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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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일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 어느새 루치드는 4번째 가을을 맞이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약간의 해프닝도 있었지만, 대체로 평탄하게 흘러간 3학년 생활이었다. 1,2학년과 달라진 커리큘럼에 버벅대던 아이들도 2학기가 시작되니 거의 적응한 모습을 보였다.
“야, 패스!”
“여기, 여기! 얘 맞춰!”
보통 피구를 생각하면 여학생들은 뒤에서 피하고 남학생들은 앞에 나서서 공을 잡으려 들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3학년 2반은 조금 달랐다. 3학년인데도 불구하고 키가 벌써 150㎝에 달하는 거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혜진아! 받아!”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솟아있는 장혜진이라는 아이는 손을 뻗어 위로 넘어가는 공을 손쉽게 잡아냈다. 키가 크니 여리여리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혜진은 반에서도 운동신경이 제법 발달한 학생들 중 하나였다. 어지간한 남학생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였다.
“앗!”
“야, 맞았다. 너 맞았어!”
혜진이 던진 공을 피하려고 허리를 비틀어 보았지만, 결국 스치듯 맞고 말았던 남학생은 다른 아이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아쉬운 얼굴로 코트를 벗어났다.
루치드는 이미 코트 외부로 나가서 공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잡아다가 패스를 해 주고 있었다. 마침 남자아이를 맞춘 공이 궤도가 바뀌면서 루치드 발밑으로 굴렀다. 루치드는 가볍게 공을 주워다가 반대편 코트 안으로 던져주었다. 혜진이 그 공을 잡고는 어디로 던질지 궁리했다. 양손으로 야무지게 공을 잡고 던질 시늉만 해도 코트 안에 있던 아이들이 양떼들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아 코트 위에 서 있으려고 전력을 다하는 생존자들이었다. 그러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서 머뭇거리는 아이가 나오면,
“와! 맞았다. 맞았어!”
“병우야, 너 맞았어! 빨리 나가!”
혜진의 공은 어김없이 날아와 다리를 맞췄다. 공격팀은 환호성을 지르고 상대팀은 아쉬움의 한숨을 내셨다.
다리를 맞춘 공이 다시 코트 밖으로 나가기 전, 빛보다 빠르게 달려와 낚아채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가 공을 집어들자 상대팀의 기세가 올랐다. 공을 잡는 것만으로 기세가 오르게 만드는 아이. 그 만큼 신망을 받고 있는 아이는 3학년 2반의 또 다른 기둥. 서유림이었다.
희한하게도 3학년 2반에서 가장 키가 큰 두 친구가 모두 여학생이었다. 가장 큰 아이는 혜진이었지만, 그 못지않게 키가 큰 유림은 운동도 잘했다. 때문에 체육시간만 되면 유림이 팀과 혜진이 팀으로 나뉘어 경기를 하곤 했다. 남자 아이들이 힘껏 던진 공도 마치 떨어지는 사과 잡아내듯 가볍게 낚아챌 수 있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은 두 아이는 소위 ‘라이벌’이었다.
“유림아, 던져!”
“혜진아, 피해!”
“죽여라! 죽여라!”
살벌한 응원문구들이 터져 나왔지만 그렇게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두 장수의 일기토를 기대하는 구경꾼들 같은 눈빛으로 두 사람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루치드도 내심 기대하며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봤다. 두 사람은 모두 승부욕이 강해서 어지간한 남자아이들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였다. 오로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진지한 승부를 가를 뿐이었다. 체육 시간 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 수업에서도 한 사람이 손을 들면 답을 몰라도 지기 싫다는 이유로 덩달아 손을 들 정도였다.
내심 생각해보면, 루치드는 그런 승부욕이 없었다. 특히 이런 체육시간에서 자신을 부각되게 만드는 장면을 극히 꺼려했다. 1, 2학년 때 이미 충분히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었고, 그 결과 자신만 피곤하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주위 사람들보다 빼어난 모습을 보여 봐야 그다지 뿌듯하다는 느낌은 없었고, 오히려 여기저기―교장실이나 교무실이나 원장실이나 광고 촬영장이나 방송 세트장―에 불려 다니면서 자신만의 시간이 줄어들 뿐이었기에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래서 체육시간에 피구를 해도 억지로 손을 내밀어 잡는 척하면서 맞아주고 코트를 벗어나곤 했다. 대신 금 밖에 서 있다가 공이 자기 쪽으로 날아오면, 가볍게 공을 잡아낸 뒤 공격권을 같은 팀에게 넘기는 방식을 취했다. 코트 안에서는 공 한 번 제대로 못 잡으면서, 코트 밖에서는 어떤 공도 다 잡아내는 루치드의 실력을 의아하게 생각해 볼 법도 하건만, 아무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 걸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두 여(女)장군의 위엄이 코트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의 공방전이 오가던 중, 혜진이 던진 공을 유림이 피했다. 목표를 잃은 공은 루치드 쪽으로 빠르게 날아들었다. 거의 머리 위로 벗어날 듯이 높이 솟아 날아가는 공을 향해 루치드는 마찰력을 높이는 마법을 시전했다. 그 뒤 손을 뻗으면 공은 벗어나는 일 없이 손에 가볍게 잡혔다. 루치드는 잡은 공을 다시 혜진에 던져주었다.
루치드는 두 학생의 활약 덕택에 자신이 부각되는 일이 줄었다고 생각하며 만족했다.
물론,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학부모들의 SNS에서는 3학년 2반에서 가장 우수한 학업성적을 얻은 루치드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되기도 했었다.
-아니, 걔가 이번에도 1등이라면서요?
-걔 정말 영어 못해요? 어떻게 영어시험도 만점이래요?
-영어를 쓰는 건 할 줄 아는데, 말하거나 듣는 건 못하나 봐요.
-우리 애한테 물어보니까, 집중력이 그렇게 좋은가 봐요. 앉으면 일어서질 않는다네?
-제가 한 번 교실에 간 적이 있었는데, 쉬는 시간에도 책을 읽고 있더라니까요?
-무슨 책인데요?
-저는 못 봤는데 우리 애가 봤더니, 교과서를 보더래요. 역시 예습 복습이 중요하구나 생각해서 우리 애한테도 시켰더니 10분을 못 앉아 있더라고요.
-우리 애도 그래요. 우리 애가 걔 반만 닮았으면 좋겠는데.
-영수 어머니는 그런 말씀 마세요. 영수도 반에서 2등, 3등 하잖아요. 우리 애는 겨우 10등 할까 말까 하는데.
10등 아래로는 대화에 낄 생각을 하지 못하고 대신,
‘이 여편네들이······.’
속으로 화를 삭이며 대화창을 바라봤다. 어느새 대화창에는 걱정을 가장한 자기 아이들 자랑 퍼레이드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 놈의 자식들을······.’
집에 돌아오면 영문도 모르고 혼이 날 아이들의 미래를 당사자들은 전혀 몰랐다. 그저 즐겁게 땀을 흘리며 코트를 누빌 뿐.
****
보육원의 초등학교 통학차량에는 이제 몇 사람 타지 않게 되었다. 2년 전만 해도 7명이 시끌벅적거리며 탔었는데, 이제는 철용과 명수, 루치드까지 해서 세 사람만 타고 다녔다. 형근은 중학생이 된 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운동장에도 자주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도서관에 자주 얼굴을 비추면서 루치드와 자주 마주쳤고, 그 모습을 본 보육교사들은 철 들었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영은 소미가 보육원을 떠난 이후, 한동안 우울증 비슷한 증세를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올라간 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면서 다시 예전의 밝은 모습을 되찾는 중이었다. 다소 통통했던 다영은 지난 시간 꽤 많이 힘들어하면서 살이 많이 빠졌었는데, 덕분에 미모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남학생들의 눈길을 많이 끌고 있었다.
세 명 밖에 없어서 조용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1학년이었을 때나 3학년이었을 때나 변함없이 에너지가 넘치는 명수와, 그에 못지않게 활달한 철용 덕분에 통학차는 조용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차량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도 무척 시끄러웠다.
“선생님, 저게 뭐예요?”
명수가 확성기를 들고 거리 위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아저씨를 가리키며 물었다. 보육교사는 힐끔 쳐다보더니,
“선거운동을 하는 거구나.”
라고 알려주었다. 철용이 되물었다.
“지난번에 하지 않았어요?”
이미 4월 달에 선거가 한 번 있었고, 그 때 무척 소란스러웠던 기억을 가지고 있던 철용은 이를 지적했다. 당시 선거 후보자들이 한 번씩 보육원을 찾아와서 화보집을 촬영할 기세로 달려들어 하루 종일 카메라를 들이 밀던 기억을 아이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일이 조금 있어서 다시 선거를 한다는구나.”
“어떤 일이요?”
명수가 다시 되묻자, 보육교사는 조금 난감해졌다. 초등학생에게 보궐선거를 설명하려니, 자신이 가진 상식이 충분치 않았다.
“그 전에 뽑았던 사람이 계속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어.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그 일을 할 사람을 찾아서 선거를 하게 된 거란다.”
조금 부족하다 싶어서 보육교사는 설명을 덧붙였다.
“예를 들어서, 우리 원에 선생님들이 여러분 계시지? 그 중에 한 분이 아파서 그만둬야 하는 일이 생겼다고 생각해봐. 그러면 그 선생님이 하시던 일을 이어서 하실 분이 필요하겠지? 그것처럼 저 사람도 그 전 사람이 그만두면서 일을 할 사람이 없어지니까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나서서 선거운동을 하는 거란다.”
최선이었어, 라며 보육교사는 자신을 격려했다.
“남은 사람들이 하면 되잖아요.”
똑똑한 명수가 명쾌한 답을 제시했다. 답이 궁해진 보육교사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보육원에 행정과장님 계시지? 만약에 행정과장님이 아파서 일을 그만두면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니?”
보육교사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직위를 가진 행정과장을 예로 들면서 아이들의 이해를 도왔다. 행정과장이 맡은 전문적인 일은 다른 사람들이 쉽게 맡기 힘든 일일 테니까.
“선생님이 하시면 되죠.”
철용이 대답했다. 사실상 아이들의 눈에 행정과장은 다른 보육교사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단지 얼굴 보기 힘들고 말을 많이 안하는 아저씨 정도랄까?
저 놈은 공부는 안하고 맨날 공만 차더니 머리가 아주 축구공이네, 라는 말을 차마 뱉지 못하는 보육교사는 조금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자신을 낮췄다.
“행정과장님이 하는 일은 매우 어려워서 다른 사람들이 하기 힘들어. 매우 특별한 일이기 때문에 행정과장님 같이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들만 할 수 있거든.”
“선생님은 공부 안하고 놀았어요?”
빠직. 보육교사의 이마에 핏줄이 솟아났다. 루치드가 가만히 있다가 한 마디 했다.
“『로봇카 폴리』에서 로이가 없으면 불 끌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 그래서 로이처럼 불을 끌 수 있는 또 다른 로이를 찾아서 뽑는 거야.”
“아, 그렇구나.”
명수와 철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보육교사의 손등에 핏줄이 솟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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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인평시 여러분!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저 주정호가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들어주신 여러분에게 감사 인사드리며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씀드립니다. 저는 오직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 싸울 것이며 바른 생각과 상식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것이며 보다 살기 좋은 마을, 보다 살기 좋은 인평시를 만들어 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인평시 여러분,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에 속지 마시고 저 기호1번 주정호를 다시 한 번 기억해주시고 믿어주십시오. 정정당당하게 살아온 주정호, 앞으로도 당당한 걸음으로 여러분들 앞에 서도록 하겠습니다. 기호 1번 주정호입니다. 여러분!”
연설이 끝나자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이름을 연호했다. 그러나 멀찍이서 서있던 사람들 무리에서는 수군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저 사람, 소문 안 좋던데?”
“에이, 소문이 뭐 중요한가. 일만 잘하면 되지.”
“그래도 저 사람 됐다가 또 새 사람 뽑는다고 야단법석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설마 또 그러려고?”
“아니 그 전의 놈은 설마 했나? 그 놈도 지 뽑아달라고 그리 하더만, 6개월도 못 채우고 내려갔잖아.”
일부 사람들은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다.
“그래도 저 사람은 토박이잖아. 뭘 해도 이 동네를 위해서 뭔가 해주지 않겠어?”
“20년 전에 공무원 할 때 무슨 보조금 횡령했다고, 질이 안 좋다던데?”
“유언비어래잖아?”
“아니, 그럼 참말이라고 하겠어? 다 유언비어라고 딱 잡아떼고 보는 거지.”
“그래도 당이 힘이 있으니까, 도움 좀 받으면 이 동네에도 힘이 좀 실릴 거고, 그러면 좋은 거 아니겠어?”
인평시 의회의원 보궐선거는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