해 주는 거야? 라며 감동했을지도 모를 이야기였지만, 혜진에게는 자신의 자존심을 깔보는 발언으로 다가왔다.

“내가 다쳐? 내가 고작 얘하고 싸운다고 다칠 거 같아? 너 내가 우습니?”

루치드는 말을 할수록 난감한 상황에 빠지고 있음을 알았다. 어떤 포인트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혜진의 자존심을 계속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루치드가 느낀 것은 혜진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혜진이 느끼는 불안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 원인을 찾기보다 혜진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싸움을 멈추게 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했다.

유림의 왼팔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돌아섰다. 왼손은 여전히 유림의 오른팔을 붙잡은 채. 유림이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 채.

“난 널 절대 우습게보지 않아. 넌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해. 내가 널 우습게 볼 이유가 없어. 넌 너의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선생님께 칭찬도 받는 아이야. 우리 반에서 널 우습게 보는 사람은 없을 거야. 선생님들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그 만큼 넌 다른 사람들한테 기대를 많이 받는 아이라고 난 생각해. 그런데 만약 니가 여기서 반 친구랑 싸운다면 넌 너를 기대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넌 그걸 원하지 않을 거 같아. 그렇지 않아?”

“니 멋대로 추측하지마. 니가 뭔데 날 판단해?”

루치드는 깊은 한숨을 내셨다. 차라리 상대가 명수였다면, 말이라도 통했을 텐데. 혜진은 어떤 말을 해도 모두 잘라 먹혔다.

자신이 막고 있는 유림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무 말 없이―유림은 머릿속에서 현실과 판타지의 충돌로 혼란을 겪는 중―자신의 통제에 잘 따라주고 있었다. 혜진의 경우도 일단은 쉽게 싸움을 시작하지 않고 있으니 적어도 대화를 시도해 볼 여지는 있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볼까?’

그래도 이렇게 10분을 더 기다리는 건 루치드에게 고역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이런 식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아직도 나는 부족하구나, 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좋아, 그럼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뭐?”

“지금 뭘 원하는 건데?”

혜진은 당연히 자신이 원하는 게 있었다. 그랬으니 이렇게 팔을 걷어 부치고 유림과 대치상태에 들어간 것이었지. 그런데 당장 루치드에게 대답을 해주려니 어쩐지 궁색해졌다. 대답할 거리를 고민하다보니 자신이 원하던 게 무엇이었는지 희미해졌다. 뭐였더라?

대답 없이 노려만 보는 혜진의 반응을 보며 루치드는 이쯤에서 말을 꺼내야 하는지, 아니면 기다려야 하는지 고민이 됐다. 여기서 괜히 말을 붙였다가 화를 더 낼 수도 있었고, 기다렸다가 상대가 화가 가라앉을 수도 있었다. 반대로 말을 붙여서 상대를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하게끔 도울 수도 있었고, 기다렸다가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다.

다시 교실에 침묵이 자리 잡았다. 묘한 대치상황에서 아이들은 쉽게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지 않았다.

****

“인평시민 여러분, 공직자의 자리란 청렴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세월동안 수없이 많은 사례들을 보았고 경험했기 때문에 ‘청렴’이란 단어의 엄중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공직자의 자리란 가장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어 심사해야만 하는 자리이며, 그래야 우리 사회가 바르게, 공평무사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정호 후보는 무려 20년 전 우리의 피땀으로 바친 세금을 감히 자신의 배를 불리고자 횡령하였던 전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뒤에도 검찰의 조사는 받지 않았지만, 몇 건의 의혹들이 더 있던 것으로 밝혀진 상황입니다. 과연 그런 사람이 우리 인평시를 위해, 우리 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희생정신과 청빈의 자세를 요구하는 의원으로서 일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와!”

“주정호 후보가 말로만 정정당당이라고 외칠 때, 저는 법정에서, 사회에서, 이 거리에서! 정정당당하게 행동하며 살아왔습니다. 언제나 공정하고 깨끗한 사회, 상식과 기준이 바른 사회를 만든다는 신념으로, 인권변호사로서 20여 년간 이 사회를 위해, 국민들을 위해 지난 시간을 바쳐 온 저 강해준이가, 이제 인평시민 여러분을 위해서 제 한 몸을 바치고자 합니다, 여러분!”

“와!”

“기호 2번, 강해준이를 기억해주시고 꼭 투표해주십시오. 기호 2번 강해준을 꼭 뽑아서 인평시를 위해, 이 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여러분!”

유세 트럭 옆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트로트 멜로디와 함께 ‘기호 2번 믿어봐’ 라는 유세송이 흘러나왔다. 선전 띠를 둘러멘 선거운동원들이 트럭 앞에서 신나게 율동을 보이고, 강해준은 만면에 미소를 띄고 연거푸 허리를 숙이고 군중을 향해 인사를 했다.

군중들의 환호성이 대로변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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