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5)
-------------- 60/952 --------------
“Do you have a pencil?”
“Yes, I do. Here it is.”
“Thanks.”
“Do you have a ruler?”
컴퓨터 스피커로 나오는 듣기 수업은 루치드에게 고역이었다. 아이들은 듣기에 맞춰 따라 말하기를 하지만, 루치드는 교과서의 그림만 쳐다볼 뿐이었다.
“Why don’t you try that?”
한 두 시간 정도는 영어 선생님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넘어갔을 텐데, 한학기가 지나도록 말이 없으니 둔감한 선생님이라도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물어도 대답이 없으니 선생님이 못 알아 듣나 싶어 한국어로 바꿔 질문했다.
“왜 안 따라해?”
루치드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개를 숙였다.
초등학교 영어시간은 사실 아이들에게 노는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과외를 통해 배운 내용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대부분 간단한 몇 마디 단어를 반복해서 상황을 재현하는 수업이 대부분인지라 집중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라도 손쉽게 참여할 수 있었다. 또 영어 전담 선생님도 적극적인 수업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다른 수업에 비해 훨씬 즐거운 분위기에서 수업에 참여했다.
그래서 루치드처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는 소극적인 아이들을 영어 선생님은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그렇지만, 공교육과 의무교육의 첨단(尖端)에 섰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신 훌륭한 선생님들은 의무감으로 아이들을 독려하곤 했다.
“OK. Look. Repeat after me. 선생님 따라 해봐. 알았지?”
하지만 루치드의 닫힌 입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강압적으로 수업에 참여시킬 수는 없는 일. 결국 루치드의 문제는 수업이 끝나고 따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선생님은 다시 수업을 재개했다.
아이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자신들이 아는 루치드는 모르는 게 없는, 소위 ‘천재’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3학년 2반에서 루치드는 ‘아이돌’이었다. 그런데 아이돌의 명성에 금이 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돌에게 사고가 나면 대서특필 되기 마련이다.
“2반의 석고가 영어시간에 아무 말도 안하더래.”
아이들은 여전히 루치드를 석고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정작 1학년 때 루치드에게 석고라는 별명을 붙여준 지훈은 2학년 때 전학을 갔다. 사람은 떠났는데 별명을 남기고 떠났다.
“석고가 영어를 못한대.”
“석고가 수업시간에 말을 안 한대.”
석고와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는 이렇게 대답하기도 했다.
“석고는 2학년 때도 수업시간에 말 많이 안했어.”
“아니 아예 영어를 못한대. 수업 때 선생님이 물어도 대답을 못했대.”
아이들은 충격을 받았다.
“엄마, 엄마. 우리 반 석고가 있잖아요. 영어를 못해서 선생님이 물어도 대답을 못했어요.”
“엄마, 2반 석고 있잖아? 걔가······.”
“아빠, 석고라고 1학년 때 같은 반 했던 애 알지? 걔가······.”
“할머니, 우리 반 석고라고 있거든? 공부 되게 잘하는 애. 걔가 영어 못한대.”
“석호?”
“석호 아니고 석고.”
“에구, 무슨 애 이름을 그렇게 지었누?”
“······.”
학부모들에게도 그 일은 꽤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커피숍에 모인 학부모들의 간담회에서도 화제 거리로 올랐다.
“아니, 글쎄 2반의 걔 있잖아요? 석고라는 애?”
“아, 걔! 나도 들었어요. 우리 애가 말해줬는데 난 처음에 못 믿었다니깐.”
“저도요. 아니 방송까지 나올 정도로 똑똑하다던 애가 어떻게 그걸 못해?”
“무슨 일인데요?”
영문을 모른다는 듯, 눈에 물음표를 띄운 한 엄마에게 다른 엄마가 놀랐다는 되물었다.
“명은이 엄마는 몰라요? 거 있잖아요, 2반의 석고.”
“아니, 걔는 알죠. 그런데 걔가 왜요?”
“명은이가 같은 반이 아니라서 모르는구나. 글쎄 걔가 영어를 못한다지 뭐예요?”
“예? 에이, 설마요.”
명은 엄마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피식 웃었다. 아는 단어 20단어도 안 되는 명은이도 영어 수업이 재밌다면서 과외 시켜달라고 조르는 판인데. 집에만 오면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하이’니, ‘두유해브컵’이니 하며 엄마에게 영어 실력을 뽐내는 판인데?
“진짜래요. 선생님이 하이, 이랬는데 아무 말도 못하더라는 거예요.”
“정말요? 이런···. 아무리 똑똑해도 못하는 건 있나보네요.”
“내말이. 그 때도 방송 보니까, 영재는 아니라면서요? 가만 보니까 수학적으로는 조금 재능이 있긴 했나본데, 언어 쪽으로는 꽝이었나 봐요.”
“세상 참 불공평하다 싶었는데, 이렇게 들으니까 또 공평하다고 생각 되네요?”
“그러니까요.”
학부모들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러면서도 고소하다는 내심을 감추기 급급했다. 우리 아이보다 잘난 아이 좋아할 부모는 아마도 없을 것 같았다. 특히나 그 아이가 보육원 아이라면.
아무튼 아이들, 학부모, 선생님들 할 거 없이 모두가 루치드의 무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영어를 말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도, 미안한 일도, 죄책감을 느낄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뿐이었다.
“영어가 어렵니?”
영어 선생님이 루치드를 데리고 상담실로 데려갔다. 선생님도 루치드가 학교에서 어떤 식으로 소문이 났던 아이인지는 알고 있었다. 아마 교무실에 있는 거의 모든 선생님들이 루치드의 질문을 피해서 도망쳤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단, 영어선생님만은 루치드의 질문을 받지 않았었기에 피난(?) 무리에 섞이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루치드는 자신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묵비권을 행사 중에 있었다.
“혹시 선생님이 싫어?”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선생님 오해하지 마세요, 라는 듯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루치드였다. 다행이라며 안심한 선생님은 왜 영어 시간에 말을 하지 않는지를 물었다. 루치드는 고민 했다. 이 사태를 어찌 벗어나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침 상담실에 선생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제안을 했다.
“선생님, 혹시 말이에요. 제가 이유를 설명 드리면 수업시간에 아무 말 안하더라도 봐주실 수 있을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영어 시간에는 듣고 말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그걸 안하겠다는 거니?”
“저기 사정이 조금 있어요. 선생님. 대신 선생님이 봐주신다고 하셔야 제가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똑똑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자신이 고등학생이랑 이야기를 하는 건지 초등학생이랑 이야기를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뭔데? 일단 들어보고 판단해야겠구나.”
루치드는 계속 고민을 했다. 결국 결정을 내린 루치드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선생님 아무거나 영어로 말씀해주실래요?”
“영어로?”
“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I don’t understand.”
“Tell me anything in English.”
“What? 아니 뭐?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영어로 말씀해주시라고요.”
“너 방금 영어로 말했잖아?”
그것도 아직 가르치지도 않은 Anything 이란 단어를 써가면서. 게다가 발음은 왜 이렇게 좋은 거야?
“······.”
루치드는 아무 말도 안했다. 선생님은 다시 영어로 물어봤다.
「너 영어 할 줄 아니? 어떻게 할 줄 아는 거야? 어렸을 때 배웠던 거야?」
「아니요. 배운 적은 없어요. 아니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선생님이랑 대화는 가능할 정도라고 생각은 해요.」
라고 영어로 대답하는 루치드였다. 영어 선생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천재, 천재라고 이야기만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그 정도 까지는 아니에요. 그냥 제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 정도만 좀 더 공부를 한 탓에 그런 거지, 사실 저는 천재 같은 거 아니에요. 과학시간에도 처음 듣는 내용들이 나오면 다른 애들하고 똑같이 수업 듣거든요.」
라고 영어로 대답해버리는(!) 루치드였다. 영어 선생님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너··· 영어 잘하는구나.”
“글쎄요.”
루치드는 한국어로 겸손하게 대답했다.
이후 루치드는 수업시간 면제를 허락받았다. 대신 수업시간에 다른 과목 공부를 하지 않겠노라는 약속을 해야 했다. 물론 루치드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약속에 응했다. 대신 선생님께 부탁을 했다.
“부디 다른 분들께는 이 이야기가 안 전해 졌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선생님이 천재라고 하셔서 부담스러운 데, 이 이야기가 다른 분들께 전해진다면, 저 진짜 부담스러워서 공부하기 힘들 거 같아요.”
영어 선생님도 일단 둘 만의 비밀로 하자는 루치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한동안 교무실에서 엉덩이를 들썩이거나 교무실을 서성거리며 불안장애증상을 보이는 영어 선생님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있었다는 후문이다. 학교 건물 뒤에 대나무 숲이라도 있었다면 불안증세가 나아질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학교 뒤편에는 4차선 대로와 상가들이 있을 뿐이었다.
루치드가 영어시간에 혼란스러웠던 이유. 사실은 영어가 영어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영어와 한국어로 번갈아가며 설명을 해도 루치드의 귀에는 똑같은 말을 두 번 하는 식으로만 들리는 것이었다. 물론 이후에 주의 깊게 들으면서 영어와 한국어를 구별할 수는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두 언어를 분간 없이 듣고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 루치드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반면에 선생님이 판서를 해주시거나 교과서에 적혀 있는 영어를 보면 읽거나 이해하는 게 어려웠다. 아니 이해할 수 없었다. 배우지 않았으니까.
루치드는 이와 같은 상황을 과거에 한 번 겪었다. 바로 이 세상으로 전이되어 왔을 때.
낯선 경찰이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데 그게 자신이 아는 말과 다르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알아듣고 대답하기까지 했었다. 단,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는 순간 머릿속에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모르는 언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처음 접해보는 언어들을 아무런 장애 없이 듣고 이해하고 말하는 프로세스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이 발현이 되니 더 난감했다.
영어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귀에 들려오는 대화를 아무 장애 없이 알아듣고 있었고, 또 자신이 그 말에 대답을 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처음에 얼마나 놀랬는지 말도 못할 정도였다.
문제는 루치드가 내 뱉는 말이 한국어인지 영어인지가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머릿속에서 두 언어를 교환시켜가며 내보내는 중추신경계가 고장이 난건지 어떤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 상대방이 영어로 물으면 그에 대해 영어로 답하는 정도는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영어시간에 고개를 숙이고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는 한국어로만 대화를 했기에 크게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한국어가 글자를 외우고 활용하는 면에서는 쉬운 글자였기 때문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영어는 또 다른 언어이고, 특히 영어와 한국어를 혼용해서 쓰는 수업시간에는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경험적으로 이런 일, 자신의 통제력을 벗어난 사태를 사람들에게 들켜선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루치드였다. 선생님이 내뱉는 말 모두를 영어로 답한다고 가정하면 지금 이상의 과도한 관심과 집중이 쏠릴 게 뻔하고, 잘못했다가는 자신의 과거까지 의심받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까도 영어 선생님이 루치드의 어릴 적 일을 지나가듯 물었던 것이 그 증거였다.
‘조심해야 돼.’
루치드는 수업시간에 말은 하지 않아도, 대신 영어는 계속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글을 배우듯 영어도 배워는 놔야 중학교든 고등학교든 가서 힘들지 않을 테니까.
대한민국 초중고를 통틀어 모든 학생들이 가장 부러워할만한 능력을 자각한 초등학교 3학년 루치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