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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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시가 보궐선거로 소란스러웠다. 오죽하면 초등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유세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져 교실에까지 다다를까. 그러나 유세 현장의 들뜬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인평초등학교 3학년 2반에는 서늘한 기운이 불어들었다. 단순히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가을바람 탓만은 아니었다.
점심시간 식사를 끝낸 시간, 몇몇 남자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달려간 틈에 교실 뒤편에는 교실에 남아있던 나머지 아이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두 대장군이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10분 전.
아이들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오늘도 은혜로운 급식판을 받아 정답게 사담을 나누며 먹던 아이들. 성질 급한 남자 아이들은 씹는지 마시는지 모를 정도로 먹더니 이내 식판을 반납하고 운동장으로 뛰어갔다. 여자 아이들은 몇몇이 패를 갈라 저희들끼리 오붓하게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실의 분위기가 묘했다. 평소라면 즐거웠을 식사시간에 어쩐지 긴장감이 넘쳐흘렀다.
“야, 그래도 밥은 맛있게 먹네.”
누군가가 기어코 재를 뿌렸다. 4분단에 앉은 유경이었다.
“내가 먹던지 말던지 니가 무슨 상관인데.”
잿가루 위에 송홧가루를 얹었다. 1분단에 앉아 밥을 먹던 은진이었다.
“야, 너 말 되게 예쁘게 한다?”
다시 유경이 위에 석탄가루를 얹었다.
“이게 진짜!”
뿔이 난 은진이 일어서자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다 쓰러졌다. 그 순간 교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야, 박은진. 가만히 있어라.”
날카로운 목소리가 교실을 가로질렀다. 유경과 함께 앉아 있던 혜진의 칼날 같은 눈빛이 은진에게 겨눠졌다.
“장혜진. 니가 뭔데 계속 끼어들어?”
아직 앳된 목소리의 유림은, 속에 잔뜩 불을 집어 삼킨 듯 화가 치밀어 올랐다는 얼굴로 혜진을 향해 일성을 뱉어냈다.
남아있던 몇몇 남자아이들과 여자 패거리(?)들이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운동장으로부터 들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들이 유세현장의 소란과 섞여 가을바람과 함께 어슴푸레하게 교실을 헤집고 지나갔다. 하지만 전장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듯, 교실은 일촉즉발의 무거운 공기로 가득했다. 누구하나 쉽게 소리를 내지 못했다. 창가 쪽에 앉아 있는 유림과 교실 뒷문 근처에 앉은 혜진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일단 유림이 벼린 칼날을 겨눴다.
“야, 장혜진. 왜 은진이보고 가만히 있으라 마라 하니? 유경이 먼저 시비를 걸었잖아. 안보여? 염치도 없니?”
“뭐? 염치? 서유림, 너야말로 미쳤니?”
“미쳐? 누가 미쳤다고 그래? 너 죽고 싶어?”
“하, 그래. 죽여 봐라. 응? 죽여 봐.”
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덩달아 유림이 일어났다. 둘이 일어나서 교실 뒤편 가운데 마주서자, 어느새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두 사람 주위로 원을 만들었다.
“너 되게 웃긴다? 니가 뭐라도 된 줄 알고 그러니?”
하얀 맨투맨 티셔츠에 붉은 색 체크무늬 스커트를 입은 유림이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혜진을 바라봤다.
“뭐?”
베이지색 롱 후드티에 레깅스 차림으로 무장한 혜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유림에게 한 발 다가갔다.
“니가 쟤 시녀야?”
순간 눈이 뒤집힌 혜진이 먼저 손을 뻗었다.
2시간 전.
사회 과목 시간에 선생님은 최근 인평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궐선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선거는 이 사회의 기본 체제인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기에 좋은 소재였다.
“여러분, 오늘은 우리 고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 계획이랍니다. 요즘 시내에 띠를 둘러메고 인사를 하거나 연설을 하시는 분들 본 적 있죠?”
“예.”
“혹시 무슨 일인지 아는 사람?”
“선거요.”
“예. 맞아요. 선거를 하는 거예요. 1학기 때도 선거가 있었지만, 우리가 자세히 배우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선거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에 대해 배워볼 거예요.”
선생님은 민주주의와 선거에 대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다 수업이 종료되기 전, 이번 보궐선거에 대해 간단히 언급을 했다.
“원래 선거로 의원을 뽑으면 다음 선거 때까지는 그 사람이 계속 책임을 다해야 되요. 마치 우리 반 반장처럼 말이에요. 은진이가 1학기 때 우리 반 반장으로서 노력했어요. 그렇죠?”
“예.”
목소리가 조금 작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선생님은 설명을 이었다.
“그리고 2학기가 되면서 우리가 반장을 새로 뽑았죠? 지금 우리 반 반장이 누구죠?”
“유경이요.”
몇 몇 아이들이 외쳤다. 하지만 몇 몇 아이들은 유경이를 째려봤다. 유경이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제야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교사가 유경이에게 물었다.
“유경아, 무슨 일 있니?”
“아니요.”
누가 들어도 억지로 쥐어짜내듯 힘겹게 내뱉는 목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수업을 진행하느라 아이들의 분위기를 제대로 캐치해내지 못한 선생님의 실수였다. 이럴 때는 한 반에 40명씩 되는 아이들을 혼자서 통제하는 게 쉽지 않다고 여겼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은진의 표정도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은진이 계속 유경을 흘겨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진아, 무슨 일이니?”
은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을 잠깐 봤다가 다시 유경을 향해 표독스런 눈길을 던졌다.
“너네 싸웠니?”
“…….”
마침 수업 종이 울렸다. 선생님은 두 사람을 상담실로 불렀다. 반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몇 몇이 복도로 요란스럽게 뛰어나갔지만, 대부분은 전장에 감도는 암운(暗雲)을 느꼈는지 경거망동 하지 않았다.
5시간 전.
이제 막 아이들이 교실로 등교를 하고 있었다. 루치드도 자리에 앉아 수업을 준비했다. 사실 루치드의 수업 준비는 간단했다. 그냥 교과서를 읽는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과외나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문제집을 상시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항상 교과서 혹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는 게 다였다.
교과서를 읽던 루치드는 뒤가 시끄러워지는 분위기에 책을 읽고 있을 수 없었다. 고개를 뒤를 돌아보니 은진과 유경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서로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로 마주보고 있었다.
가만 보니 유경이 은진의 갈 길을 막고 있는 형국이었다.
“야, 너. 아직도 니가 반장인 줄 아니?”
“무슨 소리야?”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유경이 길을 막고 한다는 소리가 뜬금없이 들려 은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가 뭔데 애들한테 명령해?”
“무슨 명령?”
“니가 까톡에서 애들한테 그랬잖아! 수업 끝나고 남으라고!”
“아, 그건 우리 엄마가 먹을 거 사주고 싶다고 해서 그런 거잖아. 그게 무슨 명령이야?”
“야, 니 생일도 아니면서 니가 왜 애들을 모아? 그것도 딱 ‘남아’라고 말했잖아. 니가 아직도 반장인 줄 아는 거 아니면 뭐니? 그러고 보니 1학기 때도 너 그랬지? 애들보고 이거해라, 저거해라. 꼭 말을 해도 명령을 하더라? 지가 뭐가 된다고.”
“뭐?”
“넌 부탁이란 거 할 줄 모르니? 어떻게 애가 예의가 없어? 어휴, 진짜 너 모르지? 애들이 다 너보고 밉상이라고 하는 거? 진짜 내가 아무 말 안하고 참으려고 했는데, 너 진짜 너무 막나가더라.”
은진은 쏟아지는 말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몇몇 개는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 알아들은 단어는 은진을 소위 ‘욱’하게 만들었다.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어?”
“또라이? 너 나보고 또라이라고 했어?”
“했다, 어쩔래?”
유경은 그만 참지 못하고 은진의 머리채라도 잡아채려고 달려들었다. 그 찰나에 유경을 제지하는 손길이 있었다.
“야 그만해. 왜 여기서 싸우려고 그래?”
이제 막 교실에 들어왔다가 두 사람을 본 혜진이 유경을 말렸다. 이제 겨우 135㎝를 갓 넘은 유경이 150㎝에 육박하는 혜진을 힘으로 이길 수 없었다.
“너도 봤잖아? 얘가 우리한테 막 명령질하고 대장질하는 거. 그게 화가 나서 반장으로서 한마디 했는데, 나보고 또라이라고 욕을 하잖아.”
“너 그랬어?”
혜진이 돌아서며 은진을 쳐다봤다. 아니 노려봤다. 은진이 순간 겁을 먹고 아무 말을 못하는 와중에 또 다른 세력이 참전했다.
“야, 너 뭐야? 뭔데 사람을 그렇게 쳐다보니?”
앳되고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유림이 성큼성큼 걸어와 은진과 혜진 사이를 파고 들었다. 싸늘하고 날카로운 비수가 허공에서 맞부딪히며 빛이 번쩍거렸다. 아이들은 일대종사(一代宗師)의 기싸움과도 같은 눈싸움에 위축되어 아무 말도 못했다.
루치드는 가만히 네 사람을 쳐다보았다. 루치드는 반에서 핸드폰이 없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때문에 저 아이들이 싸우는 계기가 된 까톡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1학기 때도 은진의 말투 때문에 몇몇 아이들―주로 여자 아이들―이 불쾌해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참고로 남자애들은 그다지 불쾌해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부분 남자애들은 그런 면에서 무덤덤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냥 신경이 무뎌서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니면 3학년 2반의 특수성 때문일 수도 있겠다. 선생님들도 우스갯소리처럼 말하지만, 루치드의 반은 시쳇말로 ‘여초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은 비단 말투에 관한 것 때문만은 아니지 싶었다. 그런 것보다는 오히려 2학기 반장인 유경이 자신의 반장으로서의 권위를 침해당했다는 것에 화가 나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지 않을까, 추측했다. ‘니가 뭔데’ 라는 표현에서는 자신을 왜 무시 하냐는 항변의 의미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겨우 반장인데, 어떤 권위가 있다는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제대로 말이 오고 간 게 아니지만 뉘앙스는 분명히 반장의 권위에 관한 문제였는데 말이다. 루치드로서는 고작 초등학교의, 고작 40명의 반 학생을 대표하는 반장이란 자리가 그렇게 중요한 자리인지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저 아이들의 싸움을 어떻게 말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루치드는 원인을 잘못 해석했다. 반장의 권위가 아니라 서로의 자존심이 문제였다.
의외로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자존심 문제는 꽤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이미 3학년 쯤 된 여자아이들이라면 매우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도 싸울 수 있었다. 가령,
“왜 내 친구한테 그렇게 말하는데?”
와 같은 이유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가 무시당하면 자신의 자존심도 무시당한다는 생각에서 싸우게 된다. 혹은,
“겨우 이거 만든 거니?”
와 같은 이유로 싸웠다. 여기서 포인트는 ‘겨우’라는 단어가 주는 깊은 상처와 패배감이었다. 루치드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초등학교 3학년 여자아이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자존심은 누구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그런 것이었다.
루치드가 잠깐 고민에 빠진 사이에 아이들의 대치는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면서 깨졌다. 아이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고 사태는 마무리 된 듯 했다.
다시 점심시간.
은진과 유경의 싸움이 혜진과 유림의 싸움으로 번진 것은 역시 해묵은 감정의 대립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라이벌로서 서로를 경계하던 두 사람 사이의 도화선에 자존심이란 불이 붙었다. 결국 두 사람은 대장군의 기세를 내뿜으며 맞붙게 된 것이었다.
혜진은 유림이 ‘시녀’라고 비하하는 순간, 눈이 뒤집혔다. 이를 악물고 손을 뻗어 유림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라 할 만큼 유림 역시 혜진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서로의 고개가 붙잡힌 머리 쪽으로 꺾였다.
“놔라.”
“너나 놔라.”
아이들은 섣불리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칫했다가는 싸움에 휘말려 자기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루치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어찌됐든 한 반에서 함께 생활할 친구들이었고, 모름지기 싸움이란 말려야 하는 것이다. 지난날의 깨달음은 루치드를 성숙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이들이 성숙해질 시간이었고, 루치드는 기회를 주고자 했다.
루치드는 아이들의 무리를 헤치고 원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