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3)
-------------- 58/952 --------------
방학이 되면 아이들에게 시간이 남아 돌았다. 물론 보육원에서 어느 정도 통제를 한다지만 대부분 아이들은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단, 보육원 안에서만.
4시부터 6시까지 TV시청이 허락되는데, 4시가 되면 밖에서 놀던 아이들도 뛰어 들어와 42인치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만화를 시청했다. 고등학생을 제외한 보육원생 거의 전체가 온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물론 진성 축구 마니아들은 만화도 거부하고 공을 차긴 하지만, 더위에 지친 대부분은 TV 앞으로 모여들었다.
시청각실에서 만화주제가 합창―대부분 음정이 제멋대로다―이 울려 퍼질 때, 루치드는 도서관에 있었다. 2학년이 되고 나서도 크게 생활패턴이 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보육원 도서관에 머무르는 시간이 조금 늘었다는 것과 아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늘었다는 것 외에는 변한 게 없었다.
변하지 않은 것 중의 또 한 가지는 TV시청이었다. 루치드는 평소에 TV를 보지 않았다.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이 보육원에 왔을 때 당연히 시청각실도 안내 받았었고, 명수를 따라 시청각실에 와서 멍하니 TV를 본 적도 있었다.처음엔 신기했다. 작은 상자 안에 움직이는 사람들의 영상이란 것은 문화 충격을 넘어선, 거의 핵폭탄 급 파괴력으로 소년에게 다가왔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것 외에도 신기한 것들이 넘쳐나던 때였던 데다가, 멘탈이 완전히 부서지기 직전까지 다다라 혼란의 극을 달리던 때였기에 소년은 TV를 보면서 재미를 찾을 수 없었다.
이후에 명수를 따라 와서 만화를 봤을 때도 재미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 때쯤에는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하던 때였다. 때문에 TV를 보면서 얻는 지식보다 책을 통해 얻는 지식이 더욱 많고, 또 들이는 시간에 대비해서 독서가 보다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들어, 루치드는 TV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 이후 TV를 본 것은 자신이 출연한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 뿐이었는데, 그 때도 처음에 잠시 보다가 이내 부끄러워져서, 결국 끝까지 보지 못하고 도망쳐버렸다.
6시―저녁식사 시간―가 10여분 정도 남았을 즈음, 루치드는 책을 덮고 도서관을 나왔다. 우습게도, 시청각실은 도서관으로부터 한 공실(公室) 건너에 있었다. 책과 TV 사이에서 갈등할 아이들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시청각실을 지나가던 루치드는 아이들이 부동자세로 TV를 보는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TV가 밥을 주는 것도 아닌데,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들 같은 모양새로 하나같이 입을 헤 벌리고 TV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나도 도서관에서 저런 모습일까?’
그 중에서도 명수의 모습이 사뭇 눈에 띄었다. 공을 차다가 왔음이 분명해 보이는, 땀에 젖었다가 마른 듯 아무렇게나 삐죽 솟은 머리카락들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입을 쭉 내밀고 있었다. 언젠가 책에서 저것과 비슷한 모습을 본 거 같은데, 아마 바나나를 앞에 둔 침팬지가 저런 모습으로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명수야, 밥 먹으러 가자.”
애니메이션이 끝나고도 미련을 못 버리고, 광고 하나 하나를 눈에 새기듯 집중하고 있던 명수를 부르자, 그제야 아쉬움 가득한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명수였다. 그러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왜 그러나 싶어 바라보니, 불꽃놀이 축제에 대한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명수가 중얼거리듯 말을 했다.
“나도 보고 싶다.”
“뭐, 불꽃놀이?”
“응.”
루치드 역시 불꽃놀이를 본 적은 없었다. 다만 책에서 불꽃놀이에 사용되는 화약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읽은 기억이 있었다. 그 때는 <색색 깔의 화려한 불꽃들이 하늘을 수놓는다>, 정도의 설명만 있었기에 그저 불꽃놀이를 상상해 볼 뿐이었다.
“너도 보고 싶지?”
보고 싶다고 말해, 라는 눈빛을 쏘는 명수였다. 만약 눈빛이 총알이라면 명수는 명사수였다.
“응, 보고 싶어.”
답은 정해져 있지.
“보러 갈 수 있는 방법 없을까?”
보러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해, 라는 눈빛을 쏘는 명수. 이번엔 과녁을 벗어났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아무리 루치드라도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다. 최근 외출이 허가됐다고는 하지만, 저녁 늦게 외출이 허락될 리 없었다.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보면, 방법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선생님한테 부탁하면 안 될까?”
선생님께 부탁해봐, 니가, 라는 뒷말이 생략되어 있지만, 절친한 친구인 루치드는 재깍 알아들었다. 명수의 간절함이 느껴져 되레 웃음이 나왔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안 될 것 같은데? 여기서는 안보이나?”
“너 작년에 못 봤지? 나도 못 봤거든? 그러니까 여기서 볼 수 없는 거야.”
명수의 미묘한 귀납법에는 루치드도 두 손 두 발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일단 밥 먹자.”
식사를 끝낸 후에도 명수는 불꽃놀이에 대한 강한 갈망을 드러내 보였고, 방에 들어와서도 불꽃놀이가 얼마나 아름다울지, 지금 안보면 죽을 때까지 못 볼지도 모른다며 하소연을 했다. 명수의 절박함이 루치드의 가슴을 울린 덕에, 루치드는 제대로 방법을 궁리해보기로 했다.
우선 기웅을 찾아갔다.
“형, 불꽃놀이 본 적 있어요?”
“있지.”
기웅은 풀고 있던 페이지에 펜을 끼워 두고 문제집을 덮었다.
“실제로요?”
“그럼. 예전에 인평시에서 무슨 축제를 하는데 불꽃놀이를 했던 적이 있어. 그 때 한 번 봤었지.”
“어떻게요?”
“독지가 한 분이 저녁까지 책임지겠다고 하시고 보육원 아이들 다 데리고 나갔었거든. 그 때 인평시 축제랑 연계해서 그 분이 무슨 위원회 임원이셨다는데, 아무튼 우리도 그 때 축제 때 나가서 노래 부르고 했었지.”
말하자면, 행사초청으로 참가한 뒤, 저녁에 이어진 불꽃놀이를 봤다는 이야기다.
“아까 TV보니까 불꽃놀이 광고 하던데, 혹시 보러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아, 그래서 물어보는 거구나. 어디서 하는데?”
“그건 못 봤어요.”
“인평시에서 하는 거라면, 어떻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곳이라면 보기 힘들 거야.”
루치드는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단순히 명수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의미에서 나선 것도 있지만, 루치드 본인도 불꽃놀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1g 정도는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1㎏정도 될지도 모르겠다.
“불꽃놀이 본 적 없어?”
“예.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상심한 듯한 표정의 루치드가 보기 안타까웠는지, 기웅이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그럼 바로 한 번 보여줄까?”
“어떻게요?”
기웅은 루치드를 데리고 시청각실 옆 PC실로 데리고 갔다. 참고로 PC실은 중학생이상만 입장가능하며, 그 곳 역시 시간제한이 있었다. 기웅은 보육교사에게 허락을 받은 뒤, 루치드를 데리고 PC실에 입성했다.
컴퓨터를 켜고, 옆에 루치드를 앉혔다. 이내 부팅이 완료된 컴퓨터에서 인터넷 창을 연 후, 동영상 사이트에서 불꽃놀이를 검색해 몇 개의 동영상을 찾아냈다.
결과만 말하자면, 루치드는 불꽃놀이의 현란한 화려함과 다양한 색깔의 향연에 눈이 즐겁다는 의미를 알게 되었다. 펑펑 터지는 효과음마저 즐거움을 주는 불꽃놀이였다.
“화약을 어떻게 만들기에 저런 색깔의, 우와, 저건 어떻게 하는 거래요?”
루치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모니터 속 불꽃놀이가 밥을 주는 것도 아닌데, 입을 헤 벌린 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기웅은 괜히 뿌듯한 마음도 들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결국 아무리 똑똑하고 조숙하다 해도, 아이는 아이일 뿐이었다. 이 어린 아이가 불꽃놀이에 푹 빠져 저런 눈빛을 보이는데, 그 가벼운 소원 하나 들어주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서글프기까지 했다. 다른 가정의 아이들이라면, 이런 건 소원거리도 되지 못할 텐데.
하지만, 루치드는 역시 달랐다. 소년이 감탄한 것은 불꽃놀이의 화려함도 있지만 진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빛이 만들어내는 조화의 아름다움이었다. 단순하게 태양빛, 형광등빛 정도에만 머물렀던 빛의 개념이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당연히 루치드는 다음의 생각으로까지 전진해 나갔다.
‘마법으로 불꽃놀이를 할 수 있을까?’
예전에 저쪽 세상에 손톱만한 불씨를 만들어 공중에 던져댄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도 저런 화려함은 없었다. 소년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 화려함이었기 때문이다.
루치드는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가 화약과 불꽃, 빛에 관한 책을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마법으로 만들어보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내일부터!’
우선은 동영상에 나오는 불꽃놀이들을 즐길 시간이었다.
****
다음 날부터 루치드는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다시 예전의 루치드―어떤 사람은 자폐증상이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할 정도였다―로 돌아간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시선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명수나 다른 아이들과 마주칠 때 딱히 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가볍게 인사도 하는 모습을 보면 그저,
‘또 책에 미쳤나보다.’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루치드는 정말 빛이란 주제에 미쳐 있었다.
다만, 아쉽게도 빛은 공부하면 할수록 어려운 개념―파동, 입자, 속도―들이 등장해서 진도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 아직은 루치드의 공부가 많이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집중하는 루치드였다. 필사의 의지, 각고의 노력, 무한의 열정.
불꽃놀이가 열리기로 한 축제날이 되었다. 보육교사는 안전을 이유로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명수는 실망감에 눈물을 보일 정도였다.
루치드는 여전히 책을 붙잡고, 틈틈이 이미지를 만들어보려고 애썼다.
여름이 지나갔다. 루치드는 방학기간 내내 빛에 대해 공부했고, 마법은 실패했다.
****
2학기가 시작되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긴팔 옷을 입기 시작했고, 화단에는 다시 별꽃 열매가 맺혔지만, 때늦은 태풍이 상륙하는 바람에 학교 화단은 엉망이 되었다.
명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신나게 공을 차기 시작했고, 시간에 맞춰 TV앞에 앉았으며, 책 읽는 루치드를 억지로 끌어내어 운동장에서 가만히 서 있도록 시키면서 자신은 아침저녁으로 운동장을 땀범벅이 될 때까지 누비고 다녔던 결과, 감기에 걸렸다.
루치드는 태풍이 불든, 골키퍼를 서든, 일교차가 크든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한 가지 주제에 몰두했다. 학교도서관이든, 보육원도서관이든, 시립도서관이든 기회가 닿는 대로, 시간이 나는 대로 휩쓸고 다녔다.
가을밤 다들 잠자리에 들 시간, 루치드는 명수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마른 수건이지만 마치 얼음을 가득 채운 것처럼 차가웠다. 물론 명수가 그 이유를 알아챌 수는 없었다.
“명수야. 많이 아파?”
루치드가 따뜻한 목소리로 불렀다. 명수는 조금 어질어질하다가도 차가운 수건이 닿으면 어쩐지 몸이 낫는 거 같고 기분이 좋았다. 특히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자신을 위해 땀을 닦아준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괜찮아. 자고나면 괜찮을 거 같애.”
어쩐지 기운 빠진 명수의 목소리가 가슴을 저리게 했다. 항상 밝게, 기운찬 목소리로 자신을 불렀는데.
“명수야, 잠깐 저기 좀 볼래?”
루치드는 명수를 부축해 자리에 앉게 도와주었다. 명수는 침대 위에 앉아 루치드가 가리킨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은 하늘, 희미한 달빛만 서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때,
“와!”
검은 캔버스 위로 형광색 물감을 뿌린 듯, 밝은 색색의 빛무리가 하늘을 수놓았다. 흰색 빛무리가 오른쪽에서 터지면, 왼쪽에서 파란색 빛이 원의 형태로 터지며 빛을 뿌렸다. 빨간 빛이 점점 커지더니 별모양으로 번쩍이며 하늘에 자국을 남기니 초록색 빛이 하늘을 가로지르다 방사형으로 퍼지면서 혜성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빛의 향연. 축제.
소리는 없었지만, 그 화려함은 어느 불꽃놀이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다양한 빛의 스펙트럼이 검은 밤하늘을 물들이고 명수의 눈을 물들였다.
명수는 그 불꽃들이 밥을 주는 것도 아닌데,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밥을 주지도 않았는데 밥값으로 눈물 한 방울을 하늘에 적선(積善)하는 명수였다.